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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가 강순형의 미륵사탑 사리구 깊이 보기]

기자명 법보신문

외함없이 사리홈에 봉안 … 독특한 백제양식 과제로

 
용화산에서 미륵사 전경-너른 금마들판에 펼처진, 서동과 선화공주의 얘기가 서린.  

연재 순서

1. 늘 다시 써야 하는 백제
2. 어디, 어떻게 차려졌나

3. 언제, 누가, 왜 차렸나
4. 어떤 유물이 나왔나
5. 유물이 말하는 것
6. 서동과 선화공주는 전설?
7. 마무림


1. 늘 다시 써야 하는 백제

새해 들어선 첫 달에 우리 눈과 귀를 놀라게 하였다. 그것도, 너무나 이름난 미륵사탑에서 사리를 모신 차림새가 나와서다. 거기다 500이 넘는다는 수의, 사리를 넣은 금병과 공양·장엄한 갖가지 감材質으로 만든 가지가지種類의 황홀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다들 놀랐고 더구나, 금종이金板에 새겨진 글(월)까지 나와 시대와 관련發願·施主사람까지 알게 해주어 더 놀라고 눈길 사로잡았다. 〈사진1〉

 
사진1. 금사리병과 명문금판이 보이는 심주석 사리장치. 

(무왕)왕비「百濟王后」가 신령한「神通變化」 부처사리를 모셔「1. 29. 奉迎舍利」, 임금「大王陛下」의 장수·선정과 비의 건강과 명덕을 빌은 때가 639(무왕40, 선덕왕8)해라 콱 적혀진 것!
이는 1995해에 나타난, 567(위덕왕14, 진흥왕28)해의 부여 능사陵寺 사리차림(창왕명 돌사리감실, 국보 288)에 이어 2007해에 찾아진, 577(위덕왕24, 진지왕2)의 부여 왕흥사王興寺 사리차림(창왕정유명 놋사리합)으로 쌍복받은 참에 또다시 아예 새해 선물 삼아 따따복을 내리고 안겨준 것이다.

서에서 동으로 돌탑·나무탑·돌탑의 3탑이 금당과 함께 나란히 세우고 미륵3존상을 모신 익산 미륵사는, 서쪽의 돌탑만 부서져 6층탑으로 남아온 우리나라 최고탑으로, 나무탑을 그대로 돌탑으로 바꿔 보인 첫탑이자, 7세기 전반기란 탑으로 이름나고 입에 올랐다. 〈사진2〉

사진2. 3전3탑 가람배치를 보이는 미륵사 평면.

더하여, 삼국유사武王쪽에도 나오듯 서동薯童-맛둥이와 신라 선화善化공주 사랑의 얘기가 서리고 신라 최고 향가 서동요薯童謠의 깊은 인연까지 배인 절이어 더 빛났다.

1915해에, 탑이 더 무너지지 않게 시멘트로 때워 내려오다가 1999해에, 시멘트를 떼내고 올바로 세워보자 하여 2001해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맡아 해오다 바로, 2009. 1. 14.(수). 15:00에 1층의 심주돌心柱石 위를 파 마련한 사리홈에서 나타나 이를 조사하여 1. 19에 모두에게 내보여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2. 어디, 어떻게 차려졌나

차려진 곳奉安場所
9층에서, 6층(높이 14.24m)으로 남은 탑은 다보탑도 그렇듯 1층의 바닥 한가운데에 큼직한 네모난 돌기둥을 솟아 올렸다. 탑 한가운데 있다해 이를 심주석心柱石이라하며 나무탑에서 따온 것.
여기서는 4층까지 이어져 있는데, 모두 가로·세로 1m나 되는 1t이 넘는 16개의 다듬은 화강암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그 끝돌 위를 구멍 파 탑의 상륜부 곧, 찰주刹柱·擦柱인 기둥을 세우게 하였다.

 
사진3. 들어내는 둘째단 심주석 밑으로 드러나는 사리장치. 

이 심주석이 1층에는, 두부모 같이 네모 반듯하게 다듬어내어 틈 하나 없이 6단으로 단단히 짜 맞춰 포개져 있다. 그러나, 그 위로 올라갈수록 둘레의 거죽은 거칠게 다듬어 놓았다.
1층 심주석-돌기둥에 이르는 길을 1층의 4방에 가운데로 내었는데 이도, 나무탑의 안-실내 흔적이다.
1층 바닥에 놓인 첫 심주석(100.5×100.5×75.8㎝) 위에 올려진 1.2t 무게의 2째 심주석(100.4×100.7×54.8㎝)을 들어내니 바로, 첫 심주석 위의 한복판에 파인 네모난 사리홈(24.8×24.8×27㎝)이 나타나고 그 속에 금사리병이 가운데 놓인 사리차림새가 그대로 드러났다. 〈사진3〉

 
사진4. 밑바닦에 놓였던 유리판.

2째 심주는 사리홈舍利孔의 뚜껑 구실을 하여, 회를 발라 첫 심주와 단단히 붙였으며 사리홈 4방에는 중심을 잡으려 튕긴 먹줄이 생생히 남아있어 또한 눈길 끈다.
나무탑을 그대로 따왔고, 심주도 있어 다른 예처럼 사리차림새는 1층 밑 곧, 받침基壇 속의 심초석心礎石에 마련되어 있을 것으로 모두들 여겼으나 이처럼, 1층의 심주-첫 단에 모셨음이 밝혀져 새 자료를 던져주는 첫 예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작, 받침 속에는 어떠할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기도 하다.

