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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36. 진언·다라니

기자명 법보신문

668년 명랑이 행한 문두루비법 속 다라니

 
진언과 다라니는 밀교를 통해 전파되고 있다. 옴마니반메훔 육자진언 수행을 하고 있는 진각종에는 불상 대신 육자진언을 새겨놓고 있다.

지난 2000년 텔레비전 드라마 한편이 세간의 관심 속에 방영되면서 불교계 밀교 종단이 때아닌 홍역을 치러야 했다. KBS가 시청률 높은 주말에 편성한 ‘왕건’이 바로 문제의 드라마였다. 당시 드라마에서는 왕건에 앞서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의 활약상이 그려지고 있었다. 여기서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장면은 궁예가 혹세무민하는 장면마다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을 외웠고, 때문에 ‘옴마니반메훔’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일반 시청자들이 이 진언을 마치 사이비 종교의 주문쯤으로 오해 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했던 것이다.
 
이에 ‘옴마니반메훔’ 육자대명왕진언 염송을 수행법으로 삼고 있던 한국불교의 대표적 밀교 종단 진각종은 “진언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면서 즉각 반발하고, KBS에 항의공문을 보내는 등 진언의 의미를 제대로 알리는데 힘을 기울여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옴마니반메훔’은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을 말하는 것으로, ‘온 우주(om)에 충만해 있는 지혜(mani)와 자비(padme)가 지상의 모든 존재(hum)에게 그대로 실현되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진언이 현대사회에서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 배경이 씁쓸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이처럼 큰 뜻이 내포돼 있다. 또한 『반야심경』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나, 『천수경』의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등도 뜻과 관계없이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진언 중 하나다. 그렇다면 이 진언, 혹은 다라니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옴마니반메훔, 사이비로 오해도

진언은 산스크리트어 만트라(mantra)의 번역이며,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또 어원적으로 따져보면 ‘사념한다’는 뜻의 만(man)과 ‘그릇’의 뜻을 지닌 트라(tra)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어원에 의해 ‘신의 덕을 사념할 수 있다’든가 혹은 ‘사념을 표현하기 위한 그릇’, 즉 신성한 문자나 언어를 의미하고 있다.
진언과 같은 의미로 알려진 다라니는 산스크리트어 다라니(dharani)의 음역으로 총지(摠持)로 번역하고 있다. ‘정신을 통일하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진언과 다라니는 이렇게 구분되지만 일반적으로는 혼용되고 있다.

불교 교단이 형성된 초기에는 명주(明呪)와 비법(秘法)을 금지했다. 『사분율』에서는 “세속의 주술이나 비법을 행하면 바일제니라”라고 했고, 『소부(小部)』에서는 “세속의 명주 비법은 축생학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진언을 경계한 이유는 자신의 근본 자성을 버리고, 외부적인 신의 힘에 맹목적으로 의지하려는 태도를 갖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모든 주문을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부파불교시대 말엽 불교 내부에서 주문을 외우고 밀법을 행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나면서 수행자가 일신의 보호를 위해 도움이 되는 주법은 행해도 좋다고 예외적으로 승인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후에 민간비법과 바라문교의 주법과는 다른 불교 특유의 진언이 만들어지면서 밀교가 성립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진언은 대승경전에서 신주나 명주로 이름 붙여 전해졌으나, 7세기 들어 『대일경』과 『금강정경』의 성립을 바탕으로 발전한 밀교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파됐다. 또 밀교에서 입으로는 진언을 암송하고, 손으로는 다양한 수인을 짓고, 마음으로는 불보살들의 도상을 염상하는 수행법인 삼밀수행법이 중요시되면서 진언은 더욱 발전하고 널리 유통되었다.
인도나 중국의 옛 선지식들 역시 이러한 진언의 공덕을 설명하고 있다.

중관의 시조 용수보살은 『대품반야경』의 주석서 격인 「대지도론」에서 “여러 외도의 주술은 선업이 아니기 때문에 3악도에 떨어지고 즐겨 탐욕과 진애를 따라 마음대로 악을 행하게 된다. 그러나 반야바라밀다 주문은 능히 선정과 불도, 열반에 대한 여러 가지 집착을 소멸시키고 성불할 수 있게 해 주기에 무등등(無等等)의 주문이라고 일컫는다”며 진언을 통해 집착을 끊고 성불할 수 있음을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 7세기 고승 중국의 현장 스님은 다라니에 대해 “비밀스런 것이기 때문에 번역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다라니가 그러하다. 즉 경전 중에서 다라니는 부처의 비밀스런 말이며 미묘 심원하여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라니를 ‘부처님의 밀어’라고 표현하면서 깨달음의 세계와 연관시켜서 설명한 대목이 나타난다.
인도에서 발생해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해진 밀교는 초기에 한국불교에서 사상이나 교리적 측면보다 진언과 다라니의 염송과 의식을 통한 개인적 국가적 소망을 성취하는 방편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명랑 앞서 밀본도 주술 선보여

한국불교에서 진언과 밀교에 대한 기록은 신라시대에 와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백제에서도 진언과 다라니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일본의 「선광사연기(善光寺緣起)」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광사연기」에서는 백제에서 전해진 『청관음소복독해다라니주경』에서 “경전의 다라니를 지심으로 지송하면 그 공덕으로 아미타불이 사바세계에 내려와 중생의 병고를 없애준다고 설명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 연기에는 경전이 백제에 전해지게 된 이유 등이 함께 설명돼 있다. 또한 일본의 「북신묘견보살영응편」과 「일본서기」등에서도 백제의 다라니나 주력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나, 정작 우리 역사서나 문헌에서 확인할 길은 없다.

