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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29. 비구니(比丘尼) [하]

기자명 법보신문

왕건 부인 중 대서원부인 자매가 고려 최초

신라는 점차 중국에서 계율을 공부하고 연구한 유학승들의 귀국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배운 바를 근거로 독자적 교단을 형성해 갔다. 비구니 교단 역시도 이러한 신라불교 전반의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신라의 비구니 관련 기록 가운데 특이할 만한 내용은 바로 비구니 승직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 “국통(國統)은 1인인데, 진흥왕 12년에 고구려 혜량(惠亮) 법사(法師)로써 삼았다. 도유나랑(都維那娘) 1인인데, 아니(阿尼)로 삼았다. 대도유나(大都維那) 1인인데, 진흥왕이 보량(寶良) 법사(法師)로써 처음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학자들은 이 대목에서 ‘도유나랑’이 바로 비구니의 승직이고, ‘아니’라는 비구니가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신라시대에 비구니 스님들을 총 관리하는 ‘도유나랑’이라는 직제가 있었고, ‘아니’라고 하는 비구니가 이 직제를 맡은 비구니 스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신라에서 비구니 스님들의 위상이 적지 않았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비구니 교단이 형성돼 있었다는 유추가 가능한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라시대 비구니 스님들의 위상이 적지 않았다고 해서 그 위풍당당함이 고려나 조선에서도 똑 같았던 것은 아니다. 불교의 흥망성쇄와 더불어 비구니 또한 질곡의 세월을 거쳐야 했다.

신라엔 비구니 승직 ‘도유나랑’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기 비구니에 대한 예우가 비구와 크게 차별이 없었다. 구체적 사례가 스님들을 궁중으로 초대해 음식을 공양하는 반승(飯僧) 행사에 나타난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충선왕이 즉위한 원년 9월에 왕이 수녕궁에서 승니(僧尼) 2200여 명에게 반승했고, 같은 해 10월 정해에도 수녕궁에서 승니에게 반승했다. 그리고 공민왕 18년 노국 공주의 기일 날에 연복사(演福寺)에서 불공할 때 참석한 승니 수천 명에게 포목 800필을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왕실의 공식행사인 반승 행사와 불공에 비구니들을 공식적으로 초청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옛 기록에 나타난 고려시대 최초의 비구니는 누구였을까.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부인 신혜 왕후 유씨가 태조가 풍덕군에 주둔할 때 하룻밤 섬긴 후 소식이 끊기자 정절을 지키려 출가했으나, 훗날 태조가 불러 부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사실상 고려 최초의 비구니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태조의 다른 부인들 가운데 자매지간인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과 소서원부인(小西院夫人)이 태조를 하룻밤씩 섬긴 후 모두 비구니가 되었다. 이들은 이후 태조와 만났을 때 절을 지어줄 것을 청했고, 이에 왕건은 서경에 대서원과 소서원의 두 사찰을 지어 이들을 거처하게 했으며 토지와 농민을 예속시켰다. 따라서 이들 대서원부인과 소서원부인 두 사람이 기록에 나타난 고려 최초의 비구니가 되는 셈이다.

이후 비구니들에 대한 기록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으나, 고려 초기 비구니들에 대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이 가운데 활동 내용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인물 중 하나가 김변의 처 허 씨(1255-1324)다. 그녀는 충숙왕 2년(1315) 61세의 나이로 출가해 성효(性曉)라는 법명을 얻었다. 성효는 수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통도사에서 사리를 얻고 계림을 둘러보는 것으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장남의 집 옆인 남산에 초당을 짓고 살다가 입적했다. 10년간 비구니로 살다가 입적하자 나라에서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진혜대사(眞慧大師)라고 추증하기도 했다.

또 『고려사』132권에서는 밀직(密直) 허강(許綱)의 처 김 씨가 남편이 죽고 신돈이 결혼을 요구하자 “우리 주인이 평생 남의 여자를 쳐다보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그를 배반할 수 있겠는가. 나를 욕보이려 한다면 자결하겠다”면서 출가한 기록이 있고, 가세가 빈곤해짐에 따라 생계유지를 위해 출가한 비구니들의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또 「고려묘지명집성(高麗墓誌銘集成)」에는 김구(金坵)의 처 최씨(1227-1309)가 남편이 죽은 후 30여 년을 과부로 살면서 83세(1309)에 노환으로 죽기 하루 전에 출가해 향진(向眞)이라는 법명을 받은 대목이 있고, 또 다른 기록에서는 임종이 임박해지자 묘련사 법주를 청해 계를 받아 출가하고 성공(省空)이라는 법명을 받은 후 합장한 채 오로지 아미타불 염불을 하면서 죽어간 최서(崔瑞)의 처 박씨(1249-1318)와 관련한 내용도 있다.

특히 고려말에는 깨달음을 향한 구도열기도 뜨거웠다. 고려말 지공(指空), 나옹(懶翁), 보우(普愚) 등 당대를 대표했던 선사들의 비문에는 문도의 자격으로 비구와 함께 비구니가 따로 기록돼 있으며 그 수 또한 적지 않아 비구니의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계진각국사어록』과 『한국불교전서』에는 종민(宗敏), 청원(淸遠), 요연(了然), 희원(希遠) 등의 비구니들이 강종 2년(1213)에 수선사 하안거에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당시 하안거를 마친 비구니들이 혜심 선사에게 법어를 청하자 일일이 화두를 제시하면서 참구하기를 권했다는 대목이 보이기도 한다.

