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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워낭소리

기자명 법보신문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봄비가 흠뻑 내리고 나니 산과 들은 온통 생기로 가득하다. 생강나무는 산에서 제 일 가는 봄의 전령사답게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무더기로 피어오르고 있다.

오랜만에 고향마을 제석사에 다녀왔다. 황톳길은 비가 오면 소들의 발자국으로 얼룩지고 웅덩이처럼 고인 흙탕물을 밟아서 하얀 바짓가랑이에 붉은 물이 들면 야단을 맞았던 추억의 길을 밟고 왔다. 뒷산 중턱에서 샘처럼 솟아오르며 시작되는 물은 수량이 풍부하여 가뭄에도 아랑곳없어 예와 지금이 둘 아님을 변함없이 노래하고 있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도량을 새롭게 결계하고 천일기도 정진으로 여법하게 불사를 하고 있는 모습에 훈훈한 감동을 받았다. 색신이 법당이어서 아프면 부처가 영험이 없으니 건강을 잘 챙기라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도량을 둘러본다.

절 마당에는 사월 초파일이 되면 농사일을 잠시 멈추고 모두가 함께 모여 연등을 달아 노래하고 춤추며 한바탕 거나하게 축제가 벌어 졌다. 모친 보살님은 유난히 흥이 많아서 장구를 둘러메면 어느덧 마을 사람들의 막혔던 기운을 뚫어 신바람을 불어 넣었던 기억이 생경하게 떠오른다. 여름 방학이 되면 친구들은 소를 몰고 절 마당에 모여서 각자 고삐를 풀어 소들이 무성한 수풀 속으로 들어가면 저마다 자기 세상이 되어 시냇가에서 미역을 감고 가재를 잡으며 신나게 놀았다.

어느덧 하루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지고 땅거미가 내리면 소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집으로 내려가며 내던 워낭소리는 잊지 못할 불성의 원음으로 남아있다. 요즈음 전국의 극장가에는 워낭소리로 가득하다고 한다. 어쩌다 소가 무성한 수풀 속에서 길을 잃으면 찾아서 헤매게 되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워낭소리는 소를 잃은 친구들에게는 자비하신 관세음의 음성이었다. 소가 거기에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모두가 불안하고 위축되어 있는데 워낭소리에 따뜻하고 정겨웠던 부모님과 함께 고향을 떠올리며 한 생각을 쉬어 간다면 어려운 세상사에서 살아나가는 한 줄기 지혜가 열릴 것이다. 아울러서 소리를 들을 때는 성품이 귀에 나타나므로 바로 알아차리면 소리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일체에 걸림 없는 성품을 친견하게 되어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함께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벽암록”에는 산 넘어 연기가 일어나면 불이 난 줄 알고 담 넘어 뿔이 보이면 소가 있는 줄 영리한 사람은 바로 안다고 했다. 눈앞에 전개되어 천 가닥 만 가닥 꼬여있는 세상사를 보면 영리한 사람은 바로 마음의 작용인 줄 깨달아 따라가지 않고 한 칼에 끊어버려 경계와 하나가 되어 현전 삼매를 이룰 것이다.

워낭소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그대에게 다가오면 고향 소식인 줄
바로 깨달아 더 이상 헤매지 마소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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