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느 일간지 문화부 기자가 문득 내게 요즘 불교계에는 어떤 책이 화제인가를 물었습니다. 기자들은 사석에서도 취재하듯 말을 던지는 경우가 많아 언제나 긴장을 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불서 두어 권이 떠올라서 대답을 했지만 좀 당황했습니다. 책과 관련한 활동을 하다 보니 종종 지금까지 몇 권 읽었는가, 집에 책이 몇 권 있는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책과 관련한 가장 멋진 질문은 “지금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가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묻는 사람은 정말 상대방의 삶이 궁금한 사람이고, 이런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할 수 있다면 그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기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책이란 녀석은 수량으로 계산될 수가 없습니다. 이따금 한 달 혹은 한 해에 수십 수백 권을 읽은 책벌레 아무개를 소개하는 기사를 만나면 그 엄청난 식탐(!)에 기가 질립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음식을 먹어치우는지를 자랑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대식가라 할지라도 사람이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양은 빤하기 때문에 아귀처럼 먹어치운 음식들은 대부분 그 사람의 신체에서 노폐물로만 쌓이거나 화장실에서 쓸데없이 배설될 뿐입니다.
‘얼마나 읽었느냐’보다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 『천천히 읽기를 권함』을 읽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의 내용과 저자와 함께 내 인생의 몇 날 며칠을 소요하는,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앙드레 지드도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읽는다. 다시 말해 굉장히 천천히 읽는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저자와 함께 15일 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66쪽).
우리는 유독 ‘책’을 ‘공부’와 ‘출세’하고 연관 짓습니다. 그러니 책이란 그저 공부에 도움이 되고 출세에 도움이 되고 남에게 보여주기에 적당한 정도의 수단일 뿐이요, 따라서 공부에 취미 없고 출세를 꿈꾸기에 너무 버거운 사람에게는 책이란 영원히 그림의 떡일 뿐인 것이지요.
지금이라도 책과 친해지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책의 첫 페이지 첫 줄부터 천천히 읽어 가시기 바랍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천천히 읽어 가시고, 그 속도를 마지막 줄 마지막 문장까지 유지하십시오. 그리하여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눈으로 꼭 찍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책을 덮으십시오. 이렇게 천천히 책을 읽어 가다보면 당신은 저자에게서 뭔가를 배우는 철부지 학생이 아니라 저자와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가장 멋진 친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