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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34. 승무(僧舞)

기자명 법보신문

신라 원효성사의 무애춤이 현존 첫 기록

 
불교의식을 행할 때 몸동작을 통해 공양하는 스님들의 춤을 승무라고 한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시인 조지훈이 비구니 스님들이 추는 춤사위의 고운 선율과 동작 하나 하나를 지켜보고 난 후 그 감동을 풀어낸 시(詩) ‘승무(僧舞)’의 앞부분이다. 조지훈의 시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해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듣고 보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승무의 단면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익히 보아서 알고 있는 승무는 불교무용으로서의 승무가 아니라 민속무용으로서의 승무가 대부분이다. 불교적 입장에서 승무를 정의하자면 ‘불교의식을 진행할 때 부처님 진리의 말씀을 몸 동작을 통해 공양 올리는 스님들이 추는 무용에 대한 총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이수자이자 동국대 국악과 교수인 법현 스님 등 불교무용 전문가들은 “불교무용인 승무라 이름지어 말할 때는 승무라는 용어가 타당하지만, 민속무용 승무는 스님들이 하는 무용이 아니므로 민속 무용으로서의 새로운 용어로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의식에서 사용되는 승무와 민속무용으로서의 승무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불교의식을 진행할 때 행하는 의식무를 승무 또는 작법무라고 부르고 있다. 이때 불교무용으로서의 승무는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 타주춤 등이 있다.

영취산서 가섭이 춘 춤에서 유래

그렇다면 불교무용, 즉 스님들이 춘 춤인 승무는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승무의 역사와 유래는 우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는 구전전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불교문화와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력한 설이 이른바 영산회상 설이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천사색(天四色)의 채화(彩花)를 내리니 가섭이 알아차리고 빙긋이 웃으며 춤을 춘 것을 승려들이 모방했다”는 설로 가섭이 춤을 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승무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경전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마가승기율(摩訶僧祇律)』 권 제33에서는 “기아(伎兒)는 북(鼓)을 치거나 노래와 춤을 추고 비파를 뜯고 징이나 동발을 치는 사람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기악을 하는데 최소한 네 사람이 모여서 놀이를 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증일아함경』,『석씨요람』,『불본행집경』,『고승전』 등에서도 불교의 춤과 관련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한 중국에서는 “위나라 무제의 네 번째 아들 조자건이 어느 날 천태산에 오르자 범천에서 오묘한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에 맞추어 고기떼가 춤을 추었기에 그 소리를 모방해 범패를 만들고, 고기떼의 노는 모양을 본떠 승무를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법현 스님은 불교무용을 소개한 저서 『불교무용』을 통해 “여기서 연유하여 범패와 무용을 하는 스님들을 지칭해 ‘어산’이라고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식 작법무 가운데 하나인 법고춤.

우리나라에서는 6세기 초 남중국 오나라의 기악무를 백제 사람 미마지가 배워서 일본에 건너가 상류층의 귀족 자녀들에게 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작 백제 땅에서 어떤 승무가 행해졌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밖의 승무 관련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자신을 소성거사라 이름하고 걸림 없이 살았던 신라 원효 스님의 춤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 제4권 제5 「의해편」 ‘원효는 구속을 받지 않다(元曉不羈)’조에는 “원효는 설총을 낳은 후로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일컬었다. 우연히 광대들이 갖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했다. 성사는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無碍人)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란 문구에서 따서 이름지어 무애라 하며 이내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많은 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왔으므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는 컸던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원효 스님이 춤을 추게 된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애가를 지어 무애춤을 추며 거리를 돌아다닌 원효 스님의 춤과 관련한 내용이나 형식은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효 스님의 무애춤은 현존하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우리나라 스님들이 춘 춤, 즉 승무의 첫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 고려시대에는 불교예술과 더불어서 백고좌도량, 각종 재회 등 많은 종류의 법회의식이 행해진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승무에 대한 구체적 문헌은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 이후 서산 스님에 의해 포교방법으로 활용됐으며, 이에 따라 승무를 승려의 필수 일과로 중시하면서 발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정처 없이 떠도는 운수승들이 승무를 탁발수단으로 이용하면서 종교적 의의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고 해서 금지됐으며, 이에 따라 승무가 민간으로 내려와 서서히 민속무용으로 변했다는 주장이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조선 감로탱화에 작법무 등 등장