신라에서의 주력신앙, 즉 진언과 다라니 관련 기록은 『삼국유사』등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문헌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기록은 밀본 법사가 늙은 여우를 잡아 선덕여왕의 병을 낫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밀본과 관련한 기록은 주술을 통해 신이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치고 있다. 따라서 사실상 밀교경전과 의궤서 등을 바탕으로 한 차원 높은 진언수행을 전한 인물로 명랑이 꼽히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밀본 법사 후에 고승 명랑(明朗)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랑은 신라 선덕여왕 원년인 632년에 당나라에 유학했다가 정관 9년(635)에 귀국했다. 밀교를 전파하며 나라에서 고승으로 불렸던 명랑은 이후 문무왕 8년(668)에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려 할 때 문두루비법을 이용해 물리치면서 그 법을 널리 알렸다. 문두루(文豆婁)는 한자로 신인(神印)이라고 하며, 명랑이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후에는 이 이름을 따서 신인종이 성립되기도 한다.

여하튼 문두루는 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독송하면 국가의 재난을 물리치는 비법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명랑이 낭산 남쪽에 비단으로 사천왕사를 짓고 오방신상을 세운 뒤 유가 명승 12인과 함께 이 비법을 펼치자,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명랑이 전한 밀교는 다라니를 지송함으로써 나라를 지키려 했던 호국적 성격이 강했으며 이때 지송한 경전이 『관정경』,『금광명경』,『대방광십륜경』 등의 다라니경이었다. 이후로도 신라에 들어온 밀교는 항상 호국호법의 신으로서 국난타개에 앞장섰고, 이로 인해 신라인들은 밀교와 친숙해질 수 있었다.

명랑에 이어 진언과 다라니를 전한 인물은 총지종을 세운 혜통이다. 당나라 지통화상으로부터 밀교를 배운 혜통은 681년에 신문왕을 살해하려던 김흠돌의 난을 평정하고 그 공적으로 총지종을 창종할 수 있었다. 여기서 총지(摠持)는 집지(執持)의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곧 다라니를 뜻한다.
총지종은 경전과 다라니의 지송과 사경 그리고 기타 밀교의식을 통해 국가를 보호하거나 재앙을 없애고 질병을 치료하는 등의 현세적인 이익을 중시한 밀교종파로 『다라니집경』, 『불공견삭다라니경』, 『청정관세음보현다라니』, 『천안천비관세음보살다라니신주경』 등의 경전을 전파했다. 학자들은 총지종이 선무외 삼장이 저술한 『삼종실지파지옥의궤(三種悉地破地獄儀軌)』를 널리 전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이것은 곧 지금의 조계종을 비롯해 대부분의 불교종단에서 교본으로 삼고 있는 의궤집 『석문의범』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 땐 다라니 지송으로 호국

명랑과 혜통을 통해 신라시대 널리 알려지게 된 진언과 다라니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고려시대에는 문종 28년(1074) 7월에 동경 사천왕사에서 27일 동안 도량을 열었고, 예종 3년(1108)에 여진과 전쟁을 치를 때 국경 근처의 진정사에서 이 비법을 펼치기도 했다. 또 이듬해 4월에도 흥복사와 영명사, 금강사, 장경사에서 도량을 개설했었던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시대 밀교의식으로는 이같은 문두루도량 이외에도 인왕백고좌도량, 공작명왕도량, 무능승도량, 금광명도량, 소재도량, 대일왕도량, 공덕천도량, 관정도량, 만다라도량, 진언법석 등이 있었다. 그러나 교학이나 사상적 발전보다는 수행작법이 널리 전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음양오행으로 이해되고 있는 도선의 ‘사탑비보법(寺塔悲報法)’과 관련해서 그 연원과 근거가 밀교에서 시작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어 조선시대에는 밀교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해석에 차이가 있다. 조계종에서는 조선조에 밀교의 법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평가하는 반면, 밀교적 입장을 취하는 측에서는 이를 ‘선과 밀의 상호융섭’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능엄경』에서 진언만으로 독립된 「능엄주」가 각종 밀교의식에 원용된 것을 밀교와 선의 융합된 모습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또 숭유억불 상황에서도 왕실에 의해 많은 불교 문헌이 출간됐고, 그 가운데 밀교 경전이 다수 포함돼 있다. 조계종 불학연구소에서 발간한 수행입문서 『진언·다라니』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밀교 경전, 밀교 의궤문집 등 모두 70부의 밀교 경전과 진언다라니 문집들이 총 281회에 걸쳐 간행되기도 했다.

한편 근현대 들어서는 진각종 등 밀교 관련 신흥종단이 등장해 진언수행을 최상의 수행법으로 전하고 있다. 그리고 조계종에서는 성철 스님이 생전에 「능엄주」와 「아비라진언」을 권장한 이후에 이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을 중심으로 진언 수행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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