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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개벽의 길’연재 마친 김지하 시인

기자명 법보신문

중생이 법신불, 다양성 인정하는 게 곧 ‘화엄’
‘불교가 일체의 사상·문화 수용해 새 시대 맞는 대안 제시
‘화엄 즉 개벽’ 인식 우선…깊이 공부해 늦가을 다시 연재

 
김지하 시인은 『벽암록』을 보면서 무지함(?)을 깨달아 글을 마치게 됐다고 연재 중단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불교계가 화엄의 입장에서 다양한 사상·문화를 수용해 새로운 시대에 맞는 대안을 제시해 줄 것을 주문했다.

자칭 ‘나홀로 동학당’ 김지하 시인은 「법보신문」에 연재해온 ‘화엄개벽의 길’을 통해 인류문명의 중심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기존의 입장을 바탕으로 불교에서 새 문명의 중심사상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때 불교의 중심 사상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융합하는 『화엄경』이어야 하며,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동학을 실천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불교가 동학을 비롯해 개벽 사상을 갖춘 ‘남쪽’의 모든 사상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왔다. 그리고 불교계가 새 시대에 맞는 불교적 사상과 실천 지침을 내놓기 위해 안팎의 우수한 인력을 한 자리에 모아 대결집에 나설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화엄개벽의 길’로 가기 위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인지, 1년 6개월에 달하는 긴 여정을 통해 제시하겠다고 했던 그가 갑자기 “내가 너무 건방졌다”는 말과 함께 10회를 끝으로 연재 중단을 선언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이 글을 쓸 수 없도록 했을까. 일산 노루목에서 노겸(勞謙) 김지하 시인을 만나 속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연재해온 내용을 지켜본 독자들의 시각에 대한 시인의 생각도 들어봤다.


▷1년 6개월 연재 계획을 10회로 마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원고는 그냥 쓰는 게 아니라 공부하면서 선정에 들어가듯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써 왔습니다. 그래서 마음 안에서 글이 나가면서 그에 따라 마음의 움직임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원고를 다 쓰고 나면 꼭 『벽암록』을 보면서 반성을 합니다. 옛 선사들의 가르침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몇 번에 걸쳐 거듭 얻어터졌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생각했던 내용들을, 『벽암록』에 등장하는 선사들이 할과 방으로 마구 치는 겁니다. 마치 선사들이 직접 할을 하듯이 내가 맞았다 그 말입니다.


▷어떤 대목에서 그렇게 느꼈습니까.

평소 유마를 좋아했고 제일 좋아하는 경전도 『유마경』입니다. 그래서 문수보살이 차원 높은 이야기를 할 때 유마가 일묵, 즉 입을 딱 닫아버리는 내용을 보면서 그것을 선적으로 문수의 엄청나고 화려한 이론이 우레를 맞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때문에 그것을 근사하고 통쾌하게 생각해왔지요. 그런데 「법보신문」에 당취, 화엄선, 북방의 불함문화 등등에 대해 고승대덕에게 묻는다는 내용을 써 놓고 『벽암록』을 봤을 때, ‘유마묵연’이 보였습니다. 일묵은 자기가 입을 닫는 것인데, 묵연은 할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겁니다. 말의 뜻이 완전히 다르죠. 여기서 한 대 얻어맞았습니다. 보살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을 설명하는데, 나 역시 글을 쓰면서 그 문제를 갖고 이야기는 했으나 명확한 답변을 못했거든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불이법문에서 내가 말이 막힌겁니다. 그 뒤에 설두선사가 송을 달았는데, 유마가 말이 막히니까 “안됐다 유마야, 황금빛 사자도 이제 자취가 없구나” 그럽니다. 뭐 고소하다 그런 말이지요. 그걸 보고 나니까 한 대 얻어터진 거 같았어요. 그리고는 방바닥으로 미끄러졌지요. 정신적으로도 한 대 얻어맞았는데 몸도 미끄러졌어요. 그거 이상하더라고요. 그때 생각한 게 공(空)이었어요.
 
그리고 ‘이제 겨우 『화엄경』 공부하면서 쓰긴 뭘 써, 건방떨지 말고 이 정도 했으면 됐다’는 경책으로 생각했습니다. 재가자로서 그리고 동학당으로서 이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 고승대덕들에게 넘겨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끝내자는 생각을 한 겁니다. 또 그게 공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우는 거 말이죠.


