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묵 스님의 풍경소리]

기자명 법보신문

때로는 용서가 더 큰 경책이 될 수 있어
상대 허물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 삼기를

오늘 낮, 종무소로 큼직한 걸망을 둘러매고 설핏한 몸가짐으로 강원 치문반에 방부를 들이고자 찾아온 학인 스님을 보자니, 부럽기도 하고 그 시절이 생각이 난다. 계를 받고 그저 포교에 나서고 싶다하였지만, 강원에 들어가 중물을 들인 후 해도 늦지 않다며 등을 떠미는 은사 스님 덕분에 걸망을 꾸려 송광사로 내려갔다. 행자교육원 시절 교수사로 강의를 해주신 지운 스님이 크게 인상에 남아 송광사를 택했다.

방부를 드리고자 가보니 수계 도반들이 이미 여럿 와서 공부를 시작한 상태였다. 얼마 후 하안거가 시작된 날 오후 습의 시간이었다. 사집반 스님들이 “아랫반들은 무릎을 꿇고 앉으라” 하자 이 일을 문제 삼아 치문 상반 스님 몇이 선방에 간다고 걸망을 메고 떠나 버렸다. 이에 강원은 열대여섯 명이 대중을 이루어 하안거를 시작했다.
하안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몇 명의 스님이 떠나고 방학이 되자 어느 날엔 상반 스님 한 분과 달랑 둘만 남게 된 적도 있었다. 일 년 후 지운 스님께서 미얀마에서 돌아와 강주를 맡으신 후 점차 학인이 늘고 틀이 잡혀 대교반 시절엔 삼보 사찰 위상에 걸 맞는 강원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강원 시절은 그저 단출하게 몇 명이 모여 살던 그 해 그 하안거였다.

하안거가 시작된 후 보름이 좀 지나서였던 것 같다. 방장 스님 이하 대중 스님들이 모두 참석한 아침공양 시간에 너무나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송광사는 늘 아침공양으로 죽 공양을 했다. 그래서 행익을 할 때에 죽이 나가고 이어 밥이 뒤따르는데, 그 날은 죽을 돌리게 됐다. 아직 신참이고 어른 스님들 앞이라 약간 경황이 없고 서두르다보니 코너에서 잘못 돌아서는 바람에 바로 뒤따라오며 밥을 행익하던 스님과 부딪히게 되었다. 순간 죽통을 잡은 손을 놓치게 되었고 통이 떨어져 누우며 방바닥으로 흰죽이 쏟아졌다. 정말 눈앞이 까매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대중 스님들은 미동도 없었고, 그저 방장 스님 시자를 보던 도반 스님이 나와 바닥에 쏟아진 죽을 통에 쓸어 담아 줄 뿐이었다. 공양 말미에 어른 스님의 매서운 경책이 있지 않을까 가슴 조였지만 아무 일도 없던 듯이 아침 공양이 끝났다. 그날 낮에도 어느 누구 그 일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강원에서 제일 무서운 시간은 취침 전 자자시간이기에 그 때에 찰중 스님으로부터 엄한 질책과 참회가 내려지려나보다 하고 하루를 보냈다.

드디어 자자 시간이 되고 찰중 스님이 할 말 있는 사람 말하라고 했다. 속으로 내가 참으로 큰 잘못을 했으니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아야지 하면서 손을 들고 대중 앞에 “오늘 공양 시간 일을 참회 드리며 처벌을 달게 받겠다”고 했다. 그 때 찰중 스님이 “본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있고 다 아는 잘못이니 참회는 끝났고 굳이 처벌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넘기셨다. 나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경책이었고 가장 무서운 경책이었다.

내가 그 때 소임자였다면 그 사항을 어찌 처리했을까. 아마도 날선 목소리로 시주물에 담긴 은덕을 들먹이며 수행자가 되어 매 순간 정신을 똑바로 챙기지 못해서 어찌하겠느냐 등으로 야단을 치고 강도 높은 참회를 내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연히 그런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그 찰중 스님의 조용한 경책은 참으로 내 마음의 틀을 부수는 금강저였다. 그 날부터 근 한 달 이상 삼경 후에 도반과 함께 사자루에 가서 참회와 감사의 기도를 하였다. 덕행이 부족함을 참회하였고 이런 불문에 들어섬을 감사하였다.

요즘은 시절이 참 각박해진 탓인지 남의 잘못을 보면 시퍼렇게 날을 세워 질책하고 몰아치면서 여유를 두지 않는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는 이들을 보면 안타까움이 많다. 많이 힘들고 부대키는 이 시절 서로의 잘못에 대하여 끄집어내 날을 세우기보다는 서로를 감싸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돌이켜보게 보게 하는 거울이 되어줌이 좋을 듯하다.

정묵 스님 통도사 포교국장 manibo@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