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당 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의 길] ⑩ 남쪽으로, 다시 북쪽으로, 서쪽으로, 중앙으로
[동학당 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의 길] ⑩ 남쪽으로, 다시 북쪽으로, 서쪽으로, 중앙으로
  • 법보신문
  • 승인 2009.03.09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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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이 바로 개벽과 화엄의 생명주체다
 
나홀로 동학당 김지하는 화엄을 모시는 수련과 실천 자체가 곧 개벽이고 확충에 의한 자기치유 행위라고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운 20만 불교도들의 열정이 바로 화엄의 실천이며 곧 불교계 내부의 모순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학(易學)의 지혜를 따른다면 남조선 화엄개벽 운동은 당연히 북쪽과 연결된다. 남쪽의 흰 빛(離)은 제 안에 반드시 북쪽의 검은 그늘(坎)을 길러야 길(吉)하기 때문이다. 물론 원만한 화엄실현에 의해서만 북쪽 은하수의 기위친정, 즉 후천개벽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역시 ‘흰 그늘’이다.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의 오늘의 향방이 심상치 않다.
현대문명의 대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오고 있고, 그 동쪽의 신문명이 서쪽의 미국과 함께 동북과 서북을 통해서 아시아 중앙으로 환귀본처(還歸本處) 함으로써 드디어 아득한 고대아시아, 특히 중앙아시아 7세기 동안의 장기 대규모 결집의 산물인 화엄사상과 민족 고유의 개벽사상이 모심의 선(侍禪) 안에서 여성 중심의 몸의 해탈에로 나아가는 유라시아·태평양 신문명의 길이 대세인 듯하다.

이 과정에서 불함문화의 ‘부르한’즉 ‘   ’ 사상이 ‘       , 또는 ‘        (八關)’, 다시 말하면 검은 구멍 속의 흰 빛(주역의 이른바 감(坎) 속에서의 이(離), 이(離) 속에서의 축빈우(畜牝牛) 또는 노자의 현빈(玄牝) 장자의 혼돈(混沌))’으로 ‘현재화’할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 몽골에 매년 집결하고 있는 57개국 영성전문가·명상가 집단은 몽골의 성지(聖地) ‘토토텡그리’의 ‘산(山, 艮,   )’과 ‘바이칼 호수 알혼 섬’의 ‘못(潭, 兌,    -한 발 더 나아가 그 보편적 혼돈인 검은 물구멍 속의 오똑한 흰 섬, 환인(桓因)과 환웅(桓雄)의 흰  빛의 중심성)’ 사이에 형성된 불함문화를 재생·복원하여 멸망해 가는 세계 정신을 부활시키는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수운 시에
‘산 위에 물이 있음이여(山上之有水兮)’란 구절이 있다.
‘산택통기(山澤通氣)’는 주역에서의 우주생명과 지상생활 중심의 신시(神市) 경제를, 똑같은 산 위의 물인 ‘간태합덕(艮兌合德)’은 정역에서 한·미간 파트너십 중심으로 일본과 중국이 협조 보필하는 신문명, 즉 ‘호혜·교환·획기적재분배’의 호혜시장이라는 옛 신시의 현대적 재창조 과정을 말하고 있다.

행여 웃을 일이 아니다.
불함문화는 캄차카의 7000개의 신화, 그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 쌍방향 통행의 결정체인 어마어마한 콘텐츠의 보물창고인 미래지향적 동북방 샤마니슴을 몽땅 원리적으로 함축하고 있으며 한발 더 나아가 1세기에서 7세기까지 특히 6세기 중심으로 수수백명의 아시아 고승대덕과 수승한 불교학자들이 대규모 결집으로 완성한 ‘『대방광불화엄경』’의 고향과 그대로 연속된다.
그뿐 아니다.
그 가까이는 곧 파미르고원이다.
파미르고원에는 1만 4천년 전 여신(女神) 지배의 모계(母系) 초모권제(超母權制) 문명이 있었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최초의 여신 마고(麻姑)에 의해 인류 최초의 문명이 창조되었고 남신(男神) 개입 없이 궁희(芎姬) 창희(蒼姬)로 이어지는 모녀(母女) 직계의 초모권제(超母權制·가장 순수한 여성사회제도)에 의해 당대 우주질서인 팔여사율(八呂四律·여성성과 혼돈성이 여덟, 남성성과 이성적 질서가 넷으로 이루어진 우주생명 질서의 금척(金尺))을 기초로 해서 훗날 아시아 전역에 확산된 신시(호혜·교환·획기적재분배의 호혜시장)의 원형인 천시(天市) 문명을 창시했다는 신화다.

