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학당 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의 길]⑥ 서쪽을 한번 흘낏 보고

기자명 법보신문

동서화해와 창조적 융합의 해법은 ‘화엄’

 
김지하 시인은 서구유럽이 자신들의 사상을 그 밑뿌리부터 완전 허무화 시키기 시작한 불교와 명상열에 짙은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유럽과 아메리카의 심장 안에는 불교 일반과 참선의 강렬한 매혹이 그 정신계 일반을 휩쓸고 있다고 강조한다.

나의 최종학력은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미학과 졸업이다.
당시 정부가 ‘직업적 학생운동가를 자임하는 고의적 장기 학적 보유자’라는 중상을 서슴치 않을 만큼 대학을 오래 다니면서도, 사실은 ‘꾼’보다는 ‘벌레’로서 서양과 동양을 넘나드는 많은 공부를 하였다.
졸업할 무렵에 한 결론을 얻었으니 이것이다. ‘서양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또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를 포함한 현재와 미래의 세계를 결정적으로 구원할 수는 없다. 결정적인 것은 역시 동양으로부터다.’
그런데 지금 어떤가?
생명위기, 기후변화 등과 함께 근대 인류문명사 전체의 그늘진 근원적 대혼돈의 진원지인 서양에서 최근 금융위기라는 대지진과 함께 사상계 또한 극도로 히스테리칼한 요란법석이 일어나고 있다.

이미 송장상태에 들어간 이 백년 전의 망상적 관념론인 헤겔·칸트 복권 열풍과 함께 폭발하고 있는 챨스·다아윈 귀신 부활의 광란이 그것이다.
그나마 희미한 하나의 가능성 근처를 배회하던 포스트모더니슴과 자유의 진화론, 페미니슴과 혼돈학, 생태학 등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최근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자비한 폭격으로 수백 명의 어린이를 한꺼번에 떼죽음시킨 이스라엘의 저 구제불능의 마구니 짓과 참으로 무관한가? 말로야 어저꾸 저저꾸 찬양이니 박해니 해도 역시 엄정한 문명사적 차원에서는 수천 년을 내리 갈데 없는 유럽 자신의 정신적 성배(聖杯) 노릇을 해온 것이 곧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다.
그 이스라엘이 유엔을 비롯한 전 인류의 일치된 지탄을 받고 있는 지금의 세계정신사적 대전환과 유럽사상계의 지금의 풍경은 참으로 무관한 것인가? 제한된 이성중심의 가부장적 전체주의 철학인 헤겔·칸트의 객관적 관념론의 재집권 바람은 뉴튼의 균형적 기계론의 대안으로 다아윈의 그 난폭하기 짝이 없는 생물학적 역동주의를 마치 새삼스런 세계구원의 유일 진리인양 호들갑을 떠는 찬양일색의 광란과 함께 일대 유행을 이루고 있다. 바티칸과 영국 성공회마저 난리다.

사회일반 및 시장운영에 관련한 뉴튼의 기계적 균형론과 그것의 대안으로 내세워지고 있는 다아윈의 생물학적 역동성 사이의 문제는 오래 전 르위스·멈포드의 음양태극론 해석에 입각한 ‘역동적 균형(dynamic equilibrium)’의 명제로서 그 극복방향이 이미 제시된 적이 있고, 다아윈의 이른바 도태니 약육강식이니 하는 자연선택론의 진화유치증은 에리히·얀치 이후의 자유와 자기선택과 개체·융합 및 내부공생(endosymbiosis)을 중심으로 한 자기조직화(seiforganization)의 진화론에 의해 여지없이 격파된지 오래다.

헤겔·칸트류의 가부장적 이성지배와 관념적 전체주의 역시 유물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멀리는 실존주의나 현상학, 그리고 헬렌·피셔, 크리스테바, 이리가라이 등의 페미니슴과 포스트모더니슴, 그리고 혼돈학 등에 의해 싸그리 그 자취를 감춘바 있다.
그런데 이것이 왠 일인가?
물론 바티칸과 영국 성공회의 다아윈 평가는 도리어 때늦은 느낌마저 있다. 왜냐하면 나의 희망사항일 뿐일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고집스런 창조론 일변도의 신학체계 안에 과학적 진화론을, 비록 때늦긴 했으나 불가피하게 받아드리겠다는 의도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닌가?