▷화엄개벽의 길에 대한 글은 여기서 끝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공부는 계속할 것이니까, 늦가을쯤에 다시 도움말이 생각나면 그때 다시 쓰겠습니다. 대신 절 집에서는 『화엄경』이 중요하고 현대적인 대안이니까 해결책을 찾아야지요. 나는 그저 인류문명의 중심이 동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그 중심사상과 실천방안을 불교에서 내 놓아야 하지 않느냐는 뜻에서 스님들에게 물어보았던 것입니다. 더 공부해서 늦가을쯤 다시 쓴다고 해도 역시 해결은 절 집에서 결집을 통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독자들로부터 글 속에 불교의 공(空) 사상이 없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불교에서 자꾸 공(空)을 말해서 ‘공병’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내가 그걸 놓친 겁니다.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만 놓치는데 그건 일종의 버릇이에요. 4·19 학생운동 때부터 담론가, 그러니까 이론가 비슷하게 말을 하는데 말이 말을 낳게 됩니다. 안에서 생각을 해서 말이 나오는 게 아닌 그런 버릇이 남아 있습니다.


▷중도(中道)를 화엄개벽의 길에 결부시킬 수 있습니까.
화엄은 글자대로 하면 꽃으로 장엄한다는 뜻입니다. 그 뜻을 확장시키면 꽃이란 꽃은 다 피고 자기 주장을 가진 이론가란 이론가는 모두 다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인드라망에서 세계 그물의 그물코마다 보살들이 각기 일어나서 자기 나름의 우주관을 법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해 광장에서 촛불이 켜질 때 그 화엄을 연상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와 여성들이, 대중들이 누구의 명령을 들은 것도 아닌데 쌍방향 통행식으로 토론하고 거기서 자발적으로 큰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니 이게 화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그렇다면 중도와의 문제인데, 중도는 양극단의 사잇길로 가는 게 중도가 아니죠. 양극단을 버리는데 그렇다고 가운데도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참 중도는 전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개체들이 다 자기 의사를 펴는데 그 전체가 다 살아나는 것이 진짜 중도입니다. 이게 곧 화엄세계이며 진짜 민주주의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실체가 있습니까.

문명과 경제의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온다는 것인데, 경제학자들은 이미 5년 전부터 동남해와 서남해 이쪽을 가리켜 동노텔담이라고 부르면서 예견했던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여러 주요 나라의 경제중심지가 해체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대로 존재하는 다극체제가 형성되는 것이고, 여기서 중심이 결합된 네트워크가 새롭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또한 화엄입니다. 그래서 꼭 필요하다거나 당위 또는 의무 등의 차원이 아니라 미래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지구자전축의 이동, 그에 따른 기후변화도 명백한 증거입니다. 쓰나미나 북극이 녹고 적도에 눈이 내리는 현상들도 이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관, 세계관, 종교철학 이런 것들이 거기에 맞게 대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세계는 하나라는 주장은 파시슴을 불러들일 가능성이 높고, 반대로 세계는 제각각으로 생각하면 자칫 완전히 분열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물쩍 절충하는 것도 안되고, 각자대로 힘을 발휘하되 전체가 은연중에 서로 연결되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달이 천 개의 강물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비추되 본래의 모습은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후천개벽의 정황을 지속적으로 밝히셨는데, 시작을 언제로 보십니까.

올해가 후천개벽이 시작되는 해입니다. 기축년, 올해 7월 22일 윤초라고 해서 일식이 옵니다. 그리고 이후로 윤달이 없어지면서 하지와 동지 중심의 극도로 춥고 극도로 덥고 하던 날씨 대신 춘분과 추분 중심으로 서늘하고 온화한 소위 유리세계가 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화엄세상이고 용화세계이며 미륵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나타나는 증거는 아마도 희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맞춰 사람들의 삶도 달라질 것입니다. 정역에서 말하는 간태합덕, 삼팔동궁, 기위친정, 무위존공, 귀공, 존공 이러한 사상이 도처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또다시 도처에서 불교와 연결이 됩니다. 특히 화엄하고요.


▷화엄과 개벽의 결합을 정리하신다면.

『화엄경』이 뭡니까. 털구멍 하나에서도 부처님이 일어난다는 것인데 풀뿌리, 흙, 물방울 하나 하나에 부처님이 없겠습니까. 세계가 세계를 스스로 인식하는 체계가 『화엄경』입니다. 이렇게 인식한다는 것은 바로 부처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이야기는 자각한다는 것이고, 자각이 곧 해방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우주의 공동주체로 해방되는 게 화엄이며, 이게 곧 개벽입니다. 같은 이야기인데도 내가 개벽을 강조하는 것은 지구변동, 기후변화 등 이 시대 위기상황을 통해 다가오는 개벽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 시대가 저물지 않고 새 시대가 오는 법은 없습니다.


