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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명강의]다시 듣는 원담 대종사의 話頭 法問

기자명 법보신문

좋은 일 와도 좋다 말고 나쁜 일 와도 슬퍼 마라

닦을 것 없는 당처 맞아야 눈 푸른 덕숭산 대중이라

태산같은 발심 대해같은 마음 그 속에 척하니 한 소식 있을 것

(법좌(法座)에 올라 양구(良久)한 후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올려 법상(法床)을 세 번 내리치고 이르시길)

임술년이 가고 새 봄이 오는데, 해가 가고 해가 오는 이순간이 무슨 순간이냐? 이것을 도인(道人)이 말하기를 납월 삼십일(臘月 三十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년 열두 달이 다 지나서 마지막인 그 순간을 납월 삼십일이라고 하는데, 또 다른 납월 삼십일이 더 있어. 그것은 어떤 납월 삼십일이냐 하면, 내가 부모한테 이 몸을 받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러 가지 일을 당하다가 마침내 이 육신의 인연이 다해서 목숨을 마치는 그 순간이 또한 납월 삼십일이라고 표현을 했어.

또 납월 삼십일이 하나 더 있어. 그것은 우리 공부하는 수선자(修禪者)가 모든 의심을 타파해서 다시 더 닦을 것이 없는 절정에 다다라서 참학사필(參學事畢)하는 그 순간을 납월 삼십일이라 한다 이 말이야. 그런데 시간적으로 1년 열두 달이 다 지나가도 그 당년의 납월 삼십일이 지나가지만, 이 목숨을 마치는 납월 삼십일은 안 마칠 수도 있어.
일대사(一大事) 즉 생사영단(生死永斷)하는 참학사필은 일 년이 다 가지 아니해도 맞이할 수 있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육신의 납월 삼십일이 지나서 육신이 벗겨지고 또 벗겨지고, 수백 번, 천 번, 만 번, 억만 번을 벗긴다고 해도, 일대사 인연(一大事 因緣)을 마치지 못하고 깜깜한 생사윤회(生死輪廻) 구렁에서 계속 헤매는 수가 있어.

그러면 덕숭산 금일 대중은 오늘 납월 삼십일을 맞이해서 어떤 납월 삼십일을 맞이할 것인가? 임술년의 납월 삼십일을 맞이할 것인가? 이 육신의 납월 삼십일을 맞이할 것인가? 내 마음의 일대사 인연을 마치는 납월 삼십일을 맞이할 것인가?
덕숭산 대중에겐 임술년의 납월 삼십일도 보람이 없는 납월 삼십일이고, 육신을 마치는 것도 의미 없는 납월 삼십일이고, 오직 덕숭산 대중의 납월 삼십일은 내가 나를 찾아서 다시 더 할 일이 없는, 그러한 당처(當處)를 맞아서 납월 삼십일을 부끄러움 없이 맞이하여야 비로소 덕숭산 대중이 눈 푸른 대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 그러면 어떻게 해야 눈 푸른 납월 삼십일을 맞이할 것이냐?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 번 내리치신 후)
이 주장자가 공연히 망령되이 움직여 가지고 위로 아비천(阿鼻天)을 부수고 밑으로 아비 지옥을 부쉈는데 어째서 부끄러운 죄를 벗지 못하는고!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 번 내리치신 후)
擊破虛空骨 허공의 뼈다귀를 격파했는데
何有無一物 어찌 한 물건인들 남아있다 하겠는가?
從此子及孫 이를 아들이 손자에게 전하니
受容長久足 쓰고 또 써도 모자라지 않더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옛과 지금, 시방 세계의 가없는 공간이 오직 한 생각뿐이야.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본래 이것이 참된 광명이더라 이 말이야.
이것이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야.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도 아니고, 미륵불의 일도 아니고, 관세음보살의 일도 아니고, 어느 신(神)의 일도 아니고,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일이야. 다름 사람의 일이 아니야.
똥은 건드릴수록 악취가 나듯이, 법도 건드릴수록 그르쳐요.
진실로 우리 선객(禪客)들이 참선(參禪)하는 일을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고, 그렇게 수월하게 생각해서도 안 돼.

