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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당 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의 길]⑨ 남조선의 여러 화엄개벽들

기자명 법보신문

밑바닥 중 밑바닥 춤인 품바가 곧 개벽춤

 
나홀로 동학당 김지하는 문둥이, 각설이, 걸뱅이 타령인 품바를 최고의 율려로 보고 있다. 그는 4500년 전 황제 이래 최대 우주질서의 체계인 율려가 곧 ‘화엄개벽정인 밑바닥의 모심’이라고 강조한다.

1894년 갑오동학무장혁명 즉 동세개벽(動世開闢)에 대한 상대적 평가와 그 복합적 이중성, 그 겹겹의 그늘에 관해서는 비교적 상세한 역사연구가 있어온 셈이다.

갑오년의 제1차 기포(起包)와 제2차 기포에 걸친 해월의 고뇌는 뒷날 강증산(姜甑山)의 비폭력·평화를 통한 정세개벽(靖世開闢)으로, 일종의 ‘흰 그늘’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정세개벽이 곧 진정한 화엄개벽이다. 더욱이 증산은 여인 중심의 개벽, 즉 ‘음개벽(陰開闢)’을 후천개벽의 당면 목표이자 가장 정당한 실천 방편이며 참된 개벽의 주임무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실천을 수부(首婦), 즉 ‘으뜸아낙’인 아내 고판례(高判禮)에게 하늘·땅·사람의 삼계 우주대권을 넘기는 의식인 천지굿, 세계 모든 종교의 원탁회의인 통일신단(統一神團)에 바탕한 세계조화정부(世界造化政府)를 구성하여 비폭력·평화에 의한 정세개벽을 전 지구적, 전 우주적으로 추진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우주재판), 그리고 그 흔한 농민풍물가락에도 못 미치는 밑바닥 중의 밑바닥인 문둥이·각설이·걸뱅이 타령을 후천시대에 ‘세계를 통치할 우주 정치음악인 율려(律呂)의 하나라고 감히 언명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더욱이 증산은 수운 주문의 맨 첫 번째의 화엄개벽 주문인 강령주(降靈呪) ‘지기금지(至氣今至)’를 다름 아닌 ‘현시대 최고의 율려’라고 칭송하고 애송한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이미 ‘지기금지’나 화엄개벽 도래의 선언이고 통일신단에 바탕한 세계조화정부가 이미 우리식의 개념탐구 권역에서는 분명 화엄개벽의 실천적 추진체로서의 세계 정치기구다. 전세계 종교평화연대에 입각하여 문명과 문명의 차이를 각개적으로 융합(개체·융합)하는 새로운 생명평화(조화·창조적진화)의 세계정치 기구이겠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화엄개벽의 길이다. 나는 강증산에게서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촌놈’을 본다. 무지렁이, 천덕꾸러기, 농투산이, 꼬래비 다시 말하면 김일부의 ‘기위’요 ‘대황락위’이자 예수의 ‘네페쉬하야’이겠다. 그 ‘촌놈’이 곧 ‘옥황상제’, 우주의 통치자인 ‘한울님’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증산의 신분이나 캐리어 자체가 곧 화엄적이면서(스스로 우주의 대불(大佛), 미륵불이라고 자처했으니) 정역적으로 보면 ‘삼팔동궁(三八同宮)’이다. 즉 십일일언이자 십오일언이며 ‘기위친정’이자 ‘무위존공’인 것이다. 이 점에서 증산은 ‘동진불염(同塵不染)’의 중생부처이겠다.

나는 무엇보다도 증산의 ‘음개벽’ 즉 여자를 전위로 하는 화엄개벽에서 문둥이·각설이·걸뱅이 타령인 ‘품바’를 최고의 율려로 보고 그것을 우습게 여기는 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리라고 엄포를 놓은 점을 중요시한다.

‘품바’의 춤은 일부의 정역과 광화의 남학에서 일관된 화엄개벽 모심의 수련형식인 ‘영가무도(詠歌舞蹈)’와 마찬가지로 전통 농민 춤과는 또 달리 하단전 ‘기해(氣海)’가 아니라 그 밑 오금사이, 항문과 성기 사이의 회음부에서 시작되고 흘러나오는 춤이라는 점 때문이다.