▷불교계에 결집을 제안했는데,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첫째는 내가 고승대덕이라고 부르는 분들과 절 집의 조실, 그러니까 어른 스님들이 필요를 절감해야 합니다. 화엄개벽의 필요성은 다 아는 이야기일 것이고, 화엄이 곧 개벽이고 개벽이 곧 화엄이라는 점을 생각해 줬으면 합니다. 꽃 안에 있는 부처가 열고 나오는 것, 이것이 개벽입니다. 그러니까 화엄이 곧 개벽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물질의 변화에 따라 보는 것이 개벽이고, 부처의 진리에 따라서 이야기하는 것이 화엄일 뿐입니다.

또한 변화에 적극적인 게 개벽론이고, 변화를 깨달음의 형태로 묘사하고 널리 크게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 게 화엄입니다. 내가 그동안 해온 이야기는 화엄과 개벽을 어떻게 실천적으로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모심’이라는 덕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동학주문 안에 온통 화엄경입니다. 동학수련을 몸으로 해 보면 주문 안에 전부 『화엄경』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절 집에 부탁하고 싶은 것은 ‘화엄경 수련을 몸으로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에 대한 답을 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머지는 스님들이 잘 알고 계실테니까 내가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 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벽암록』을 통해 자기반성을 한다고 하셨는데, 역시 동학과 화엄의 연관성을 염두에 둔 공부인가요.

『벽암록』에 운문선사와 관련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선승이 운문선사에게 ‘법신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즉 화엄사상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이지요. 이때 운문 스님이 ‘육불수(六不收)’라고 했습니다. 육은 동양에서 몸의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 이, 삼, 사, 오, 육에서 오는 오황극이라고 해서 인간과 하늘 사이의 통합, 즉 천자 같은 사람이 전세계를 통합한다는 것인데 육은 그것보다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중생도 한없이 많다는 말이고, 이것은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문선사는 여기서 ‘육불수’, 즉 여러 가지 다양성을 그대로 놔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양성을 인정하라는 것으로 중생이 법신불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스님들은 항상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법문을 듣는 사람들이 마음 가운데서 뭔가 부처가 일어나게끔 촉발시키려는 의지보다 가르치려고 하는 게 더 위에 있습니다. 건방진 이야기일까요.

『벽암록』을 보면 또 숙종 황제가 ‘당신이 죽은 뒤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고 묻자, 혜충국사가 ‘무봉탑(無縫塔)이나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이음새가 없는 탑, 그러니까 꾸미지 않은 탑을 말하는데 이게 또 화엄입니다. 결국은 『화엄경』에 알맞는 국가사회를 만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바로 무봉탑을 만들러 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 길에는 일원상과 법신불을 수양하는 남성 신도들 중심의 열렬한 수양이 있어야 하고, 여기에 더해서 보다 전진적으로 여성의 사회봉사, 즉 화엄개벽 실천으로서의 여성의 전위적 역할을 인정해야 합니다.


▷조계종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까.

지금 개벽시대에 화엄을 결집한다고 하면 현대과학은 물론이고 코란, 가톨릭, 성공회, 개신교, 심지어 사회주의, 자본주의, 아프리카 원시 신앙까지도 불교적 시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결집에 다 포함시켜야 하겠지요. 조계종이 중심이 되어서 다 불러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여러 방면의 외부전문가와 불교학자들을 초청해서 토론하는 모임이 이어져야 합니다. 답은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준비가 필요하겠지요. 그러자면 내부에서 합의도 있어야겠지요. 다만, 마냥 그대로 있으면 역할을 잃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이 창조적 진화론에 유념하고 있는데, 이게 화엄이나 동학과 흡사합니다. 불교가 부처의 관념의 세계를 객관적 세계로 드러내는 화엄결집을 하지 못하면, 세상은 불교에서 돌아설 것입니다.

일산=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법 보 에

내 마음과 같이 법보는 빛났더이다 내 마음과 똑같이

언덕 위의 꽃들은 여기 저기서 피었더이다

다만 잊히지 않는 것은 한가지 내 마음 깊은 곳 아직도 빈터가 모자람 아직도 덜 여물어 아직도 갈 길 아득 아득해

정신 아득하더이다

이제 날이 밝으면 신발대신 맨발로 참 공부 길 머언 구름과 물의 길 떠나려 하나이다

부디 토용까지 첫 서리까지

부심하옵소서

기축년 삼월 구일 화엄개벽의 길 연재를 끝내며 노루목에서 김지하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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