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35. 법고(法鼓)

기자명 법보신문

1398년 대장경판 이운 모습 묘사에 첫 기록

 
조선시대 제작된 흥국사 사자형 법고대

“법고 소리를 들으면 마음에 일었던 잡상(雜想)을 잠재울 수 있다” 『법화경』「화성비유품」
“번뇌와 망상과 오욕의 마군(魔群)들을 쳐부수고자 설법의 대군을 몰고 나갈 때 진군을 독려하기 위해서 북을 친다” 『법화경』「서품」
법고(法鼓)는 이처럼 번뇌 망상을 떨쳐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롯이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법고를 일러 ‘법을 전하는 북’이라고 하기도 한다. 즉, 북소리를 빌어 부처님이 깨친 진리를 중생들에게 전해주려는 뜻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행정진을 독려하는 의미가 함께 깃들어 있다.

법고는 또 그 소리를 들음으로써 인간을 포함한 모든 축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만끽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사찰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법구(法具)다. 때문에 이 법고는 사찰의 주요 기능을 담당하는 법당의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주지 스님이 법석에 오르거나 아침·저녁 예불 시간을 비롯해 사찰의 주요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고 있다.

 
불국사 범영루 거북이 모양 법고대

고구려 안악고분에 북 첫 등장

그러나 이 법고를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사찰에서 법을 전하는 북이라 하여 법고(法鼓)라 부르고 있는 북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로 추측하고 있을 뿐, 그 유래를 알 수 있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은 지구촌 어디에서나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각 민족의 특징을 지니고 발달한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북이 사용됐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이 땅에서 북을 사용했다는 첫 자료는 고구려 안악 고분 벽화의 주악도에 보이는 입고(立鼓)와 행렬도에 보이는 담고(擔鼓)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부여의 영고(迎鼓)와 텔레비전 드라마에까지 등장하는 낙양의 자명고(自鳴鼓)가 있다.

이어 고려시대에는 당악과 아악이 유입되면서 장구, 교방고, 진고 등 여러 종류의 북이 궁중음악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문헌상에서는 예종 11년(1116) 송나라에서 들어온 대성아악에서 입고(立鼓)가 사용됐음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시대까지의 역사에서 법고에 대한 구체적 문헌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고가 존재했으며 사찰에서 사용됐음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그 단적인 예가 불교의식이다. 불교의식에서는 예로부터 법고가 사용됐고, 불교의식에서 사용하는 북은 단순히 의식을 진행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불교의 진리와 법을 선양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법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신라시대 이래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영산재를 비롯해 수륙재, 예수재 등 다양한 의식에서 반드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바로 법고다. 때문에 북은 불교의식에서 행해지는 의식무 가운데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의 반주 악기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의식무 중 바라춤의 실체가 처음 등장하는 자료는 682년 경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감은사 사리탑에서 발굴된 금동상여형 환희용약 사리기의 난간에 새겨진 ‘동북우주악천(東北隅奏樂天)’으로 이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바라의 모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외에도 신라시대에는 백고좌강회, 팔관회, 연등회 등 정형화된 대규모 불교의식이 행해진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 대규모 불교의식에서도 반드시 법고가 이용됐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불교의식은 정치적 상황 등의 외적 요인뿐만 아니라 선(禪)과 교(敎)가 상호 경쟁적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기복불교적 요소가 강하다는 이유로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했고, 이에 따라 점차 기반을 잃으면서 쇠락했다. 이에 따라 불교의식의 쇠락과 함께 법고의 활용도 점차 줄어들었다.

물론 고려시대에는 국교가 불교였던 만큼 연등을 비롯해 국가적 의식과 많은 종류의 불교의식이 성행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이를 자세히 알려줄 만한 기록이나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려 때 시중 벼슬을 하던 이혼이라는 사람이 영해에 귀양을 가 있을 때 바다에 떠 있는 나무를 건져 북을 만들었고, 이후 이 북 만드는 과정이 전해지면서 무고가 생겼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 성종과 순조와 헌종, 그리고 고종 말기까지 양성되었으며 이후 법고, 외고, 삼고, 오고 등으로 발전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법고와 관련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자료가 전무하다시피 한 것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만드는 사찰인 군기사(軍器寺)에 북을 만드는 장인인 고장(鼓匠)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문헌을 비롯해 곳곳에서 법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존재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관련한 기록에서부터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가 왕위에 오른지 7년(1398)째 되던 해 어느 날 용산강(지금의 한강)으로 행차해서 강화 선원사로부터 대장경판을 운반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실과 그 다음날의 풍경이 묘사돼 있다.

