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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 보다]영축총림 극락선원장 고원 명정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일상을 착안하면 푸른 하늘 활보할 것

생활의 발견이 곧 자아의 발견
일상의 원각인데 모르니 ‘중생’

영축총림 통도사 극락선원은 근대 고승인 경봉 스님이 주석하며 선풍을 날린 곳이다. 암자에 도착하자마자 경봉 스님의 옛 선취가 남아 있는 삼소굴(三笑窟)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 1982년 7월 경봉 선사가 남긴 임종게다. 극락암 참배객 중에는 선지식이 남긴 향취나마 느껴보고자 대문 빗장을 직접 만져 보는 이가 적지 않다. 경봉 스님은 왜 대낮도 아닌 한밤중에 가까이 있는 문고리를 놔두고 굳이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 했을까? 이런 사량도 공연한 것이라 여겨져 곧바로 삼소굴 옆 원광재(圓光齋)로 향했다. 경봉 스님의 법호 ‘원광’을 따 지은 명정 스님 거처다.

극락선원장 명정(明正) 스님은 1943년 12월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1959년 해인사에서 출가해 이듬해인 1960년 통도사 극락암을 찾아 경봉 스님의 시자가 됐다. 이후 경봉 스님이 원적에 들 때까지 20여년간 시봉했음은 물론 경봉 스님의 다맥을 이어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경지까지 올랐다고 칭송받고 있다. 또한 경봉 스님이 당대 내로라하는 선사, 거사들과 나눈 편지를 담아 엮은 책 『삼소굴 소식』을 세상에 선보인 인물이기도 하다. 한암, 만해, 탄허 스님들과 주고받은 법거량 선미가 아주 일품인데 어떤 이는 대혜 스님의 『서장』과 비견된다고도 할 정도다. 그 방대한 서한을 보물 간직하듯 챙겨 놓았다가 빛을 보게 하였으니 스승을 향한 명정 스님의 지극정성이 놀랍기만 하다.

명정 스님은 다인답게 능숙한 솜씨로 차를 우려냈다. 사실, 자신의 살림살이를 먼저 내놓은다면 모를까, 명정 스님으로부터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무엇을 물어도 “내 얘기 들어 봐”하고는 효당 최범술과의 일화나 군대 이야기 등으로 말을 돌리는 게 다반사다. 따라서 명정 스님과 법해를 나설 때 ‘노’를 빼앗기면 그걸로 끝이다. 오늘도 그러할 것임은 자명해 차 한 잔 마시자마자 “수행 발심 후에도 일념이 서지 않아 곤혹을 치루는 대중이 많다”며 그에 대한 해결책을 여쭈어 보았다.

‘달’ 이전에 ‘손가락’이라도 만져 볼 요량이었다.
“에베레스트 등정이 하루아침에 되나?”
그리고는 다시 차 한 잔을 건네며 한마디 던진다.
“원래, 몸집이 크면 머리가 나빠!”
명정 스님은 기골이 장대하다. 세인들은 그런 스님을 보고 ‘멧돼지’같다고도 하고 ‘달마’같다고도 한다.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송광사 설법전 불사 할 때 난 장정 몇 사람이 목도로 나른 기둥을 혼자서 짊어지고 옮겼어. 아마 그 때 내 나이가 스물 일곱 살이었을 거야.”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물은 것은 해결됐을 터이니 머리 나쁜(?) 큰 덩치에게 그만 물으라는 뜻이다. 그리고는 역시나 군대 얘기로 노를 저어갔다. 명정 선사는 머리가 나쁜 스님이 결코 아니다. 우직함과 치열함을 갖춘 선사 중의 선사다. 스님이 낸 『다(茶)이야기 선(禪) 이야기』를 보면 잔잔하지만 그 속에 펼쳐진 선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선열에 휩싸이게 하고 만다. 그만큼 자신이 갖고 있는 선기를 막힘없이 쓰는 선지식이다.