 
사진5. 유리판 위에 놓인 여섯개의 원합.

사리차림새舍利裝置·舍利藏置
깊이 27㎝로 네모나게 판 사리홈(24.8×24.8㎝)의 맨바닥에 그냥 바로 유리판을 놓았다. 유리판은 사리홈에 딱 맞다시피 맞춰 만든 23×23㎝ 크기의 정네모로 된 1.0㎝ 두께의 큼직한 유물이 이어서 놀랍다. 〈사진4〉
다음, 유리판 위의 4모서리에다 원합圓盒을 1점씩 두었으며, 서쪽 벽면의 가운데쪽도 1점을 놓았다.
그리고, 북서쪽의 모서리는 위에 1점이 더 포개져있어 원합은 모두 6점이 된다. 은합 5점, 놋합 1점. 〈사진5〉

 
사진6. 구슬 등의 공양 상태.

이렇게 둔 원합들 사이사이 모두에, 구멍을 뚫은 크고 작은 희며, 푸르고, 파랗고, 붉고, 노란 유리·옥·진주·호박이나 마노같은 구슬들 460점을 쏟아 채워넣어 깔았다. 〈사진6〉
이 속에 잘 익은 대추빛의 대추꼴 구슬도 2점이 함께 한다.
구슬을 깐 한가운데에다 뚜껑이 덥힌 금사리병을 놓았다. 높이 13어깨너비× 7.7㎝의 큼직한 살찐 호형壺形. 온몸에 가득 당초와 연꽃잎과 바탕 메꿈으로 무수한 동그라미魚子文가 새겨져陰刻 황홀-아찔하다. 〈사진7〉

 
사진7. 화려한 무늬의 금사리병.

금사리병의 남쪽에는, 글자마다 붉은 칠朱漆을 넣은 글월銘文이 가득 새겨진 빛나는 금종이(金板, 15.5×10.5×0.1㎝)가 안을 보고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다. 그러나, 뒷면의 글씨에는 칠을 넣지 않아서 눈을 끈다.
깔끔端正·端整한 해서체로 필력과 서각書刻 솜씨가 돋보이고, 639. 1. 29(무왕40)이란 때가 새겨진 것! 〈사진8〉
금종이를 들면, 은판을 오려만든 꽃무늬가지 졸대관銀冠飾 2점 밑으로, 좁고 길며 얇게 편 금조각(金片, 8×1.5㎝)들이 18점이나 어지러이 포개지고 흩어져 있다.
여기엔 동참한 시주자들의 사는 곳과 벼슬·이름들까지 또한 새겨져 있어 눈길 잡는다. 〈사진9〉

글 적힌 금종이가 있는 남쪽을 뺀, 동·북·서의 3쪽에는 벽쪽으로 돌아가며-원합 위쪽이 된다-겹비단으로 감아싼 칼집 속의 손칼刀子들 뭉치를 돌려놓았다.
싼 비단 위로는 천끈을 촘촘 감았고 더우기, 4점을 감싼 북쪽 유물은 금실金絲로 감았다.
이 북쪽 뭉치 위에는 또, 벽쪽으로 금쪽집게 1점이 놓였다. 등에 붙은 고리에는, 금실을 총총 감아 돌린 천끈을 꿰어 길게 고리(40㎝)를 만든 것이 눈에 띈다.
이밖에도, 금귀걸이 1점과 작게 뭉쳐진 금덩이 4점, 은허리띠 치레 2점, 놋고리靑銅環 1점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

사진8. 백제왕후가 사리를 모셨다는 639(무왕 40). 1. 29의 시대가 새겨진 명문금판 앞면.

위와 같이 살펴본, 사리를 모신 곳 및 차린 유물의 뛰어난 내용과 솜씨는 매우 눈길 끌어 백제의 역사와 문화-미술을 더 밝히고 빛내는데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갖춤새는 뜻밖에 아주 단출해 놀랍다 곧, 미륵사탑의 사리차림새는 유물들을 바깥함外函을 마련해 넣거나 하다 못해, 보자기같은 걸로 싸지도 않고 그냥 바로 사리홈에 넣어두고 있어 일반 차림과는 달라 궁금증 불러일으킨다.
사리차림새는, 금사리병 속에 다시 (금속?)사리병이 들어있음이 밝혀져, 유리판→ 공양품과 명문판→ 금사리병外壺·外甁→사리병의 4겹차림으로 볼 수 있으며, 드러나 있는 금사리병은 이제 사리외병이 되는 것.

 
사진9. 시주자의 벼슬. 이름들이 새겨진 금판과 은관식 및 금쪽집게 등.

바닥에 유리판을 놓고 차린 것과 맨 위쪽에 칼들을 놓아 돌린 차림새가 처음으로 나타나 끄는 눈길도, 뭐가 있는 건지 풀어야할 거리다.
금사리외병의 뚜껑을 열고 들어다보면 뼈가루 같기도 한 회분灰粉이 단단하게 많이 차 있으며, 그 위로 구멍 뚫린 작은 구슬들도 제법 보이고 속에 든 사리병과의 사이에도 구슬들이 X-ray에서 잡히고 있다.

앞으로 곧, 왕후가 모셨다는 그 사리가 속의 사리병에 있는지, 몇 알-얼마나 있는지 밝혀져 다시 또 우리를 놀라게 하겠다.

강순형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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