고려 묘총은 오도송 남기기도

또한 이색(李穡)이 지은 「엄곡기(嚴谷記)」에 따르면 나옹 화상이 비구니 화엄(華嚴)을 화두 수행에 참여시켰고, 무학이 화엄의 거처를 엄곡(嚴谷)이라 편액해 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색이 지은 ‘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鐘碑)’에서는 나옹의 제자 묘총(妙聰)이 수행 후에 오도송을 남겼다는 기록도 나타난다.

이를 근현대 대강백으로 존경받고 있는 운허 스님은 ‘묘청 비구니의 깨달은 노래’라는 제목을 붙여 이렇게 편역했다. “한 조각 외로운 배 아득한 바다에 떠/ 삿대 춤을 추니 딴 세상 풍류인 듯/ 구름 산 달빛 바다 모두 놓아 버리니/ 이 세상 모든 일이 한바탕 꿈이어라.”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열기가 비구 스님들 못지 않게 뜨거웠고, 그 중 깨달음의 세계에 들은 스님들까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 비구니 스님들의 역량은 적지 않았으며, 고려 후기 비구니 스님들의 이같은 모습은 신라 비구니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나옹 혜근과 태고 보우의 문도로 알려진 고려말 비구니들 중 정업원 주지인 묘봉과 묘장은 개경의 정업원을 주관하는 인물이었고, 공민왕비였다가 왕이 시해된 이후 출가한 혜비 이씨와 진비 염씨도 공식적인 출가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백운경한 스님이 지은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와 『백운화상어록』을 간행할 당시 그 실질적 경비를 시주한 비구니 묘덕(妙德)도 고려시대 빼놓을 수 없는 비구니 중 한 명이다.

반대로 여성들의 출가를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현종 8년(1071) 초 개인 주택을 절로 만들거나 부녀들이 여승이 되는 것을 금지했고, 공민왕 8년(1359)에도 마음대로 승니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어 공민왕 10년(1361) 5월에는 어사대에서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를 들어 여성출가 금지를 주청하자 왕이 받아들였고, 창왕 1년(1388) 12월에도 전법판서 등이 “여승이 된 자는 실행한 것으로 논하고 감히 부인의 머리를 깎는 자는 중한 죄를 가하며 향사와 역사, 공사의 노비는 승니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라고 상소하는 등 고려 비구니 역사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조 이성계의 딸이 처음으로 출가한다.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후 7년째 들어 세자책봉 문제로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이성계의 비 강 씨 소생들이 모두 죽게 되었을 때, 이성계는 강 씨 소생인 경순 공주에게 청룡사로 출가할 것을 권했다.

경순 공주는 청룡사에서 무학대사에게 수계를 받고 출가함으로써 조선 개국 후 기록에 등장하는 첫 번째 비구니가 된다. 한편 당시 청룡사에는 고려 공민왕의 비였던 혜빈 이 씨가 공민왕이 죽은 후 곧바로 출가해 주지로 있었으므로,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왕비와 공주가 나란히 비구니가 되어 함께 살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때의 이 청룡사는 기록에서 정업원(淨業院) 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정업원은 고려 18대 의왕의 기록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으며, 숭유억불로 대변되는 조선시대 비구니의 맥은 이 정업원으로 인해 끊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역할이 컸다.

학자들은 정업원이 몇 차례에 걸쳐 철폐와 복원을 반복했고 중종 때 정업원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성균관 유생들이 살도록 하면서 기록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궐내에는 정업원 외에도 비구니들이 머물던 사찰로 인수원(仁壽院)과 자수원(慈壽院)이 있었으나 이 역시 현종 때 완전히 철폐됨으로써 왕실과 사원을 연결해주는 매개 역할을 해왔던 비구니원이 모두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기존의 왕실 비구니원에 거주하던 비구니들을 중심으로 도성밖에 다시 비구니 사찰이 설립되었고, 이후로도 궐 안 여인네들과의 소통이 끊이지 않음에 따라  이를 포함한 다른 이유까지 붙여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 제도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같은 승려 도성출입금지는 고종 32년 전면 허용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성계 딸 경순공주가 조선 최초

하지만 조선시대 중엽까지 한양 근교에만 모두 26개의 비구니 사원이 있었다. 중앙승가대 김응철 교수는 한국비구니연구소에서 발간한 『비구니와 여성불교』에 실린 「정업원과 사승방의 역사로 본 한국의 비구니 승가」에서 “성종 6년(1475) 유신들의 상소에 따라 22개의 사찰이 폐쇄되고 청룡사, 청량사, 보문사, 미타사 등 4개 사찰만 남게 됐다”고 적고 있다. 이 네 사찰은 이후 사승방이라 불렸고 주로 왕족, 상궁나인, 사대부 부인들 가운데 출가하는 이들이 머물렀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활약상에 힘입어 새로운 전기를 맞은 불교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일반인들의 보시가 늘어나면서 독자적인 불사가 가능해지기도 했다. 또한 이들 사승방은 조선 중기 이후 강원과 선방을 운영하며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과 교학을 지도하기도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로부터 시작된 비구니 승단의 역사는 이같은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오늘날 한국불교의 중요한 한 축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조선 숙종 27년(1701) 제작된 경북상주 남장사 감로탱화(사진 위)와 영조 35년(1759) 제작된 봉서암 감로탱화(사진 아래)에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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