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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의 여운깊은 책읽기] 늙은 아버지의 홀로서기

기자명 법보신문

『아버지의 부엌』/사하이 게이죠 지음/엄은옥 옮김/지향

지진, 천둥, 화재, 아버지.
이 네 가지는 일본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들어간 것이 묘합니다. 그만큼 일본의 아버지는 가족들과 정을 나누는 구성원이기 보다는 권위로써 군림하고 명령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구시대의 상징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아버지는 늙어서도 그 권위를 벗지 못하지만 가족들과 살갑게 어울리지 못해도 문제될 게 없으니 평생 소리 없이 그 간극을 메워가며 내조를 해온 아내가 있는 덕분입니다.

그렇지만 아내가 홀연히 세상을 먼저 떠나면 그야말로 큰일이 벌어집니다. 자식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고, 제 손으로 밥상을 차려본 적이 없는 늙어버린 아버지는 이제 자식들에게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할 지경에 놓였습니다.

전형적인 일본 아버지인 주인공은 딸 넷에 아들 하나를 두었지만, 여든이 넘어서 아내와 사별하고 외톨이가 되어버린 그에게 다섯이나 되는 자식 중 어느 누구도 “저희랑 같이 살아요”하며 나서지 않습니다. 서로의 형편을 잘 아는 이상 그저 누군가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눈치 보는 가운데 아버지는 굳게 결심하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지난 엿새 동안 난 생각했어. 잘 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선 1년 동안 이 집에서 혼자 살아볼게. 내가 만일 쓰러지면 너희들한테 신세 질게. 그때는 잘 부탁한다.”
그리하여 독신인 셋째 딸은 적극적으로 아버지의 홀로서기를 지원합니다. 아버지가 아침에 일어나시면 해야 할 일과, 저녁 잠들기 직전에 반드시 하셔야 할 집안일들을 꼼꼼하게 번호를 매겨가며 정리해서 집안 곳곳에 붙여둡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홀로 계실 때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실지 걱정스러워 제안을 합니다. 편지와 일기를 써서 교환하기로 말이지요. 딸의 잔소리가 너무 지독해서 ‘마귀할멈’이라며 늙은 아버지는 소리쳤고, 독신의 딸은 ‘왜 이런 일도 못하시냐’라며 격하게 싸우기도 하지만 이내 편지와 일기를 교환하면서 서로 속마음을 터놓습니다.

아버지의 홀로서기를 꼼꼼하게 기록한 책을 읽는 내내 내 시선을 붙잡은 단어는 ‘외롭다’라는 아버지의 심경이었습니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는 아버지는 당장에라도 아무 자식하고 함께 살고 싶어 하지만 딸은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의 홀로서기를 격려합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명예 퇴직하여 가정에 안주해버린 남편을 가리켜 영택이(영감탱이)라고 부르거나, 그런 남편이 하루에 몇 끼를 찾아 먹느냐에 따라 일식(一食)씨, 이식(二食)군, 삼식(三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지요.

평생 남편 수발드느라 얼마나 지쳤으면 그런 호칭을 붙일까 싶어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청춘을 늙혀버린 한 ‘인간 존재’에게 그건 좀 아니다 싶습니다. 우리들의 아버지시여, 이럴수록 힘없는 자신을 탓하며 움츠리지 말고 책 속의 아버지처럼 홀로서기를 연습하면서 늙은 자신과 친해지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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