이 신화를 어찌 생각하는가?
현대 유럽의 가장 첨단적인 원형적 사상유형은 페미니슴이고 그 페미니슴의 최종적 금자탑은 뤼스·이리가라이다.
그런데 이리가라이는 범박한 사회과학적 젠다 투쟁으로 무서운 어머니 유형의 전투적 페미니슴이 도리어 유럽의 근대 초기 이성과 남성 패권주의·전체주의 관념철학인 헤겔·칸트의 반동적 복원을 부추기고 한발 더 나아가 거의 폭력수준의 진화생물학인 다아윈을 재집권시키는 일대 역행(逆行)을 유발시키고 있는 암담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페미니슴의 참다운 출구를 동양적 신화망으로부터 모색하고 있다.

그것이 여신지배의 모녀전통에 의한 ‘자애로운 어머니·신성한 모성(에릭·노이만) 중심의 초모권제’ 부활의 방향성이고 이 방향에 의해 비로소 여성 중심의 남녀간의 참된 평화의 문명사 창조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마고 신화의 원형 안에 그대로 있다.

나 이전에 대화엄과 후천개벽
실천주체의 몸의 모심선이
싹은 물론 꽃까지 피고 있었다

어찌 생각하는가?
마고성은 환인씨, 환웅씨의 아버지 유인씨(有人氏)의 고향이고 유인씨의 할머니가 곧 창희·궁희·마고다.
마고성은 한민족의 신화적 고향이니 부도지(符都志)와 키르키스의 마나시 서사시 전통에 따르면 한민족은 곧 ‘파미르키르키스한’이라는 1만년 전 그 지역 문화창조의 주역이었다.

내가 이 글 초두부터 내내 다루어온 개벽사상의 역학(易學)인 김일부의 정역은 바로 이때의 우주원리인 ‘팔여사율’의 금척(金尺)을 19세기 후천 민중시대의 음악과 우주원리인 ‘혼돈적 질서(chaosmos)’를 뜻하는 ‘여율(呂律)’을 재생·압축한다. 당시 머리를 든 민중음악인 판소리, 탈춤, 산조(散調), 풍물, 민화, 속화 심지어 품바춤과 각설이타령까지도 설명하는 민중 미학 원리다.

다만 정역의 여율은 아직도 서경(書經) 이후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3천년 가부장제 중심의 율려 콤플렉스를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는 이 기가 막힌 개벽역(開闢易)의 치명적 한계 몇 가지를 통절하게 느끼고 그 보완책으로서 등탑역(燈塔易) 등탑팔괘(燈塔八卦)를 인식하였는데 그 연결 선상에서 그것들을 그가 새로운 지구문명사 창조를 남성신에 의한 남성 계승자인 간군자(艮君子)의 부자(父子) 혈통에서 찾고 있는 점에서부터 발견한다.

그렇다면 이제껏 우리가 여성성, 모성, 여성적 미륵의 주도에 의한 용화회상(龍華會相)이라는 참 화엄개벽을 논의하는 과정의 뜻은 어찌 살릴 것인가?
마고와 이리가라이를 화엄개벽과 함께 그 추진 주체인 모심, 몸 수련, 여성, 어린이, 구파와 마야와 변우동자와 쓸쓸한 선지식들과 창녀선지식의 문제와 적극적·능동적으로 연속시켜서 오고 있을 문명 이동의 대세를 주동적(主動的)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 ‘흰 그늘’ 즉 남과 북, 서쪽, 중앙아시아, 파미르와 화엄개벽의 새 활동적 지도, 이른바 화엄개벽 ‘로드맵’이 아닐까?
이 때가 화엄세계, 용화세계, 미륵회상이자 후천 2만년의 무량세계이며 정역이 그처럼 강조하고 있고 인류가 그처럼 고대하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온화한 춘분추분 중심의 사천 년 유리세계(琉璃世界)가 실현되는 것 아닐까?

조건은 개벽이다.
그리고 그 조건은 화엄선(華嚴禪), 철저히 몸 안에서(대뇌중심의 달마선(達磨禪) 훼손을 근심하지 말자! 미국 뇌 과학과 일본 분자생물학은 이미 전신두뇌설(全身頭腦說)을 공식화하는 단계이고 내가 공부하는 한에 있어 『화엄경』 전편과 심지어 세존말년의 십이연기법까지도 그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현대와 같은 ‘몸’의 시대에 이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한민족의 고전인 『천부경(天符經)』에서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돼 있다(人中天地一)’거나 삼일신고(三一神誥)에서 ‘신은 뇌에 내려와 있다(神降在爾腦)’했을 때 그 신, 그 뇌, 그 하늘과 땅의 기능이 실제로 살고 있는 자리는 대뇌와 회음을 다 포함하는 바로 인간의 ‘몸’그것이지 대뇌만이 아니라는 것이 현대과학과 『화엄경』의 저 수많은 ‘털구멍’이야기다.