아무리나 그들같이 철저한 영성적 예수숭배집단이 이미 나치스 용납사건의 스캔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다아윈류의 사회생물학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유전자 결정론 따위의 에코·파씨슴을 그리 쉽게 용납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아닌가?

‘화엄개벽 운동’의 안에는
화엄경은 물론이고 역학과
기독교·서양과학까지 융합

정말 아닌가?
그런데도 사태는 왜 이 모양인가?
신문보도에 의하면 최근 유럽의 한복판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나치스의 테러리슴이 다시 그 악마의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섬하다.
헤겔이든 칸트든 제일 먼저 앞세우는 것이 바로 이성(理性)이다. 이성의 반대가 바로 자의(恣意)다.

그런데 토인비든 슈펭글러든 크리스토퍼·도우슨이든 그 어떤 문명사가의 견해에서도 문명사의 대변동은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자의(恣意)에 의해 좌우되지는 않는 법이다.
명백한 것은 최근 금융위기에서 유로화의 새로운 세계기축통화로서의 패권 가능성이 전무(全無)하다는 사실이다.
돈 가는 데에 마음간다. 그 역(逆)도 또한 진리다. 그 때문인가?
혼돈과 해체에 대한 두려움, 불가해한 생명위기에 대한 좌절감, 여성성의 대공세에 부딛친 남성가부장문화의 열패감, 디지털 네트워킹의 압도에 불안해진 낡아빠진 아날로그 유일 문명의 영원성에의 망상, 그리고 그 밑뿌리부터 완전 허무화시키기 시작한 불교와 명상열에의 짙은 컴플렉스.
그러나 역시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불가항력적, 운명적 성배인 이스라엘의 참혹한 대 몰락이다.
서양에는 더 이상의 참된 출구(出口)가 없는 것인가?
있다.

예수, 질·들뢰즈, 자유의 진화론, 그리고 루돌프·슈타이너와 이리가라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같은, 이른바 문명사 역행(逆行)의 일대 반동이 노골화하는 것인가?
유물론, 변증법,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세계혁명 주체로서의 항구성의 신화, 반(反) 생명적 공업노동관 중독, 망상적 진보주의 역사관 등으로 구성된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크로노스적 시간관의 근본오류를 죽어도 청산 못하는 점, 푸코, 데리다, 보드리야르 등 포스트모더니슴 노력이 만연한 카지노 자본주의, 천민적 이기주의, 보편화한 신자유주의 시장과 같은 지리멸렬하고 난잡한 잡귀(雜鬼) 수준의 경제 불철저성의 대안창조에 완전 실패한 점.

또 있다.
가부장제에 대한, 그리고 남성적 폭력지배에 대한 철저한 비판은 물론 당연히 요청적 이지만, 남성의 자발적 협조에 의한 ‘자애로운 어머니’ 중심의 평화적 문명사 전환의 비전을 전혀 준비하지 못한 채 남성을 철천지 원수로만 몰아 부치는 거칠고 서투른 변증론 차원의 젠타투쟁 일변도의 운동 과정에서 도리어 남성전유의 저질적인 문화투쟁 병법(兵法)의 짝퉁으로 일관한 페미니슴 일반의 치명적인 패배와 재기불능의 오류.
또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이후 시민민주주의의 사회적 공공성과 녹생당 이후 생태학의 우주적 공공성이 현대문명의 최대 최고 갈증차원인 ‘우주사회적 공공성(宇宙社會的 公共性)’즉 동아시아적 개념으로는 천하공심(天下公心)을 이미 제 안에 내포한 ‘천지공심(天地公心)’을 그 창조적 융합과정을 통해 빛나게 획득하므로서 생명위기와 기후혼돈을 근원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전세계 문화대혁명을 촉발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단 한 발자욱도 접근하지 못한 채 환경(環境, umwelt, environment)이니, 한술 더 떠 친환경(親環境, environment friendly)이니 하는 ‘거짓 클리쉐’나 난발하고 자빠진 애들 장난차원.
절망인가?
동서화해와 그 창조적 융합은 과연 무망(無望)인가?
보라!
왜 그 길이 없겠는가?
있다.