자못 일념으로 화두(話頭)를 들어야지. 처음에는 물론 안 되기 때문에, 이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서 소리를 내서 외어도 좋아. 그러다보면 속으로, 소리를 안 내도 외어져. 입으로 외다보면 입으로 외지 아니해도 생각으로 저절로 들어져. 저절로 들어지게 될 것 같으면 그 화두의 근원으로 들어가게 돼. 화두의 근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중에는 화두마저 없어져.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들고 있으되 없어야 돼. 그런다고 화두를 들지 않는 것은 아니야. 화두라고 하는 것은 망상을 통일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야. 화두를 들다 보면 바로 망상이 없어져.
화두도 망상은 망상이야. ‘이 뭣고’하는 것이 망상이지, 망상이 아닌 것은 아니야. 땅으로 인하여 엎어진 자는 도로 땅을 짚어야만 일어나게 돼. 내가 망상에 집착해 가지고 망상에 거꾸러졌기 때문에, 역시 화두라는 망상을 짓고 내가 망상을 전도(顚倒)해서 일어나게 되는 하나의 방편이야.

화두를 잡으면 처음에는 망상하고 싸움하고, 졸음하고 싸움하고, 그저 아픈 것하고 싸움하고, 그저 밉고 예쁘고 좋고 그르고 그저 이러한 것들, 분별 망상들과 싸움을 하다가 나중에 척하니 저절로 화두가 들릴 것 같으면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화두하나 뿐이야. 단 내가 의심하는 의심 덩어리. 이것 하나로 살아야 돼.
가나 오나, 잠을 자나 밥을 먹으나, 똥을 눌 때나 오줌을 눌 때나, 누구하고 얘기를 하거나, 하여간 울력을 해서 마당을 쓸든지, 나물을 다듬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오직 화두 일념이라.

그렇게 되는 일이 대번에 되는 것은 아니야. ‘어떤 사람은 잘 되는데 나는 망상만 나고, 이거 나는 공부 못할 사람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祖師)들이 다 그와 같이 안 되는 공부를 억지로 익혀왔어.
그러니까 안 된다고 공연스레 자포자기(自暴自棄)하지 말아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돼 가는 계단(階段)이야. 그러니까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억지로라도 자꾸 그렇게 해서 분발심(奮發心)을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내 가지고 들어가. 그러다가 내 마음 가운데에서 외롭고 고요한 밝은 광명이 한번 비치게 될 것 같으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순식간에 비추는 수가 있어. 마치 만리청천(萬里靑天)에 춘추명월(春秋明月)처럼, 맑디맑은 하늘에 가을달이 허공을 삼켜 비추는 것처럼 그렇게 돼.

그와 같이 될 것 같으면 어떠한 도리(道理)가 있느냐 하면, 저 허공 가운데 불꽃이 일어나고 바다 밑에 연기가 나는 도리가 있더라 이 말이야. 이러한 때를 당해서 진공묘유(眞空妙有)와 합착(合着)하고 제불묘리(諸佛妙理)를 두루 다 통해 버리고, 조사 공안(祖師空案)을 한 뼘에 쫘악 꿰어버려. 뭐, 하나 알고 둘 알고 하는 이런 짓 아니하고, 한 뼘에 쫘악 꿰어버려.
천칠백 공안이고 억만칠천 공안이고 할 것 없이, 그냥 착 꿰어서 일체의 맺힘도 걸림도 없게 되면 반드시 명안 종사를 찾아야 돼. 명안 종사를 찾아서 자기의 안목과 기틀을 기탄없이 탁마(琢磨)해 가지고서 환하게 밝아졌을 적에 종사가 허락해. ‘그렇다, 그런 것이다.’하고서 허락을 해.

종사가 허락을 했다고 해서 만족한 생각을 가졌다고 하면 지옥에 들어가기를 화살같이 해. 종사가 됐다고 승낙할 적에 비로소 참 발심을 하게 되는 거야. 그제야 진짜 발심을 해 가지고서 다시 입산을 해야 돼. 다시 입산을 해 가지고서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모한포동(冒寒抱凍)의 행으로 닦고 닦아서 다시 더 할 수 없는 그러한 자리에 가면 연꽃과 같이 돼. 그러면 산에서 내려와도 되는 거지.
수연방가(隨緣放假)라. 인연을 따라서 방편으로 중생을 널리 제도하게 된다 이 말이야. 그렇게 해서 너와 내가 다 같이 피안에 다다를 수 있어야 되고, 너와 내가 다 같이 불도를 이뤄야 된다 이 말이야.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입니다만 내가 이 방에서 일 년 내내 죽도록 대참(大懺)을 외웠습니다. 그러고서 노스님이 “예참해라”하면 예참을 합니다. 일 년이 넘도록 예참을 했어요. 내가 만공 노스님을 칠 년 동안 시봉을 했고 그 후로도 거의 45년 동안을 배워 가지고 지금까지 중노릇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면 만공 노스님한테 40년이 넘도록 배웠다고 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내가 오늘 40년이 넘도록 만공 노사에게 배운 그 비밀을 대중에게 공개할 테니 잘 보시오.