이때 기록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2000여 명의 군사로 하여금 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길 때 승려들이 독경을 하고 의식인 경함이운을 봉행하며 향로를 앞세우고 북을 치며 취타를 부는 의장대를 따라서 대장경 이운의식을 했다”는 내용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법고는 또 일본 약선사가 소장하고 있는 16세기 작 감로탱화를 비롯해 충남 보석사 감로탱화, 1728년에 그린 경남 하동 쌍계사 감로탱화, 1730년에 그려진 경남 고성 운흥사 감로탱화, 1892년 작 봉은사 감로탱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감로탱화에 등장하는 법고는 주로 스님들의 법고춤과 관련이 있으며 법고춤을 추는 스님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역동적이고 장엄하다. 그리고 신윤복의 그림 ‘법고’에서는 길거리에서 법고를 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법고는 불법을 널리 전해 중생의 번뇌를 물리치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그 북의 몸체 부분에는 용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고, 북채로 두드리는 부분의 가운데에는 만(卍)자를 태극모양으로 둥글게 그리거나 진언(眞言)을 적어 넣기도 한다.
따라서 법고는 예기(禮器)의 일종으로 여겨 아무렇게나 놓아두지 않고 법고대(法鼓臺)를 만들어 정중히 보관하고 있다.

 
대들보에 매달린 부석사 법고

신라 불교의식에서 사용 추정

법고대는 일반적으로 전체 하중을 받는 대좌와 북을 높이 올려놓는 간주(竿柱)로 구성돼 있다. 현재 조선시대 법고대가 몇 개 남아 있으며 이들은 대좌를 거북이 모양이나 사자 모양으로 조각해 놓기도 했다. 경주 불국사 범영루의 법고대(귀부형), 호암미술관 소장 법고대(사자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법고대(해치형), 흥국사 법고대(사자형) 등이 대표적이다.

불국사 범영루 법고대는 간주가 없는 귀부형 법고대로 완전한 거북이 형태로 돼 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따르면 범영루는 본래 수미범종각이라 해서 종을 달아놓은 종각이었으나, 현재는 법고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법고대는 안장의 한복판에 하엽형으로 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3단으로 된 간주를 만들어 붙였다. 상단은 연꽃봉오리고 중단은 북 모양으로 나타나 있으며 둘레에 소박한 칠보문이 새겨져 있다. 흥국사 법고는 현재 사자형 대좌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으나, 본래는 간주가 있어서 그 위에 올려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흥국사 법고대의 특징은 사자의 몸과 다리, 꼬리 부분을 별도로 조각해 조립했음에도 보기에 어색한 점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또한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법고대도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마리의 사자가 네발로 땅을 딛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포효하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좌대가 그 위에 얹혀져 있었을 법고의 소리가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하게 할 정도로 일품이다.

최고 쇠북은 865년 작 시공사금구

법고는 불법을 전하는 북의 역할 뿐만 아니라 민중의 삶을 달래고 승속을 연결하는 놀이문화로 전해지기도 했다. 정초에 새해의 안녕과 사찰의 궁핍한 경제를 극복하기 위해 펼쳐졌던 ‘법고놀이’가 바로 그것이다.
법고놀이는 새해가 시작되는 설날에 스님들이 동네의 집집을 방문해 염불로 새해의 안녕을 기원하고 법고를 두드리면서 사람들에게 승병이라고 부르는 떡을 나누어 먹게 함으로써 한해동안의 건강을 기원하던 놀이다. 당시 어린이들의 천연두를 곱게 만들어준다는 속설이 전해지기도 했던 이 놀이에서는 법고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법고놀이라고 불렸다. 법고놀이에 대해서는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와 김매순의 『열양세시기』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다.

법고는 소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 일반적이나 구리, 은, 금 등의 금속으로 만든 쇠북도 있다. 금속으로 만들어 금고(金鼓)라 불리는 쇠북은 또 다른 말로 금구(禁口), 반자(飯子)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집결하고자 하는 사람의 숫자에 따라 재료를 달리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 『현우경』 권 10에서는 “쉬라바스티에는 18억의 인구가 살았는데 동고(銅鼓)를 치면 8억이 모이고 은고(銀鼓)를 치면 14억이 모이며 금고(金鼓)를 치면 모든 사람이 다 모인다”는 기록이 있다. 현존하는 금고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시공사금구(時供寺禁口)’로 865년에 만들어졌다. 이 쇠북이 현재 전해지는 법고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호암 미술관 소장 사자형 법고대

그러나 법고는 불법의 진리를 전하는 북인 만큼, 만들어진 재료나 모양이 아니라 그 소리가 중요한 법이다. 때문에 『금광명최승왕경』「의공만원품」에서는 “법고 소리가 나무에 의지하고, 가죽에 의지하여 소리가 나지만 법고 소리는 과거에도 공(空)이고 미래에도 공이며 지금도 공이다. 왜냐하면 이 법고 소리는 나무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가죽과 북채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며 삼세(三世)에서 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 이것은 곧 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법고 소리를 설명하고 있다.
즉, 북소리가 곧 부처님의 소리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심정섭 기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