군대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떻게 하면 빼앗긴 노를 다시 찾을까 궁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순간 저만치 놓인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기개 넘치는 붓놀림으로 단번에 써 내려간 ‘고원’(古園)이었다. ‘고원’은 스님의 법호다.
“고원은 무슨 뜻입니까?”
“옛 동산이지 뭘…. 서른 살 극락선원 도감일 때 스승 경봉 스님이 내린 거야”

통찰력이 남달랐던 경봉 스님이 굳이 ‘고원’이라고 한 뜻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연유를 물으려는 순간 이미 의중을 간파했는지 책상에 놓인 묵직한 자료 하나를 건넸다. 가편집된 경봉 스님 사진첩이었다. 청년 시절의 경봉부터 원적에 든 경봉까지 펼쳐져 있었다.
“내가 책장사 너무 많이 했지? 또 해. 경봉 스님 사진첩.” 스님은 표주박 하나차고 만행하는 선객처럼 사진첩에 기록된 영상을 따라 시간여행을 떠났다. 성철, 구하 스님은 물론이고 구산, 수월 스님도 보였다.

 
경봉 스님이 주석해 선풍을 일으킨 ‘삼소굴’.

“구산 스님이시네. 언젠가 행선의 즐거움을 말씀 드렸더니 예전에는 수좌가 행각할 때 조실 스님이 얼마를 걸어왔나 물어서 30리 이상을 걸어왔다 하면 밥도 주지 않고 쫓아버렸다 해. 짚신만 닳게 하고 공부는 챙기지 않는 놈이라는 거야. 그래, 그 스님이 수월 스님이셔. 수월 스님 일화도 있지. 스님이 만주 북간도에 계실 때 한 스님이 경상도에서 몇 천리를 걸어 만주까지 찾아 왔어. 짚신만 한 짐이었다고 해. 며칠 머물렀던 그 스님은 공양 중에 돌을 많이 씹었어. 공양주가 쌀 이는 법이 서툴렀거든. 안 되겠다 싶어 하루는 스님이 공양주에게 쌀 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는데 수월 스님이 이를 보고 한 말씀 하셨어. ‘이런, 짚신만 떨구고 다니는 놈이군!’ 그 멀고도 먼 길을 나서 찾아와 선지식한테 가르침 받겠다던 초심의 열정과 긴장감은 어디다 놔두고 공양주하고 밥하는 시비나 하냐는 말씀이지. 법을 얻기 위해 천리길도 마다 않는 스님도 대단하고, 일순간에 벌어진 일을 간과 않는 수월 스님도 대단하지. 인연이 닿으면 생사해탈도 한다고 하니 선지식을 친견한다는 일이 예삿일은 아니야.”

언론계에서 자료로 곧잘 활용되는 경봉 스님 사진에 이르렀다. 한 쪽으로 약간 기댄 모습인데 확철대오한 선사의 기개와 무사(無事)함이 배인 사진이다. 자신도 수 백 번은 더 보았을 사진 한 장에 미소를 지어 보인다. 경봉과 명정의 사제인연도 예삿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열 여섯 살 때 해인사에서 출한 후 이듬해인 1960년 열 일곱 살 때 경봉 스님을 만났다. 그 때 경봉 스님은 “전생에도 여기서 살다가더니 금생에 또 왔구나!”하며 반겼다고 한다. 20여 년을 시봉한 명정 스님이 경봉 선사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어찌 일설로 할까! 하지만 어떤 말씀을 경책으로 삼고 있는지를 물었다.

“삼소굴에 걸린 스님 좌우명은 알고 있지?”
경봉 스님의 좌우명은 이렇다.
5, 6, 4, 3 등의 산만한 숫자가 어찌 1, 2의 실로 다하기 어려움과 같겠는가. 몇 줄기 구름 빛은 산봉우리로 피어오르고 시냇물 소리는 난간에서 들린다. 고운 것은 미워하고 싫은 것은 즐거워하도록 노력하련다. 큰 활용은 미간조차 꿈쩍 않는 것.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볼지어다. (할 말이 있는 이는 10분 이내로 하고 나가도록)

애증, 선악, 미추 양변 극단에서 자유자재 해야 한다는 의미가 배어있는 유명한 좌우명이다. 명정 스님도 ‘중도’를 말하려는 것일까? 아니었다.
“괄호 안에 들어 있는 ‘10분 이내로 하고 나가라’는 말. 시봉할 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마주했는데 그 때마다 해이해지는 마음의 고삐를 다잡게 만들었어. 석두화상도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당부했지. 사람이 시간을 보내지 시간이 사람을 기다려 주나. 구지 스님이 내 보인 손가락 하나도 못 보면서 우리는 현명하다고 생각 해.”

