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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의 여운깊은 책읽기]지식인, 외양간에 갇히다

기자명 법보신문

『우붕잡억』계선림 지음/이정선 김승룡 옮김/미다스북스

지식인의 반열에 들어선다는 것은 결코 그 삶이 녹록치 않음을 의미합니다. 지식인은 황제 앞에서 당당히 쓴 소리를 뱉을 수도 있지만, 국면전환을 꾀하는 권력자의 희생물이 되거나 성난 민중의 화풀이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시대가 어지러우면 너나할 것 없이 지식인의 소재(所在)를 묻기 때문입니다. 지식인이 혼란을 초래한 장본인도 아니요, 시대문제를 대번에 해결해줄 답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사람들은 묻습니다.

“대체 지식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쩌면 시대의 부름에 귀를 막고 외면할 수도 있겠지만 ‘글자를 아는 순간 우환이 시작된다’는 자조 섞인 넋두리가 말해주듯 역사 앞에 불려나가거나 자진해서 앞장을 서게 되니 ‘제가 담근 쓴 술을 제가 다 마셔버려야 하는’ 지식인의 운명이 기가 막힐 뿐입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나라의 스승’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계선림(季羨林)은 일찍이 독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인도학을 전공하고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지식인입니다. 귀국한 뒤에 북경대학 교수가 된 그는 동방학부를 신설하고 인도 중앙아시아와 관련한 분야에 굵직한 학문적인 업적을 이루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를 바쁘게 뛰어다니며 국가적 규모의 학술대회도 소화해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식인도 1960년대 중반에 불어 닥친 문화대혁명의 광풍을 비켜가지 못했습니다. 학자로서는 가장 왕성하고 정력적인 시기라 할 만한 50대 중반에 제 손으로 길러온 제자들에게 따귀를 맞고 무릎이 꿇리고 집단구타를 당하고 급기야는 우붕(牛棚:외양간, 집단수용소를 말함)에 갇힌 채 강제노동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 후 지식인들은 어느 날 슬그머니 복직이 되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강의 하고 논문 쓰고 학술대회를 열게 됩니다. 스승의 따귀를 때리고 폭력과 모욕을 일삼던 젊은이들 역시 슬그머니 어린 제자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계선림은 훗날 북경대학의 부총장까지 역임하게 되지만 결국 붓을 들었습니다. 이렇게라도 피해의 기록을 남겨두어야 가해자들 중 누구 하나라도 제 기억과 맞춰보면서 그 일을 생생하게 떠올리지 않겠느냐는 바람 때문입니다. 10여 년에 걸친 치욕의 세월을 냉정하고 담담하게 피력한 뒤에 그는 붓을 던지며 이렇게 절규합니다.

“나는 원래 윤회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윤회를 믿어보겠다. 자, 아주 아주 엄숙하게 조화옹에게 말하련다. -다음 세상에는 어떠한 이유로도 나를 더 이상 주물럭거리지 마오. 그리고 절대, 절대로 나를 지식인으로 만들지 마오.”(334쪽)

대륙 전체가 미쳐버려 그런 만행을 저질러 놓고는 거대한 인구가 일제히 시치미를 뚝 떼고 있음을 견디지 못한 한 지식인의 회고를 읽어가자니, 결국 누워서 침 뱉는 역할까지도 지식인의 몫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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