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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싸를 가다] 6. 탐욕의 덫에 걸린 라싸의 ‘혼돈’ [下]

기자명 법보신문

티베트 독립군 아들-딸, 중화인이 되다

영혼의 땅 라싸 사람들은 경전 속 보살처럼 수행을 했다. 조캉사원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이들은 무엇을 위해 절을 하는 것일까. 그들은 마음 속으로 오늘도, 내일도 달라이라마의 귀향을 발원하고 있을 것이다.

내 가족처럼
귀하게 돌보던 사람이
나를 철천지원수처럼
바라본다 하더라도,
병고에 시달리는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처럼
더욱 큰 사랑으로 대하는 게
보살의 수행이니라

자신과 비슷하거나
혹은 부족한 사람이
아만의 힘으로 무시하고
업신여긴다 하더라도,
형제와 부모로 여겨
겸손과 겸양의 마음으로
나의 정수리에 받드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니라 
 〈보살의 수행법 중에서〉

라싸 사람들의 모습이 꼭 그러했다. 티베트인들은 경전 속 보살처럼 수행을 하듯 중국인들을 대했고 조국과 달라이라마를 배신하고 중국의 앞잡이가 된 동포들도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삼독(三毒)을 씻어내는 진언을 널찍한 돌판에 혹은 오색 룽다에 혹은 산비탈 바위벽에 새겨 생(生)의 기운을 불어넣는 바람결에 실어 보냈다. 그들의 지극한 진언은 룽다의 오색인 백(白), 황(黃), 녹(綠), 청(靑), 적(赤)이 각각 의미하는 허공과 땅, 강, 하늘, 달라이라마가 되어 일체 중생을 감화시키고 일체 만물이 함께 호흡하는 이 공간을 정화할 것이다.
라싸에 오기 전 막연하게나마 기대했었다.

“적어도 포탈라궁과 노블링카, 조캉 사원의 성지만큼은 옛 모습 그대로의 것을 간직하기를 ….”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중국이 제멋대로 마구 개발해 놓은 라싸의 모습도 그러했지만 그 곳을 순례하는 매 순간이 마음을 조금씩 짓눌렀다. 그 어느 곳을 지나건 곳곳에서 맺은 인연 하나하나가 마지막일 것이라는 절박한 마음이 일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안들의 철저한 감시로 마음 놓고 사진도 찍을 수 없는 억압된 환경들은 라싸를 닫혀버린 공간으로 인식하도록 강요했다. 그래서인지 라싸 순례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무거운 짐만을 얹어놓았다. 중국의 식민적 수탈과 탄압에도 중국인들을 위해, 달라이라마의 귀향을 위해 포탈라궁에서 기도를 올리는 티베트인들과 대화를 나눌만한 짧은 시간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라싸 순례는 조급함을 더욱 옥죄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티베트인 남매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들 남매의 아버지는 1959년 3월 18일 칠흑같이 어두웠던 그날 밤, 인도로 망명을 떠나는 달라이라마를 호위했던 티베트의 저항군이었으니, 라싸 사람들의 진솔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마저 들게 했다. 그들의 아버지는 달라이라마의 탈출을 돕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질 만큼 달라이라마와 티베트에 충성스러운 군인이었다. 달라이라마가 무사히 라싸를 떠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노블링카 외곽을 온몸으로 지키다가 물밀듯 들이치는 중국군과 홍위병의 침공에 밀려 결국 노블링카 앞까지 쫓기다 붙잡혔다. 중국군의 포로가 된 후 이 티베트 군인이 겪어야 했던 극한의 고통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10만의 티베트인들이 가장 잔악스런 고문에 의해 죽어간 역사적 진실들을 통해 짐작이 가능하리라. 

중국에 순응하는 티베트인들

기대감이 컸던 탓일까, 실망도 컸다. 남매의 직업은 아버지의 달라이라마를 향한 충성심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오빠인 텐진(30, 가명)의 직업은 중국의 지시와 교육에 순종하는 관광가이드, 여동생인 돌마(27, 가명)는 라싸를 지키는 중국의 공안. 티베트인이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의 라싸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도록 강제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남매의 모습은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중국에 복속된 라싸에서 먹고 살기 위해, 적응하기 위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지 않느냐’며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의 아버지는 조국 티베트와 달라이라마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진 티베트의 용맹스런 군인이지 않았던가.

착잡했다. 그럼에도 그 속내를 알고 싶어 따로따로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과는 깊이 있는 대화가 불가능했으며 별로 건질 것도 없었다. 중국인이 다 되어버린 그들이 달라이라마나 티베트의 독립을 주제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당연한 결과겠지만, 소득이 하나 있다면 중국의 라싸에 철저히 순응하면서 살아가려는 티베트인 남매의 눈물겨운(?) 몸부림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텐진에게는 달라이라마와 티베트의 미래에 관한 질문을 직설적으로 던졌다. 텐진은 “이 곳에서 그런 질문은 하지 말라”며 외면했다. 퉁명스런 말투였다. 그 한 마디로 그와의 대화는 단절됐다. 2008년 3월 일어난 티베트인들의 유혈 독립 봉기에도 독립 봉기 50주년에 맞추어 일어날 또 다른 봉기를 감시하기 위해 라싸가 계엄 상황인데도 관광 가이드로 활동할 수 있는 티베트인, 그의 중국에 대한 충성심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돌마는 라싸 순례 마지막 날(2008년 11월 7일)에 오빠인 텐진과 함께 티베트 최고의 한약재인 동충하초(冬蟲夏草)를 관광객들에게 팔기 위해 라싸공항으로 나와 볼 수 있었다. 결혼을 해 딸 하나를 낳았다는 돌마의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전형적인 티베트인이었다. 라싸자치정부는 100g에 우리 돈으로 200만원이 넘는 고가의 동충하초를 관광 가이드에게 선불금을 받고 판 뒤 이를 관광객들에게 강매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동충하초를 관광객들에게 팔지 못할 때의 손해는 고스란히 관광 가이드의 몫으로 돌아온다. 티베트인 관광 가이드에게 절박한 상황을 만들어 동충하초를 강매하고 있는 것이다.

