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묵 스님의 풍경 소리]해제는 꽉 짜인 일상서 잠시 벗어나는 시간

기자명 법보신문

책임-소통 모르는 이들에게서 벗어남 바래

통도사 영각 앞에는 오래된 매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고목이지만 다른 나무보다도 일찍 꽃을 피워 하동에서 매화 소식이 들려오기 2, 3주 전에 벌써 꽃을 피운다. 작년 3월 초에 이곳에서는 한겨울에도 구경하기 힘든 눈이 내려 설중매를 볼 수 있기도 하였다. 오늘 낮에는 앞을 지나가다 가지가 볼긋해 살펴보니 꽃눈이 금시 비집고 나올 듯 해 입춘임을 실감케 해 주었고 해제가 다 되어 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나무에 꽃눈이 봉오리지면 강원이나 선원은 동안거 해제를 맞게 되고 각기 한 겨울 동안 해 온 공부를 점검 받거나 또 다른 공부처를 찾아 걸망을 매게 된다.

사중 소임을 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굳이 해제가 없다는 것이다. 살러 오신 스님들이 걸망을 둘러매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처럼 산문을 나서는 것을 쳐다보며 한철 무탈하게 보내고 다시 길 나섬을 보는 것으로 안위를 삼을 뿐이다. 그렇게 해제일이 나 자신과는 별상관이 없는 탓인지 무덤덤하게 그저 오늘이 해제일이구나 할 뿐이다. 그러나 강원에 풋풋한 학인으로 살적에는 해제일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모른다. 해제 보름 전쯤부터 가슴이 설렌 것이 군대 적 첫 휴가를 앞 둔 일병 기분 못지 않았다.

군대에서 군화를 닦고 군복을 다리며 부푼 맘으로 휴가를 준비하듯 우리도 걸망을 손질하고 무명옷에 풀을 먹여 재워두고 손을 꼽곤 했었다. 비록 군대 시절처럼 기다려 줄 그리운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찾아갈 그리운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보름이라는 짧은 시간이나마 잠시라도 맘에 맞는 도반과 어울려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운수행각을 흉내 내며 출가자의 멋을 한껏 부려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꽉 짜인 대중 생활에서 놓여나 가보고 싶던 곳이나 공부의 의문을 해결해줄 스승을 찾아 나설 수 있으니 당연히 설렘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은사 스님을 찾아뵙고 소임과 기도 때문에 문 밖 출입이 힘든 사형 스님에게 며칠 시간을 내어 드리고는 은사 스님의 권유로 좋은 기도처를 찾아 며칠 기도를 하고는 섬을 찾아 나서곤 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산골에서만 생활한 탓인지 막연한 그리움과 떠나버림을 동시에 품고 배에 올랐었다. 그 섬에 굳이 볼 일을 보거나 구경거리를 찾아서라기보다는 배에 올라 저 멀리 사라져가는 육지를 바라보는 맛에 취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강원 시절의 해제는 설렘 속에 있었는데 살아갈수록 설렘은 줄어들어 이제는 굳이 산문을 나서고 싶은 마음도 없어지고 있어 많이 아쉽고 다시 그 때처럼 설렘 속에 해제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싶다.

그런데 요즘 들어 손꼽아 아주 절실히 기다리는 해제날이 생겼다. 역사의 시계 바늘을 거슬려 돌려놓고자 하는 이들, 자신들의 허물은 문제 삼지 않고 남의 작은 허물을 적시하며 입으로만 정의를 내세우는 이들, 큰 것만 내세우며 자기의 작은 아픔은 큰 것처럼 포장하고 작은 이들의 더 큰 아픔은 도외시하는 이들, 자신이 해 놓고도 책임질 줄 모른 이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는 이들, 말만 풍요할 뿐 실제는 채우지 못하는 이들로 꽉 짜인 틀에서 어서 벗어나 섬을 찾아 나서고 싶다.

제방에서도 더러 소임자가 잘못 들어서 대중을 도외시하고 독선적이거나 대중살림을 살필 줄 모르는 철에는 대중들이 얼마나 힘이든지 모른다. 그런 철에 대중이 대체로 순하면 한철을 인욕보살로 버티며 지내지만, 대중 가운데 나름대로 정의감에 불타는 성격 강한 사람이 한 둘라도 있게 되면, 큰 불난이 이어지고 결국은 그 소임자가 걸망을 매게 되거나 아님 대중이 걸망을 매기도 하고 때론 그 철 공부가 무산되기도 한다.

올해는 소의 해이다. 그래서 소처럼 우직하게 그저 묵묵히 인욕하며 따르다보면 해제날이 될 것이란 덕담을 하기엔 참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어서 해제가 되었으면 싶다. 

정묵 스님 통도사 포교국장 manibo@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