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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지성] 5.화이트 헤드-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

기자명 법보신문

화엄의 이사무애 꿰뚫은 서양철학의 거두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 오류 지적
‘일즉일체 다즉일’ 존재 이론 역설
“내 사상의 고향은 언제나 아시아”

 
화이트헤드의 모습
불교와 화이트헤드(1864~1949)의 관계를 말하기 전에 과연 동서 철학의 차이는 무엇인가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필자는 동서양 철학의 차이는 논리의 차이에 있다고 보아, 서양을 A형 그리고 동양을 E형이라고 한다.

A형이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아퀴나스(Aquinas) 같은 서양의 주류 철학자와 신학자들 이름의 첫 알파벳에서 유래한 것이고, E란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나 유브라이데스(Eubrides)의 같은 그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자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후자는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서양의 논리학이 아리스토델레스의 ‘오르가논’에서 유래 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논리학을 쓴 동기 자체가 바로 이 논리적인 차이에 있었다.

수학자로서 학자의 삶 시작

사실 이 동기 자체가 철학의 본질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최근 논란이 된 플라톤의 후기 작품 ‘파르메니데스’가 누구의 갓이냐고 할 때에 학자들 가운데는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 파르메니데스에서 제기 된 제반 논리적인 문제에 대한 답으로 쓰여진 것이 오르가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파르메니데스에는 어떤 논리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가?

그것은 이미 잘 알려진 ‘큼’의 문제이다. ‘가장 큼’이란 문제를 제기할 때에 이 가장 큰 것이 ‘큼’이라는 소성을 가져야 할 것이냐 말아야 할 것이냐고 할 때에 두 가지 답 ‘가져야 한다’와 ‘갖지 말아야 한다’는 두 가지 답이 모두 가능해 진다. 이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아리스토델레스는 이 모순 혹은 역설을 제거하기 위해 3가지 사고의 법칙 모순율, 동일율, 배중율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서양 철학은 이 사고의 법칙을 한 치도 어겨서는 안 되는 철학을 전개 해 오게 되었다. 여기서 서양 철학의 고질적인 병 이원론(dualism)이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 에피메니데스는 소위 거짓말쟁이 역설로 알려진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한다면 참말이 되고 참말을 한다면 거짓말이 된다”로 유명하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에 정면에 배치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E형 논리적 철학이 먼저 선재하였고 A형이 이를 제거 내지 박해하면서 서양철학사는 시작한다. 이런 E형 논리를 주장하는 철학자와 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제거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중세기의 경우 E형 논리는 위험시되기 까지 했다. 아퀴나스와 같은 시기의 에크하르트(Eckhart) 같은 신학자는 E형 논리의 전형적인 사상가이나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 맥락의 교권에 의해 화형에 처함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서양철학의 주류 논리는 A형이고 E형은 이단시 되고 말았다.

동양 철학의 논리는 두 말 할 것 없이 E형이다. E형이 주류이고 A형이 비주류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서양과 동양은 그 논리 형에 있어서 서로 상반된다. 그러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거하려 했던 E형 논리가 서양에서 19세기 말부터 서양 사상 전반에 두루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역설 즉 거짓말쟁이 역설이 드디어 1904년 ‘러셀 역설’이란 이름으로 재등장하면서 러셀은 화이트헤드와 함께 이 역설 제거의 목적으로 ‘수학 원론’을 저술 한다. 이와 같이 화이트헤드는 수학자로서 그의 학문적 삶은 시작한다. 두 사람은 역설 제거의 3학파 가운데 하나인 논리주의를 이렇게 확립한다. 수를 한 번 논리적 기호로 다 바꾸면 역설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1910년경이면 무위로 돌아가고 양인은 책을 같이 저술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화이트헤드는 그 이후 물리학을 거쳐 1926년 경 미국 하버드 대학 생활부턴 철학자로 변신한다. 물론 그의 철학자로서의 여정은 궁극적으로 수학에서 제기 된 역설의 문제와 씨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 시절에 철학자 변신