라싸의 한 티베트 어린이가 세라사원에 있는 마니차를 정성을 다해 돌리고 있다. 입에서는 ‘옴 마니 반메 훔’이란 진언이 흘러 나온다. 사진제공=한국식물사진가협회 정회원 심창현

텐진에게 ‘티베트 독립’에 관해 말을 걸었다가 실패했다는 점을 교훈삼아 돌마에게는 우선 가족 관계나 라싸 생활 등에 관한 가벼운 질문을 던져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런 연후에 “티베트인으로서 공안으로 일하면 이웃들이 싫어하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내 삶에 충실할 뿐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말하는 표정에 거짓은 없는 듯 했다. 그런 돌마의 대답에 용기를 내어 나의 직업은 한국의 불교전문 기자라고 밝힌 뒤, “달라이라마와 다섯 차례나 만나 직접 인터뷰를 했다”는 이력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곧이어 “달라이라마가 포탈라궁으로 돌아오리라고 믿느냐”고 물었다. 조심스럽게 표정을 살피면서 “티베트의 미래는 희망적이냐, 절망적이냐…”라며 말끝을 흐렸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그녀는 크게 놀라며 긴장했다. 그녀의 신분이 공안이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달라이라마를 정말 다섯 번이나 만났느냐, 정말이냐.”
놀란 얼굴로 질문을 던져오는 그녀에게 나는 호기를 놓칠세라 조금 전에 했던 질문을 재차 확인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는 고개만 가로 저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런 거 모른다.”

역시나 그러했다. 티베트인 돌마가 아닌 중화인(中華人) 돌마였다. 이젠 주권을 잃은 지 두 세대(60년)가 가까워지는 데도 모든 라싸 사람들이 그들 곁에 있지도 않은 ‘달라이라마’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리라고 믿는 것은 분명 무모한 맹신이다. 그런데도 이런 라싸의 불가피한 변화는 티베트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아프고 아리게 한다. 티베트 밖 사람들의 그러한 마음은 이기적인 욕심이지만 티베트만큼은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절절함의 반어적인 심정이기도 하다.

라싸는 지금 중국이 뿌려놓은 삼독의 씨앗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 씨앗이 점점 자라 이젠 티베트 고유의 정신문화와 삶의 운영원리를 병들게 하면서 큰 혼돈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그런 혼돈의 가장 큰 흔적은 그들이 대대손손 이어온 공동체가 빠르게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부상조와 물물교환이란 원초적인 운영원리를 근간으로 살아온 생의 공동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를 입증하는 현상이 바로 예전엔 없었던 거지의 출현이다. ‘돈’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티베트 사람들은 이웃이 굶으면 음식을 서로 나누어 어려운 이웃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경제 개념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돈과 물질이 속속들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면서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커졌으며 그로 인해 아름다운 미풍양속들은 퇴색해 가고 있다. 구걸을 하는 어린 아이와 어른들의 모습은, 특히 라싸의 구시가지에 위치한 고찰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빈부의 격차 커지면서 ‘거지’ 출현

전성기 때는 7000여명의 스님들이 공부했다는 세라사원의 입구에서도 티베트인 거지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야크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간직한 이 어린이의 행동을 찬찬히 지켜보기로 했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던지 그 아이는 법당 안까지 따라왔으며 내가 티베트어를 모르는 것을 아는지 무작정 손을 내밀었다. 얼굴엔 고통스런 현실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지만 늘 밝은 미소만은 잃지 않았다. 외면만 하기가 그래서 눈짓으로 법당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돈을 주워 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입가에 미소를 짓게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어린아이가 돈을 얼른 줍더니 주위에 있는 불단에 얹어 놓는 게 아닌가. 다른 나라의 거지들과는 확연히 다른 행동, 조금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 아이는 다시 내 곁으로 왔다. 여전히 손을 내미는 아이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니 대답이 명쾌하다. 머리를 가로저을 뿐이다. 내 돈이 아니고 부처님께 공양 올린 돈이니 가질 수 없다는 대답인 듯 했다. 기쁜 마음으로 중국 돈 10원을 주니 ‘따시뗄레’(티베트어로 ‘안녕하세요’ 혹은 ‘행운을 빕니다’)라고 인사를 하며 날아갈 듯 법당 밖으로 나갔다.

이제 라싸 순례는 티베트 불교의 1000년 정신을 고스란히 봉안해 놓은 포탈라궁과 노블링카, 3대 고찰들을 순례하는 일정들을 남겨 두고 있다. 앞으로 티베트의 어떠 한 모습들을 더 볼 수 있을까 궁금하다.
티베트의 미래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들의 미래는 희망인가, 절망인가? 달라이라마는 포탈라궁에서 다시 법문을 할 수 있을까? 절망 속에서도 티베트 불교의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머릿속은 질문들로 가득하다. 어쩌면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조금 전 세라사원의 법당에서 만난 거지 아이의 해맑은 눈망울에서 이미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라싸=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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