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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37. 파계승(破戒僧)

기자명 법보신문

설총 낳은 후 속죄의 삶 살아간 소성거사

 
설총 낳고 무애행 보였던 원효.(맨왼쪽)길위의 큰 스님으로 불렸던 경허 스님. (가운데) 탈춤놀이에서 연기자들이 쓰는 파계승탈의 한 모습.(오른쪽)

승려 출신 소설가 김성동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만다라』를 극화한 드라마에서는 한 스님이 거나하게 술이 취한 채 손으로 술상을 두드리면서 “월백설백천지백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고, 선술집의 작부는 이 생경한 스님의 모습을 묘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세간에서 고기 먹고 술 마시는 스님을 일러 말하는 파계승(破戒僧)의 대표적 모습이 이러할 것이다.

파계승은 말 그대로 불법의 계율을 깨트린 스님을 말한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고 어육을 마다하지 않을 뿐만아니라 여색을 탐하기도 하는, 즉 지켜야 할 계율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일을 즐겨하는 스님들을 부르는 말이며 이를 무참괴승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선지식이 머물면 청정도량이요, 무참괴승이 머물면 이내 여염의 별채가 되고 만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경전에서는 “한 비구를 파계시켜도 삼아승지겁동안 아비지옥에 떨어진다”며 승가의 파계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는 파계승은 글자 그대로의 파계승과는 다르다. 역사에서 그저 그런 파계승을 다루고 기록으로 남겼을 이유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역사서에 전해지는 파계승은 현 시대에서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지식들이 대부분이다.

개혁추진 신돈도 주색에 빠져

중국의 고승 구마라집 역시 그런 인물 중 하나다. 구마라집은 그의 나라 구차국을 중국 진나라가 점령했을 때 진나라 장군 여광에게 포로로 잡혔다. 당시 나이 서른 다섯의 젊은 비구 구마라집은 위대한 수행자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를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여 구차국 백성들의 동요를 막으려 했으나, 여러 차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구마라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이때 여광이 생각해 낸 비책이 바로 구마라집의 파계였다. 지계(持戒)를 목숨처럼 생각했던 수행자에게 파계는 곧 사형선고와도 같다는 점에 착안한 여광은 한 여인을 구마라집의 숙소로 들여보냈다. 그 여인에게 구마라집과 통정하지 못할 경우 죽게 될 것이라는 협박을 했음은 물론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구마라집은 여인의 목숨을 가엾이 여겨 결국 여인과 정을 통하게 되고, 그로 인해 계를 파하게 된 것이다. ‘억울한 파계승’ 구마라집은 이후 진나라 수도 장안으로 옮겨와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한역하면서 65세까지 무려 2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경전 저술과 번역을 했다. 위대한 학승으로만 알려져 있던 구마라집에게는 이처럼 어쩔 수 없이 파계할 수밖에 없었던 슬픈 과거사가 있었다.
한국불교사에서 등장하는 최초의 파계승은 다름 아닌 원효다.

원효는 무덤에서 해골 물을 마시면서 마음의 이치를 깨달은 이후 신라로 돌아와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지어 어린아이들이 부르고 다니게 했다. “누가 손잡이 빠진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아 내리라”는 뜻이 담긴 이 노래를 들은 무열왕은 원효가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인재를 낳고자 하는 뜻으로 이해하고 그를 요석공주가 머무는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원효는 그곳에서 요석공주와 통정해 설총을 낳았으니, 곧 스스로 파계의 길에 들어선 셈이 되었다.

원효는 이후 속복으로 갈아입고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했으며, 아랫것 중의 아래라는 뜻으로 복성거사(卜姓居士)로 부르기도 했다. 원효는 요석궁을 나와서는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나리라)’에서 따온 무애가를 부르며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다. 원효는 가무와 잡담 속에 불법을 불어넣었고, 이로 인해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요석공주와 결혼생활을 하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살았던 원효의 행각은 분명 파계승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현존하는 20부 22권의 저술을 비롯해 모두 100여부 240여권의 저술을 남겼고, 그 방대한 저술 속에는 일심과 화쟁 그리고 무애의 사상을 담아 놓았다. 때문에 그 가치는 외국에서 먼저 알아보고 인정하게 됐으며 지금도 서양인들이 한국의 저술 중 가장 많이 번역하고 참고하는 사상서가 되었다. 그의 삶과 사상이 세간을 변화시키고 후세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지금도 그를 일러 성사(聖師)라 하며 추앙하고 있으니, 이 원효를 누가 감히 한낱 ‘파계승’으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역사 속 파계승에 대한 기록은 그리 흔치 않다. 이는 그만큼 계를 파하면서 위대한 인물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역설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 고려 신돈 역시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파계승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가 사찰의 노비였던 신돈은 1358년 공민왕의 측근 김원명의 소개로 왕을 만나면서 궁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권문세가들로부터 ‘나라를 어지럽히는 중’이라는 비난을 받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으면서 자취를 감춰 머리를 기르고 유랑걸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1364년 다시 공민왕을 찾았을 때, 왕은 그에게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호를 주고 사부로 삼아 국정을 자문하게 했다.