서양의 실존을 의미하는 ‘exist’ 는 “ex 밖에 ist 있다” 와 같다. 밖에 있는 것만이 실존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면 무엇의 밖에 있다는 뜻인가? 그것은 자기의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거짓말쟁이 역설과 러셀 역설에서 ‘모든 집합’(A) 과 그 집합 안의 요소들을 a라고 한다면 모든 집합 A도 a라는 것이다. A가 a일 때에 이를 ‘자기 언급(self-reference)’라고 한다. A와 a는 메타언어와 대상 언어의 관계이고 전체와 부분의 관계이다. 그런데 자기 언급이란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부분이 되는 것이고, 대상이 메타가 되고 메타가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른 자기 언급 혹은 사상(寫像)이라고 한다. 이렇게 자기 언급을 하고서는 일관성을 가질 수도 없고 이는 모순율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존재하자면 반드시 자기 언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ex-ist’라고 한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 귀속하는(belonging)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러셀은 역설을 해소 하는 방안으로 유형론(typology)을 제안한다. 즉, 위에서 A와 a는 서로 유형이 다른 언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엄격하게 유형이 자기 위계를 어기지 않으면 역설이 발생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러셀의 역설 해의는 그의 가장 어리석은 제안 가운데 하나이다. 아마도 화이트헤드가 러셀과 헤어지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결국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오랜 동안 서양에서 외면 시 당한 E형 논리에로 복귀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의 사상이 동양 사상 전반에 일치하는 이유도 다름 아닌 양자가 공히 E형 논리에 기초하여 사고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존재 원리를 따를 때 사실 존재는 가득참의 완성된 실존체이다. 사실 존재들이 잇달아 연접되어 있는 세계의 바깥 세계란 비존재의 세계이다. 그래서 exist는 비존재라는 궤변이 성립한다. 화이트헤드는 “사실 존재를 떠난 세계는 비존재의 세계이며 비현존의 세계이다.

그 나머지 세계는 모두 고요할 뿐” 이라고 했다. 그러나 서양의 존재론은 이러한 잇따라 일어남의 존재론을 무시하고 철저하게 existence의 존재론이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being’ 같은 것을 단순 정위(simple location)라 했으며, 이런 단순 정위를 구체화시킴으로써 생기는 오류를 ‘잘못 놓은 구체화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했다.

서양의 일원론 철학에서 탈피

화이트헤드는 자기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개의 원리들과 범주 들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임의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들이 경험 이전의 규범이 아닌가 하는 오해도 받게 된다. 사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이들 범주들과 원리들이 일관성과 논리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그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존재의 원리는 현대 물리학자들이 발견한 원리이지만 동양 철학, 특히 불교 철학에서는 이미 2500여 년 전에 발견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열반경』에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해 보면 “모든 존재에는 불성이 있다(-切衆生 悉有佛性)”와 같다. 만약 서구 신학이 모든 인간 속에 신성이 있다고 한다면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E형 논리적 표현이다. a속에 A가 들어 있다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부분 속에 전체가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대승 불교에서는 위의 『열반경』의 구절을 주석하는 것으로 그 종지를 삼고 있다.

일본의 도오겐(道元, 1200~1253)은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가졌다”라는 『열반경』의 문장을 광의로 해석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모든 존재(-切衆生)라는 개념을 식물이나 동물계에 국한시키지 않고, 무생물계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 자체-존재하는 모든 것-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육조 혜능 선사가 제자인 남악회양(南嶽懷讓)과의 처음 상봉에서 “이 무슨 물건이 왔는고?”하고 물었을 때, 도오겐에게 있어서는 만물의 실재와 불성과의 관계가 동일성의 관계 이외에는 달리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는 하나(-) 속에서 여럿(多)의 바탕을 찾아내려는 일원론 철학의 경향을 피하고 있다. 하나와 여럿은 잇달아 일어난다. ‘이것’ 속에 일과 다는 소용돌이를 만든다.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불성을 보고 있을 때면 만물, 그 구체적 존재 속에서 모든 ‘이것’ 보고 있는 것이다.

불성과 만물의 관계를 화엄 불교에서는 이 (理)와 사(事)의 관계로 만든다. 이는 개념적 보전성의 그리고 사는 개다적(個多的) 특수성의 뜻이다. ‘돈오 무생 반야송(頓悟無生般若訟)’에 의하면 “이와 사는 모두 같아 이는 깨끗한 곳으로부터 나아가 사의 다양성 가운데 도달한다. 사는 이와 같이 하여 이와 상통하고 간격이 없고 장애가 없이 통한다(理事皆如 理淨處 事能通達 事理通無碍).” 화엄 불교의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상은 바로 화이트헤드의 존재 원리의 요약된 표현 이다.

결국 A형 논리는 파르메니데스가 그러한 바와 같이 ‘거대한 일자를 다자 위에 설정하는 것(One above many)’으로 고착된다. 파르메니데스가 일자와 다자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를 파악했음에도 그 사이의 역설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설정한 것은 서양 철학의 불치의 병의 근원을 만든다.

이것이 러셀의 유형론으로 까지 이어진다. a와 A가 서로 사상하여 하나가 여럿, 그리고 여럿이 하나라는 표현이 불교에서 만큼 진지하게 철저하게 다루어진 곳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자기 사상의 고향은 아시아라고 하지 않았나한다.
김상일 전 한신대 철학과 교수


김상일 교수는

연세대학교 신학과, 연세대학교 연합대학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미국 클래어몬트 대학에서 종교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화이트헤드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화이트헤드와 동양철학』, 『알랭바디우와 철학의 새로운 시작』, 『원효의 판비량론연구』를 비롯한 많은 논문과 저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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