(법좌에서 주장자를 들어 세워 대중에게 보이시고)
오직 40년 동안 내가 만공 노사에게 배운 것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간단합니다.

옛날에 석상 스님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이 스님이 대중을 위해서 법문을 하실 적에 어떠한 법문을 하셨는고 하니, 공부하라는 법문이야. 공부를 어떻게 지어가라고 하는 그 스님의 법문이 ‘휴거게거(休去憩去)’야. 쉬어 가고 쉬어 가라는 거지. 그 공부라는 게 쉬는 공부야. 다 망상을 쉬는 공부야.

道休去歇去
寒灰枯木去
冷湫秋月去
古廟香爐去
一念萬年去
一條白練去 
亦如流川去

몸을 쉬고 마음을 쉬고
식은 재와 마른 막대기처럼 분별을 쉬고
시원한 물 가을 달처럼 미혹함이 없고
옛 사당 향로처럼 집착을 쉬고
한 생각 만 년 가게 하고
한 가닥 실낱과 같이 하고
강물 흘러가듯 한 것같이 하고.

이렇게 하라는 칠거 법문을 하셨어. 일생 동안 그 스님 법문은 그 칠거 법문 뿐이야. 그렇게 공부를 지어 가라고 하셨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석상 스님이 열반하셨습니다. 석상 스님이 열반한 뒤에 천여 명 되는 대중이, 석상 스님의 뒤를 계승 할 수 있는 방장 화상을 모시려고 논의한 결과, 그 방에 도와 덕과 지혜를 겸비한 훌륭한 입승 스님이 계셨어. 천상 석상 스님의 후계자는 그 입승 스님 밖에 없다고 해서 대중이 입상 스님을 석상 스님의 후계자 물망에 올려놨어.
그 때 대중 가운데 구봉 도건 선사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나이가 젊은 분이야. 한 20대 되는 청년이야. 그런데 그 스님이 나이는 비록 젊지만 석상 스님을 직접 시봉(侍奉)을 하던 시자(侍者)인데, 석상 스님 당시에 그 스님이 크게 깨친 스님이야. 나이는 비록 젊지만 석상 스님이 인가를 한 스님이라.

그러니까 대중들이 입승 스님을 후계자로 정하기는 했지만, 조실 스님께 인정을 받은 그 도건 선사에게 물어봐서 승낙이 떨어져야만 되는 거라고. 그래 도건 선사에게 대중이 가서 그렇게 얘기를 했어. 그러니까 “아주 참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방장 화상 후계자는 세상 법과 달라서 석상 스님의 대의를 알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는 불법에 큰 죄가 되는 것이고, 큰 수치가 되는 것으로 세상 체면과는 문제가 다르니, 내가 그 스님한테 한 번 여쭤 봐서 과연 합당하면 조실 스님으로 모시고, 그렇지 못하다고 하면 대중이 아무리 그렇게 결정을 했어도 될 수 없습니다.”

대중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맞는 얘기라서 도건 선사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어. 이윽고 도건 선사가 그 입승 스님을 찾아가서는 여쭙기를, “돌아가신 석상 조실 스님께서 일생 동안 이르신 칠거법문이 대체 무엇을 가리킨 겁니까?”
하고 물어봤어. 무엇 하려고 그런 말씀을 그렇게 하셨겠느냐? 종사가 법문을 할 적에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까닭이 있는 거야.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법문을 했습니까?”
물으니까 그 입승의 대답이,
“한 빛깔 밝힌 일이니라.”
“스님, 죄송하지만 선사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나를 긍정하지 않느냐?”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 가지고는 죄송하지만 긍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네가 나를 믿지 않는데 내 법력을 한번 보아라. 여기다 향로를 갖다 놓아라. 향로를 갖다 놓고 향에 불을 놓으면, 내가 연기가 피어오르기 전에 좌탈을 할 것이다. 그걸 가지고서 나를 시험해 봐라.”고 말했어. 그래 향을 탁 꽂으니까 향 연기 나기 전에 가부좌하고 앉아서 척 떠나 버렸다 이 말이야. 좌탈을 임의자재로 한 것이지. 그런데 도건 선사는 그렇게 엄청난 법력을 보였는데도 입승의 등을 썩 하니 쓰다듬으면서,
“스님, 좌탈 입망하는 것은 얻을 수 있어도, 석상 스님의 의지는 꿈에도 얻어 보지 못했습니다.”