술 안마시고 ‘곡차’만 마신 진묵

신돈은 왕으로부터 ‘사는 나를 구하고, 나는 사를 구하리라’는 다짐을 받고는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신돈은 권문세가의 거센 저항과 모략에도 불구하고 왕권을 위임받다시피 한 절대권력을 배경으로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고 마침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고려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부터는 불사항전의 저항을 불러왔고, 백성들로부터는 성인이 나타났다는 찬양을 받으며 문수의 후신으로까지 불렸다.

그러나 신돈은 그때까지 승려의 신분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성 추문을 일으켰다. 결국 처를 두고 첩까지 거느리면서 자식을 낳았다. 뿐만아니라 주색에 빠지면서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결국 신돈은 후대의 호사가들에 의해 파계승의 멍에를 쓰기는 했으나, 민생안정을 도모하면서 추진한 개혁은 대중들로부터 삶의 희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늘날 전해지는 지역별 탈춤놀이에는 파계승의 행각을 풍자한 내용이 담겨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명종 때의 이적승 진묵이 대표적인 파계승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해 조선 중기를 살았던 진묵은 백양사 8개 암자 중에 운문암에서 차를 끓이는 소임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백양사 대중 전체는 물론 산밑 마을의 신도들까지도 똑같은 내용의 현몽을 하게 된다. ‘차 끓이는 중을 조사로 모시라’는 계시와도 같은 현몽이었다는 것. 이로 인해 진묵 스님이 조사로 모셔졌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진묵은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 가지 분명하게 전하는 사실이 어려서부터 술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찌감치 파계를 한 셈이다.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고, ‘곡차’라고 하면 마셨다는 진묵의 술 사랑은 그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자리로다. 산을 베개로 하고 달을 촛불로 삼아, 바닷물을 곡차로 만들어 실컷 마시자. 한잔 두 잔 들이키며 세상사 모두 좋네. 크게 취해 일어나서 춤을 추니 아뿔사 기나긴 소매, 곤륜산에 걸릴까.”라는 시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근현대 들어서는 경허 스님이 ‘위대한 파계승’ 반열에 오른다.

원효가 신라불교의 새벽을 열었다면 경허는 서산대사 이래로 주춤하던 근대불교에서 선종을 중흥시킨 대선사다. 그로 인해 불교중흥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제2의 원효 또는 길 위의 큰스님으로 불릴 만큼 걸림 없는 무애행을 보였다. 1886년 보임공부를 끝내고는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에 나섰다. 곡차를 벗으로 삼은 경허는 고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담배도 피우고 여자도 가까이 했다. 그리고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기도 했고, 여인을 희롱해 몰매를 맞기도 했다. 심지어 만취상태로 법당에 오르기도 했다.

경허는 이후 머리를 기르고 박난주라고 이름까지 개명한 후에 서당에서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 ‘마음 달 외로이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구나.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 한국불교의 선풍을 되살리면서 선종을 중흥시킨 대선사로 추앙 받았던 그의 파계행적과 관련해 제자인 한암 스님은 ‘화상의 법화는 배우되, 화상의 행리는 배우는 것이 불가하리니…’라고 했다. 크게 깨닫지도 못한 채 경허 스님의 무애행을 흉내내면서 깨달은 체 하는 승려들의 파계행을 경책하는 말이다.

만취상태로 법상에 올랐던 경허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파계승들 이외에 진짜 말 그대로의 파계승들이 시시때때로 존재해 왔음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설화 속 꿈으로 전해지기는 하나 신라시대 세규사의 승려가 고을 태수의 딸을 흠모해 여인을 취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내용이 있고, 조선시대는 실제 현감의 부인과 정분이 나서 파계한 승려가 쫓겨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사설시조에는 부패한 불교와 파계승을 비판하는 내용이 적지 않게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파계승의 결정판은 탈춤에서 나타난다.

여러 지방에서 각자의 지역적 특성을 갖고 전해지는 탈놀이에 등장하는 공통된 내용은 파계승의 행각과 양반 계급에 대한 모욕 그리고 서민생활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성오광대놀이, 강령탈춤, 가산오광대, 진주오광대, 봉산탈춤 등에 파계승이 등장한다. 또 조선시대 춘화에도 일부 등장하고 있어 파계승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원효 스님을 비롯해 중국의 구마라집이나 조선시대 진묵선사, 근대 경허선사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고기를 먹거나 먹지 않는 것으로 불심의 깊이를 재고, 술을 마시거나 마시지 않는 것으로 수행의 정도를 헤아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위대한 파계승’들에게는 파계를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로 생각했던 지계정신이 오롯이 살아 있었다. 따라서 불교계는 어설픈 무애행 흉내내기가 성행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보면서 “무계(無戒)의 시대”라는 비판이 세간에 유행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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