그것은 은유일 뿐인가?
대뇌 안에도 털 구멍이 있는가?
‘대화엄을 모심’수련과 실천 자체가 곧 개벽이고 확충(擴充)에 의한 자기치유 행위이다.
모심의 몸 수련 과정에서 부위마다 단전마다 푸른 별과 붉은 꽃이 피는 이미지네이션은 미래의 대화엄개벽의 과학인 ‘오역(五易)’또는 ‘천부역(天符易)’과 함께 ‘회음의 생명학’, ‘흰 그늘의 미학’등에 의해 현실적 사태로 실증될 것으로 나는 믿는다. 우리의 몸은 신의 뇌 세포로 가득 찬 하늘의 별과 땅의 꽃들, 개벽과 화엄의 생명주체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것을 실현할 것인가?
나는 이미 그것을 누누이 말해왔다. 결론이다.
나는 최근 『화엄경』 공부를 하면서 중간 중간 ‘모심’에 관한 깊은 생각 중 문득 ‘『벽암록(碧巖錄)』’의 세 구절로부터 가슴의 명치, 무릎팍, 그리고 뒷통수를 호되게 호되게 얻어맞고 놀라 기절초풍을 한 적이 있다.

대당(大唐)의 큰 선사(禪師) 왈
‘화엄의 진리를 신과 스님들은 이미 터득해 높은 법좌에까지 오르는데 대당에서는 이제껏 법고조차 못 치고 있다.’
또 있다.
제92칙 세존승좌(世尊陞座)다.
‘법왕의 법은 세존이 자리에 오르기 전에, 문수가 백추를 치기 전에 이미 원만하였다.’

벽암록 84칙 유마묵연에 흠칫
연재 10회로 마감… 불교교단에
화엄개벽의 길 주제 결집 제안

‘버들가지 푸르고 진달래는 붉도다!’
그렇다.

나같은 서푼짜리 학동 훨씬 이전에 이미 대화엄과 후천개벽과 그 실천주체의 몸의 모심선(侍禪) 생각이 싹만 아니라 꽃까지 피고 있었던 것이다.
『화엄경』 도처에, 주역과 정역, 『천부경』과 삼일신고 도처에, 신약 구약에, 그리고 동학의 수운 해월의 도처 도처 도처에!

아아!
철저히 겸손하지 않으면 살아남질 못하겠구나!
생각은 깊어진다.
그러나 따라서 오만도 무럭무럭 자란다.
속으로 중얼중얼 한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것은 『유마경(維摩經)』이다. 문수사리의 번쇄한 진리를 유마의 단 한번의 침묵이 마치 만개의 우뢰처럼 순식간에 압도해버리지 않는가! 흐흐흐흐흐’
직후 『벽암록』을 열었다.
제84칙 유마묵연(維摩    然)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어째서 제목이 유마일묵(維摩一    )이 아닌 유마묵연(維摩    然)일까?
‘묵연’이란 말을 못하고 가만히 있다는 뜻인데…, 고개를 갸웃하다가 순간 나는 의자에서 미끄러지며 방바닥에 나 딩굴어 한동안 숨도 못쉬었다.
그리고는 할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아가리를 콱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 설두선사의 송(頌)이 붙는다.
‘안됐다. 늙은 유마!

황금빛 그 사자는 찾을 곳마저 없네!’
몽둥이다.
유마 앞에서의 문수의 법문은 다름 아닌 다음의 것.
‘어떤 것이 보살이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간 것입니까?(何等是菩薩不二法門)’
나는 결정했다.
일년 이상 연재하기로 했던 이 글 ‘화엄개벽의 길’을 총 10회(‘10’이 좋다. 『화엄경』이 몽땅 ‘10’이고 개벽역의 최고가 ‘十無極’이고 못생긴 중생인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씹’ 이니까!)로 끊고,
그렇다.

스님들과 불교학자들과 불교교단에 ‘화엄개벽의 길’을 주제로 한 몇 년간에 걸친 국내외의 대규모 결집을 제안하기로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내 나름으로 혼자서 그 공부를 계속하는 것을 동시에 결단한다. 마지막으로 더 한마디하라면 내 몸 안에서 한마디하겠다.
‘모시고!
비우고!
그리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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