그 길은 오래 전부터 이미 청청하게 열려 있었다. 크리스토퍼·도우슨이 열정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16세기 마테오리치의 북경상륙’ 사건이 함축하고 있던 동서융합에 의한 새 문명사 창조의 잠재적·지속적 가능성,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생명사상사 안에 이미 여기저기서 드러난 차원과 숨은 차원 사이의 교차생성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 화엄선(華嚴禪) 적인 선도수련의 줄기찬 흐름, 그리고 생명계 내부의 일대 변동, 거기에 대한 처방으로서의 한반도 토착의 침, 뜸, 부항과 황제내경(黃帝內徑) 한국파의 다양한 치유법의 등장, 한국토박이 선도(仙道) 의학의 비약, 사상의학(四象醫學)과 한국 경락학(經絡學), 기혈학(氣穴學), 단전학(丹田學)의 놀라운 발전, 그리고 인체(人體)안에서의 30여종의 정체불명의 혼돈혈(混沌穴) 등장의 괴변(怪變)과 원시 모권제(母權制) 시대 종말 이후 쇠락했다는 회음(會陰)의 불가사의한 압도적 기능 강화와 같은 파천황의 생명사태에 대한 동의학(東醫學)의 독특한 생명학적 직관들의 대범람 및 그 토착적 치유유행의 대기적들.

서구는 왜 현실 보지 않고
자멸적인 역(逆) 문명사적
반동의 길을 가려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회의적인 분들이 많다. 그러나 지금의 고식적인 의료인증제도에 의해 불법화의 모욕을 겪고 있는 신의(神醫) 장병두(張炳斗) 옹이나 구당(灸堂) 김남수(金南洙) 옹을 그 나름으로 합법화하고 그분들께 겸손되이 생명학 공부를 자청하는 다소곳한 예절만 갖춘다면 금방 해결될 문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19세기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대응한 한반도의 창조적 남조선사상사 안에서 여러 형태로, 갖가지 방식으로 거듭거듭 시도된 ‘화엄개벽’운동은 그 안에 이미 『화엄경』은 물론 역학(易學) 및 선도(仙道) 생명학과 함께 기독교와 서양과학을 그 나름으로 모두 다 융합하고 있었다. 동학, 남학, 정역, 증산, 소태산과 이제마(李濟馬), 최한기(崔漢綺), 한동석(韓東錫), 이정호(李正浩) 등등의 연이은 출현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서양문화·문명과 예수복음의 충격을 흡수하여 동아시아전래의 유·불·선 대융합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사상체계들이다.

한반도 이외에도 19세기 중국의 태평천국(太平天國)운동과 담사동(譚嗣同)의 인학(仁學), 일본의 ‘에자나이까(아무렴어때)’운동 및 대본교(大本敎)의 새로운 영적생명사상운동이 중국의 실학적 권력중심의 변법(變法),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 한국의 개화(開化) 및 근대화운동이나 유교 지식인 출신들의 동도서기(東道西器) 또는 중체서용(中體西用)과는 또다른 민중주체의 생동적인 동서문명융합 사상사의 다양한 흐름들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럽과 아메리카의 심장 안에는 불교일반과 참선의 강열한 매혹이, 동아시아 여신(女神) 신앙과 모권제(母權制) 샤마니슴에의 열광이, 그리고 동학이나 정역 등 후천개벽 사상의 첫 씨앗을 내포한 주역(周易) 열풍이, 여성중심의 혼돈적 세계관인 노장(老莊) 사상의 막을 수 없는 대유행이 그 정신계 일반을 휩쓸고 있다.
이것은 이미 누구나 일고 있는 명백한 현실이다.
왜 현실을 정면으로 보지 않는가?
왜 길이 없다고 절망하는가?

어째서 자멸적인 역(逆)문명사적 반동의 길을 스스로 가려 하는가?
그 원인은 아주 간단하고 명백한 것 같다. 서양제일주의라는 이름의,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고치기조차 힘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비겁한 저질의 오만한 자기숭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반론(反論)할 자신이 있는가?
자신 있으면 해보라! 〈계속〉

김지하 시인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