참, 이거 기가 막힐 노릇이지. 지금 사람 같았으면 입승 스님의 법을 시기해서 그런다고 하지 누가 도건 스님의 말을 옳다고 그럴 거야? 몸 벗기를 맘대로 해버리는 그런 훌륭한 스님의 법을 긍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도건 선사는 아마 맞아 죽었을 거야.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명안 종사들이 모두 제방에 있었어. 그 법문이 쫙 도니까, 여러 스님네들이 거기에 대해서 평을 보냈어. 여러 스님네들이 많이 했지만 그 가운데 천동각이라는 선지식이 그 법문에 대해서 송(頌)을 보낸 일이 있어.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月巢鶴作千年蔓
雪屋人迷一色空
坐斷十方猶點額
密移一步看飛龍

달빛 어린 집에서 학은 천 년 꿈을 꾸었고
눈 집에서 사람은 색공에 대해 버렸도다.
앉아서 시방세계를 끊는다 해도 오히려 이마에 점 찍히니
밀밀이 한 걸음을 옮겨야 나는 용을 보리라.

공부를 하다 보면, 좋은 경계·속상한 경계·슬픈 경계·환희스러운 경계·알았다고 하는 경계·답답한 경계 이런 여러 가지 경계가 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계가 다 공부에 있어서는 전혀 이롭지 못한 마구니의 경계야.

좋은 일이 와도 좋아하지 말고, 나쁜 일이 와도 그렇게 슬피 걱정하지도 말고,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다 공부에 있어서는 마구니야. 공부하는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굳이 가리려고 하지도 말아야 돼. 진실되이 공부하는 사람은 깨쳤느니 미했느니, 견성을 했느니 견성을 못했느니 하는 이러한 허망한 망상도 하지 않는 거야. 공부하는 사람이 무슨 법이 옳느니, 무슨 법문이 맞았느니 틀렸느니 하는 따위 망상도 하지 않는 거야. 그게 다 공부하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망상이야. 공부하는 사람이 그러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무상정법을 버리고 사마 외도에 거꾸러져 떨어져.

정신 바짝 차려야 돼. 철두철미한 발심과 철두철미한 그러한 분발심과 신심을 가지고서 하되, 그 굳은 뜻은 저 태산과 같이하고, 너그러운 마음은 대해와 같이 해 갈 것 같으면, 그 속에서 척하니 한 소식이 있어. 한 소식이 있어.
그 좋은 소식이 어떠한 소식이냐?

箇箇年年是好年 해마다 해마다 늘 좋은 해
箇箇日日是好日 달마다 달마다 늘 좋은 달
百年三萬六千日 백 년 평생 삼만 육천 일
反復還來是這漢 거듭 왔다 갔다 이놈의 짓일세.
나무아무타불(南無阿彌陀佛)!

이 좋은 낯은 부모한테 받아 나온 것도 아니고, 어떤 부처님이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어떤 선지식한테 배워오는 것도 아니야. 이 좋은 낯은 원래 내가 가지고 있어. 이 좋은 낯으로 척하니 1년 열두 달 내내 좋은 해로 보내고, 이 좋은 낯을 가지고 어제도 보내고 오늘도 보내고 내일도 또한 이 좋은 낯으로 보내는 도리가 있어.
“일 년 삼백육십 일을 반복하는 것이 이놈의 짓이다.”
엎쳤다 뒤쳤다 하는 이것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이놈이더라.
(주장자를 세워 법상을 세 번 내리친 후 법좌에서 내려오신다.)


원담 진성 대종사 수행 연보

1926년  전북 옥구 출생. 아명(兒名)은 김몽술(金夢述).
1933년  벽초스님을 은사로, 만공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
1958년  지리산 화엄사 주지.
1964년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취임.
1970년  수덕사 주지 취임.
1980년  승가사 조실. 용인 하운사 조실.
1983년  덕숭총림 설립. 『만공법어』 간행.
1986년  덕숭총림 제3대 방장 취임. 「일본산업경제신문」 주최 제3회 ‘국제서도전’ 대상 수상. 독립기념관 건립 서예전 개최.
1994년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취임.
2002년  용인 법륜사 조실.
2003년  법어집 『덕숭산법향』 간행.
2004년  대종사 법계 품수. 금산 극락사 조실. 향천사 천불선원 조실. 개심사 고현선원 조실.
2007년  『원담대종사선묵집』 간행.
2008년  독립기념관 소장 대종사의 작품 13점을 덕숭총림 선미술관에 기증.
         3월 18일 오후 9시 수덕사 염화실에서 열반(법납 76, 세납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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