조선시대 승무 관련 내용은 문헌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그려지기 시작했는지를 알 수 없어 안타깝기는 하나, 다행히 그 시대에 조성된 감로탱화를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일본 약선사 감로탱화(1589, 나라박물관 소장)와 충남 보석사 감로탱화(164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에서는 육법공양을 올리고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모습을 비롯해 스님들의 춤추는 모습 등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어 1730년에 그려진 경남 고성 운흥사 감로탱화에는 스님들의 바라춤과 법고춤 등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나비춤 의상을 입은 스님의 모습도 등장한다. 그리고 18세기 말 감로탱화에는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추는 2인 춤으로서의 바라춤을 비롯해 홀로 춤추는 나비춤과 법고춤 모습이 묘사돼 있다.

이러한 전개과정을 거쳐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불교의식에서의 무용인 승무는 불교의식을 보다 장엄하게 하는 한편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불교의식에 있어서 불교무용은 예술적 차원을 넘어 수행 및 신앙심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일반에 널리 알려진 민속무용으로서의 승무가 불교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승무가 나온 기원과 관련한 설 역시 불교에 연원을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선 지족선사를 파계시킨 황진이 무용설이 있다. 이는 조선왕조 때의 명기 황진이가 수도승인 지족선사를 파계시킬 목적으로 세모시 한삼에 한모시 고깔을 쓰고 다홍장삼을 맨 승복차림으로 교태로운 춤을 추다가 승복을 벗어 던져 끝내 지족선사를 파계시켰다는 내용으로, 이때 황진이가 추었던 춤에서 승무가 유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자무설이 있다. 스승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해 상좌승이 잠시 장난으로 스승이 평소에 하던 기거범절이나 독경설법 등의 모습을 흉내내면서 희화적인 움직임으로 춤을 춘 것이 승무가 되었다는 설이 동자무설이다.

고려시대 승무는 감로탱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92년 제작된 서울 봉은사 감로탱화.

또 파계승 번뇌설이라고 해서 파계해 환속한 승려가 괴로움으로 인한 번민을 잊으려고 추기 시작한 것이 승무라는 설이다. 이외에 승무의 내용이 『구운몽』의 줄거리로 구성됐다는 설인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설이 있고, 가면극 중에 노장과정에서 노장춤이 승무의 원초적인 기원이 됐다고 하는 탈놀음의 노장춤설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설 중에서 무엇보다도 불교의식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는 승무의 기원설로 꼽히고 있다. 이는 현재 세간에서 유통되는 승무와 불교의식무 중 법고춤이 그 기법이 같을 뿐만 아니라, 세간에서 유행하고 있는 승무의 춤사위 구성이 불교의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민속무용 승무도 불교서 연원

여하튼 어느 설이 정설이라고 확정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세간의 승무가 불교에서 유래했다는 데는 크게 이견이 없다. 그리고 승무가 그 이름 자체로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춤 이름에서 나타난 승(僧)을 소승의 단계를 넘어선 대승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세간에서 널리 유통돼온 승무는 한때 불교의 존엄성과 위의를 해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폐지론이 나오기도 했었으나, 각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무용의 대가들이 활발하게 후진을 육성하면서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현재 세간의 승무는 이애주 교수를 중심으로 한 경기승무와 이매방 씨를 중심으로 한 호남승무 등 양대 그룹이 형성돼 있다.

한국불교에서의 승무는 문헌상 원효 스님이 추었다고 하는 무애춤을 시작으로, 각종 의식에서 행해온 의식무로서의 승무로 발전·계승돼 왔다. 그리고 그 안에 옛 선사들이 화두를 깨치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때의 환희심과 같은 법열이 녹아 있음은 물론이고, 부처님의 장엄한 회상과 법을 찬탄하는 간절한 발원과 공양의 의미가 깃들어 있기도 하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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