착각하지 말고 지금 수행하라는 얘기다. 스님은 이어서 “돌아 갈 차편은 언제인가?”하고 묻는다. 사족은 그만 달자는 말씀이다. 그러나 다선일여로 불리는 스님에게 차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일어설 수 없었다. 선실에서 평생 차를 즐겼던 경봉 스님은 멋진 다시(茶詩)도 다수 남겼다.

푸른 물 찬 솔 달은 높고 바람은 맑아(碧水寒松 月高風淸) 향기 소리 깊은 곳에 차 한 잔 들게.(香聲深處 相分山茶)
차 마시고 밥 먹는 게(遇茶喫茶 遇飯喫飯)
인생의 일상 삼매소식이라.(人生日常 三昧之消息)
조주 스님의 ‘차나 한 잔 하게’와 경봉 스님의 ‘일상 삼매’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낙처’는 아니더라도 선문답과 다시를 잇는 고리 하나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이 인연을 물었다.

“납자들이 법을 물었을 때 조주는 ‘차 마시게’, 운문은 ‘떡이나 먹게’, 앙산은 ‘밥을 먹게’했지. 어떤 비밀이 있는 것 같은가? 반가운 사람 만나면 점심하고 아이가 다가오면 안아 주고, 주말이면 여행도 가는데 여기에 어떤 비밀이 내재하는가? 경봉 스님은 대변소를 해우소(解憂所)라 하고, 소변소를 휴급소(休急所)라 했는데 어찌 그리 이름 지었을까?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도 진리의 각체(覺體) 가운데 움직이는 거지. 하루 종일이 원각(圓覺)인데 그 원각을 맛보지 못하니 중생이라고 이름 하는 것일 뿐이고.”
그러고 보니 명정 스님의 저서 『다(茶) 이야기 선(禪) 이야기』에서 ‘일상생활을 잘 착안하면 푸른 하늘을 활보하고 완전한 인격을 갖춘다’며 중국의 한 비구니 스님 오도송을 소개한 기억이 났다.

봄을 찾으러 이 산 저 산 헤매어도
허탕치고 집에 돌아와 후원 매화 가지
휘어잡아 향기 맡으니
봄은 벌써 가지마다 무르익었네.

명정 스님은 이 대목에서 “생활의 발견은 곧 자아의 발견”이라며 진리는 먼데 있지 않다고 했다. 스님은 책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모자라는 것이 있다면 그 일상생활 가운데 주체가 되는 자성자리를 모른다. 아니 그 알맹이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어릿광대 같은 삐에로가 되어 그저 한평생 탈춤이나 추며 돌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지 모르겠다.”

 
명정 스님은 경봉 스님을 20여 년간 시봉했다.

경봉 스님도 당시 극락암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하고 물었다. 극락암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대문 밖 나서면 돌도 많고 물도 많으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도 말고 물에 미끄러져 옷도 버리지 말고 잘들 가라”고 하며 껄껄 웃어 보였다.

명정 스님의 ‘노’는 결코 엉뚱한 곳을 향해 저어간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경봉과 구산, 수월, 조주, 앙산을 말했지만 실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명정 스님은 ‘일상원각’ 한마디를 건넨 후 뒷방에서 한 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다완을 꺼내와 맑은 말차를 내어 주었다.

“이 다완에 말차 한 잔 건넸으니 난 그대를 최상으로 대접했어. 차 맛이 어떤가!”
조주, 경봉 청다(淸茶)를 들었지만 ‘명정청다’(明正淸茶) 진면목을 알기엔 아직도 부족해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다짐을 하나 했다.
‘옛 동산에서 마신 차 값은 꼭 치르겠다’고 말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명정 스님은

명정 스님은 1943년 12월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1959년 해인사에서 출가한 후 1961년 경봉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5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20여년 동안 경봉 스님을 시봉한 스님은 현재 영축총림 통도사 극락선원장을 맡고 있다. 편저로는 『삼소굴 소식』, 『경봉한화』, 『경봉일지』, 『경봉대선사 선묵』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선수상집인 『茶이야기 禪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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