연담이 최제우ㆍ김일부ㆍ김광화에
선도의 부활-역학과 불교의 혁신
주문함은 유불선 삼교융합 시도

율려(律呂).
동아시아 사상사와 예술사, 그리고 정치사에서 4천5백년 전 황제(黃帝) 이래 최고 최대의 우주질서의 장엄한 음악원리요 체계인 율려가 바로 그같이 어두컴컴한 밑바닥의 회음에서부터 나온다는 것, 그것이 후천세계를 통치한다는 증산의 믿음이 매우 소중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화엄개벽적인 밑바닥의 모심’인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또 있다.
아까 잠깐 언급했지만 김일부의 정역 역시 일종의 화엄개벽인데 그 수련 방법이 곧 회음을 모시는 춤이요 음악이요 노래(蹈歌舞)인 ‘영가무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정역의 기위친정, 밑바닥이 한울의 임금자리에 복귀하는 춤이겠는데 역시 중요한 것은 회음으로부터 시작된 움직임과 소리와 노래로 온몸과 머리를 울려 이른바 후천우주율로서의 ‘여율(呂律)’을 창조한다는 점이다.

여율은 율려의 반대요 전복개념이다. 율려의 ‘음을 누르고 양을 드높임(抑陰尊陽)’이 아니라 여율의 ‘양을 다스리고 음을 뜀뛰게 함(調陽律陰)’이라는 여성성과 혼돈성과 역동적 생명력을 남성성과 질서와 균형적 정신력을 통제하거나 배합하는 미학원리이겠다.
그런데 이점에서 역시 수양방법과 그 미학원리가 김광화(金光華)의 남학(南學)도 동일하다.

역시 ‘영가무도’인데 남학과 정역뿐 아니라 동학의 칼춤 칼노래 역시 똑같이 공중으로 비약하고 부양(떠오르기)하는 점에서 동일한 점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다.
무윤력의 후천개벽이 여인의 월경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기위친정의 ‘공중부양’역시 회음부의 불가사의한 숨은 생명 약동력의 ‘복승(復勝)’현상인 것 같다.

 
김지하가 말하는 최고의 율려 품바는 밑바닥 민중들과 자연스럽게 소통되고 있다.

남조선 화엄개벽의 길에서 그 큰 변동의 출발을 회음에 모시는 선적(禪的) 수련은 대체로 이 점에서 일치하니 여성적, 음적, 혼돈적이라는 점에서 또한 공통된다.

이른바 품바춤도 칼춤도 영가무도도 다름 아닌 회음춤이니 이것이 곧 개벽춤이고 이것이 아랫도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모심’의 양식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1840년대 남조선에는 한 사람의 참으로 신령한 기인(奇人)이 출현한다. 문참판(文參判) 출신의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 선생이시다. 선생은 연산 인내강변의 띠울마을에서 수운 최제우에게 선도(仙道)의 부활을, 김일부에게는 역학(易學)의 쇄신을, 김광화(金光華)에게는 불교의 혁신을 권유하는데 그 세 사람에게 내린 화두(話頭)의 내용으로 보아 그 가르침 전체의 요약이 곧 유불선 삼교를 다가오는 새로운 대세계 융합시대의 개벽을 집약한 ‘화엄개벽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이 글 초입에서도 강조한 바 있는 ‘남학밭’의 전설, 남조선 사상사 전체에서 참으로 신비스러운 민중조직운동의 저변의 강철같은 기반으로 알려진 ‘남학밭’의 주인공 김광화를 강조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김광화는 전북 진안(鎭安) 사람으로 대불리(大佛里) 운장산(雲藏山) 밑이 그 태생지이고 그곳에서 활동하고 그곳에서 또한 죽었다. 남학을 일명 오방불교(五方佛敎) 금강불교(金剛佛敎)라고도 하는데 이 교리의 구조를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첫째는 유·불·선의 종합과 그 위에 무속(巫俗)과 민간신앙인 서낭숭배 또는 별점이나 칠성신앙(七星信仰)까지도 습합하고 있다.
둘째, 오방불교의 그 오방(五方)은 『화엄경』의 오방부처와 동일한 것으로 근본을 역시 화엄불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금강불교의 그 금강(金剛)은 역시 『금강경』의 그것이겠으나 미묘하게도 그 금강의 대중적 뉘앙스에 당대 이전부터 내려오던 강원도 금강산에 대한 토속적인 숭배가 깔려 있음은 기이한 일이다.

