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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의 여운깊은 책읽기]눈 오는 아침에 경을 읽다

기자명 법보신문

『입보리행론』샨티데바 지음 / 청전 옮김 / 하얀연꽃

아침에 눈을 뜨니 탐스런 눈송이가 유리창 가득 쏟아집니다. 눈이 오시는 날 아침이면 나는 경을 펼칩니다. 경전을 읽고 글 쓰는 것이 직업이니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새하얀 눈송이가 소복하게 내려 쌓이는 날 아침이면, 경을 펼쳐들고 차분하게 읽어갑니다. 이런 때면 세상을 환히 밝히는 보름달이 떠오른 밤에 부왕을 죽인 죄업을 씻고자 부처님에게 나아간 아자타삿투 왕처럼 내 마음도 무척 간절해집니다.

오늘 아침에는 『입보리행론』을 펼쳤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 년 전 남인도 어느 왕국에 왕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느 날 꿈속에서 ‘왕의 자리는 지옥과 같다’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출가를 꿈꾸다가 마침내 왕위를 계승하기 전날 밤에 남몰래 궁을 빠져 나와 나란다 대학으로 들어갑니다.

왕위를 헌신짝처럼 차버리고 선택한 출가수행자의 길이었건만 정작 대중들은 그에게서 수행자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뒤에서 그를 비웃었습니다.

‘흥, 출가를 했으면 수행자다워야지. 왕궁에서 놀던 습성을 조금도 버리지 못하니…. 저렇게 게으르고 무딘 사람은 정말 처음 보겠어.’
그렇게 나란다 대학에서의 시간은 흘러갔고 그럭저럭 이 스님도 제법 법랍이 쌓여 큰스님 반열에 오르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란다 대학의 전통에 따라서 큰스님들이 경을 외는 법회가 열렸는데 이날의 차례는 왕자 출신의 스님이었습니다. 대중들의 호기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평소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고, 경을 외거나 진지하게 사색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저 게으르기 짝이 없는 이가 과연 대중을 향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이 스님은 그런 대중의 호기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법좌에 오르더니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여태까지 외웠던 것을 그대로 외울까요? 아니면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것을 외워볼까요?”
대중들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경을 외워보라고 요청하였고 게으름뱅이 스님은 천천히 송경(誦經)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간결하면서도 장중했고,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했고, 조리 있으면서도 간절함으로 넘쳤습니다. 넋을 잃고 귀를 기울이는 대중들은 경을 외는 그 음성이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습니다. 송경이 끝나자 정신을 수습한 대중들은 법좌가 텅 빈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대체 스님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대중들은 행여 그 내용을 잊어버릴까 서둘러 기록하였고 이것이 바로 『입보리행론』입니다. 진정으로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다면 형식과 의례에 빠지지 말고 마음으로 보리행을 절실하게 느끼고 행동으로 나서라는 이 경을 외우고 홀연히 하늘로 사라진 샨티데바(寂天) 스님- 하늘에서 내려 쌓이는 흰 눈송이가 샨티데바 스님의 법문 같기만 한 오늘 아침입니다.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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