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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만다라]50. 삶의 무게

기자명 법보신문

神 내세운 전쟁이야말로 가증스런 허울

고독의 맛과 마음의 평화를
직접 체험한 사람은
명상의 기쁨을 맛보면서
두려움 없이 악에서 떠난다.
 - 『법구경』

세상이 너무나 배타적이고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성취만을 가치로 여기는 사회가 되면 모두가 상대적 빈곤에 빠져서 너나할 것 없이 아등바등하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나 혼자 마음의 평화를 찾고 고요한 일상을 보내고 싶어도 폭류에 휩싸여 떠내려가듯, 나 홀로 삶의 본연의 자리를 지켜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서 본의 아니게 혼돈의 삶을 살면서 남의 탓만으로 돌리면 나의 삶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설사 떠밀려서 흘러가더라도 자기 자신의 마음의 고요와 절대적인 평정(平正)을 지켜낼 수 있는 것이 곧 수행이고 불교적인 삶이다. 내 인생의 무게는 남이 대신 짊어져 주지 못한다. 아니, 대신 짐져줄 수 없는 나만의 무게라는 데에 참다운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불교는 ‘모든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너라!’가 아니라, 자신의 짐의 무게를 깨닫는 순간 ‘바로 내려놓고 편히 쉴 줄 알라!’를 가르치는 종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의 무게를 두 어깨에 걸머지고 묵묵히 걸어갈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불평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으며 다른 이에게 피해를 적게 끼치는 삶이 되도록 최소한으로 살라고 하신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제 비로소 우리 모두에게 이 부처님의 고요한 말씀이 들려올 때이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 아비규환으로 싸움을 일삼는 세태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여유조차 없었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승리와 패배를 논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의 여유가 있겠는가?

가지 꺾어 쌓인 눈 떨군 소나무

겨울날 깊은 골짜기 산사에 머물고 있으면 소나무 가지가지에 흰 눈이 수북이 쌓인 설경이 장관을 이룬다. 이러한 설경이 며칠 이어지고 나면, 눈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여 자신의 일부를 꺾어 버리는 소나무가지들의 절규가 들려온다. 그리고 밤에는 더욱 이 소리가 산천에 울려 퍼진다. 이산 저산의 소나무들은 내내 버텨오던 겨울의 무게를 마지막 절규로서 털어내고 있다. 그리고 다시 산천에는 정적이 깃들고, 소나무가지는 또 잠시 뒤에 산천을 뒤흔드는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밤을 지새우고 있는 것이다.

이듬해 봄과 여름이 지나고 풍화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이 꺾어진 가지들은 ‘설해목(雪害木)’이라는 이름으로 산사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도하고, 썩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 토양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겨울밤의 한 가운데서 소나무 가지 부러지는 소리에 우리는 천년의 설법을 듣게 된다. 소나무의 절규 뒤에 찾아오는 산 속의 고요는 참으로 적막하다. 소나무는 스스로를 꺾어 버림으로서 삶의 무거운 소유로부터 해탈을 얻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무는 다시 긴 침묵에 들어가서 성자처럼 그 자리에 묵묵히 천년을 서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삶의 구석구석에서 꺾어짐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이 근원에서부터 영원하지 않다는 진리를 너무나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설법을 들으면서 승리와 패배의 대립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다. 이를 절대 평정을 유지하는 마음가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마음가짐인 것이다. 좋은 것을 보면 좋다고 생각하고 흘려보내자. 미운 것을 보면 밉다고 생각하고 흘려보낼 일이다. 마음에 끼워두어서 나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 오직 마음에 끼워둘 것은 모든 것을 진리로 승화시키는 지혜의 힘뿐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 욕망보다 더한 불꽃은 없고 남을 미워하는 증오보다 더한 악행은 없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우리를 얽어 메는 오온의 고통을 벗어나서 해탈을 얻고 그리고 참으로 고요한 마음의 평정, 니르바나 열반을 얻으라고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지구상에는 인간의 입맛에 맞게 종교도 다양하다. 각자 업을 따라서 삶의 길을 선택하고 종교를 선택한다. 한번 선택한 종교의 도그마에 빠져서 다시 업을 짓고 죄악을 짓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벌이고 있는 중동전쟁이 그 한 예이다. 함께 신을 믿고 천당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종교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하다. 2차 대전 이후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펼친 정책의 산물이라고는 하지만 참혹하고 어리석기는 누구를 가릴 것이 없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지구 한편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일을 수수방관하고도 신을 말하고 천당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 가증스러운 일이다.

죽고 죽이며 천당을 구하는가

이제 이쯤해서 승리와 패배의 어두운 그늘로부터 모두 벗어나라고 그들을 타이를 신은 없는 것인가? 이제는 마음의 평화를 찾아서 명상의 기쁨을 맛보라고, 인생이 싸움으로 점철되어서는 안 된다고 깨우쳐줄 성자는 없는 것인가? 그들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없다면 이제 함께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 보자. 3천년을 하루같이 생명을 살상하거나 생명에게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초지일관 가르치신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때이다. 그리고 불자는 더더욱 부처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가야한다. 서로 죽이는 두려움으로부터 악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고 함께 해탈의 평화를 맛보아야할 때이다. 
 
본각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원심회 김장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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