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령의 여운깊은 책읽기] 3년 8개월 그리고 20일
[이미령의 여운깊은 책읽기] 3년 8개월 그리고 20일
  • 법보신문
  • 승인 2009.03.31 11: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폴 포트 평전』/ 필립 쇼트 지음 / 이혜선 옮김 / 실천문학사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접수한 크메르 루즈의 뒤에는 폴 포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산혁명을 완수한 캄보디아 내에서 폴 포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채 2백 명도 되지 않았고, 그 2백 명의 사람들도 그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지독하게도 익명과 비밀을 좋아하였고, 사람들이 그런 자신을 몰라보는 것을 즐긴, 참으로 기묘한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필립 쇼트는 폴 포트를 중국에서 딱 한번 가까이 본 적이 있는데 그의 매력과 카리스마, 그리고 초연한 모습에 무척 끌렸으며, 해탈한 승려처럼 보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토록 두꺼운 <폴포트평전>을 펼친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그건 바로, 불살생과 자비와 지혜를 모토로 하는 불교를 받아들인 국가에서 어쩌면 그토록 잔인하기 짝이 없는 대학살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책에서는 불교와 관련한 용어나 표현들이 툭툭 터져 나옵니다. 폴 포트는 어린 시절 사찰에서 사미승 기간을 보낸 불교신자였습니다. 그는 ‘나(我)’와 ‘나의 것(我所)’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탐욕을 없애고 해탈의 경지에 들 수 있다는 경전의 내용을 고스란히 차용하여, 숭고한 ‘깨달음’을 이루려면 재산이나 가족과 같은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선전하였습니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완수를 가리키며, 사유재산과 가족을 허문 자들이 모인 공동체 이름은 팔리어에서 가져온 ‘앙카르(집단)’였습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크메르 루주의 간부들은 수행자들이 일정한 날에 참회를 하듯이 자아비판을 하였고, 만트라를 외는 것과 똑같은 어조로 아침마다 라디오를 통해 자기들의 이념을 반복하여 들려주었으며, 폴 포트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할 때에 고승의 소유물인 부채를 들고 나왔고, 덕 높은 스님들이 낮은 목소리로 법문을 하듯이 연설을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킬링필드의 비극을 폴 포트만의 책임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전의 지도자였던 시아누크의 야욕과 그 아래에서 재주껏 배를 불린 자들에게 일차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고, 베트남의 공산세력과 그를 부추긴 중국, 그리고 수시로 얼굴을 바꿔가면서 캄보디아의 비극을 부채질하였던 미국, 소련도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나서기를 싫어하면서, 평소에는 조용하고 온화하기 이를 데 없다가도 순식간에 잔인하게 돌변하는 캄보디아 사람들의 성품과 미신도 일조를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불교가 어떤 자에게는 이렇듯 잘못 해석되어 잔인하게 써먹힐 수도 있다는 사실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울 뿐입니다.
3년 8개월 그리고 20일.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씩은 죽어나갔고, 남은 자들은 모조리 노예와 거지가 되었으며, 한 나라가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는 데 소요된 세월치고는 참 짧은 시간입니다.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