넷째, 칠성신앙은 제단의 구조와 방위 등에 모두 관통하고 있어 북방계 샤머니슴의 강열한 관류를 느끼게 한다. 북방계 샤머니슴의 주요한 요소가 불함(不咸) 문화이니 ‘’‘백(白)’‘한(桓)’‘태양’과 ‘빛’의 신비적 요소가 북극태음, 북극성 등의 이른바 여성성과 결합되어 그 자체로서 이미 동북방 지향과 남조선 신앙의 융합을 느끼게 한다. 단군 신앙이 강열하다.

다섯째, 유교적 요소로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눈에 두르러지는 것은 역시 천지개벽적인 전세(轉世)사상이요 서경(書經) 이후의 제세(濟世) 이념이다. 이것은 물론 후세의 성리학 등 권력측의 경륜 등과는 전적으로 배역(背逆)적 관계에 있는 듯 하다.

여섯째, 선도(仙道)는 역시 남학의 기본 요소다. 무병장수(無病長壽)와 심신연마(心身鍊磨)와 복덕입신(福德立身)을 기원하는 퍽이나 대중적인 차원의 선도사상으로서 여성의 중요성, 다산(多産)과 모성(母性)의 숭배가 두드러진다.

김광화는 이같은 그야말로 제교혼합주의(濟敎混合主義)적인 잡화엄(雜華嚴)의 길을 갔는데, 그럼에도 개벽적 조직활동이 두드러졌고 갑오동학혁명 당시 진안에 오만명의 신도를 집결해 봉기하려다 토벌당하고 처형되는 등 그 저항은 치열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전설이 되어 본명 ‘치인(致寅)’보다 ‘광화(光華)’의 그 ‘별과 꽃’즉 ‘개벽화엄’의 상징이자 신화로 널리 유포되고 지하조직을 흔들어 도처에서 일제에 항거 하므로서 다른 민족종교들이 어느 정도 묵인되는 유화국면에서도 남학과 광화 숭배의 ‘남학밭’은 끝끝내 삼제와 토벌의 대상이 되어 오늘날 그 자취를 아예 찾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1700년 이어온 불교교단 속에서
화엄개벽의 치열한 선(禪)적결단
주최들은 당취 이외에는 없는가

진안 운일암반일암(雲日岩半日岩)이 개벽의 삼엄함을, 그 속에 펼쳐진 무릉리(武陵里)가 낙원을, 대불리(大佛里)가 비로자나불의 대화엄을 상징하고 있다. 화엄개벽의 대중적 조직운동의 길의 대표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원불교창시자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선생이 있다.
그 핵심사상인 ‘일원상법신불개벽(一圓相法身佛開闢)’은 문자 그대로 ‘화엄개벽’인 것이다. 일원상은 화엄의 다른 말이니 원불교의 실천교리가 ‘처처불상사사불공(處處佛像事事佛供)’인 것은 곧 ‘월인천강(月印千江)’의 원리가 저축조합이나 간척사업, 과수원 가꾸기 등 생활 자치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전혀 화엄개벽의 실천적 모심 그 자체이니,
그렇다!
쇠고기 등 반찬이나 물, 까스, 대운하, 교육, 건강 등 생명평화와 생활을 들고 나온 시청 앞 촛불의 ‘기위친정’의 그 화엄개벽의 어쩌면 가장 구체적인 선구(先軀)일 것 같다. 특히 원불교의 개벽실천의 전위인 여성 교무단의 존재는 이제껏 강조해온 여성중심의 화엄개벽 선(禪)의 뚜렷한 보름달이다. 이미 별을 넘어선 달이요 꽃봉오리인 듯 하다.

『벽암록(碧巖錄)』 제69칙 남전원상(南泉圓相)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다.
“남전과 귀종과 마곡이 혜충국사를 찾아가는 길에 도중 남전이 땅에다 일원상(一圓相)을 그려놓고 말했다.
‘이르면 곧 가겠네’
귀종은 원상 가운데 앉고 마곡은 문득 여인의 절을 하니 남전이 말했다.
‘그렇다면 갈 것 없네’”

화엄개벽은 마땅히 그 안에 눌러 앉아 닦아야 하지만 사실은 여인의 ‘모심’이 생명선인 것 아닐까?
여인이 남성의 일원상 안정기조 위에서도 비약하듯 화엄개벽의 모심의 절을 지속할 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묻자.
1700년 지속되어온 기존의 전통불교교단 속에서 화엄개벽의 치열한 선적 결단의 주체들은 당취(黨聚) 이외에는 없었던가?
과연 당취뿐인가?
그렇다.
당취뿐이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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