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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생각 대신 실천할 때 수행은 세상과 통한다

이렇게 모두 한자리에 모여 법을 나눌 수 있어 무척이나 기쁩니다. 여러분들로부터 ‘현대인의 삶과 선’이라는 제목으로 법문을 요청 받았을 때, 저의 스승이신 숭산 대선사께서라면 법문을 어떻게 하셨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숭산 스님께서 하시던 방법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법상을 한번 치고) 이 지점은 모양이 공이고 공이 모양입니다. 이 세상은 너무도 무상합니다. 그래서 이 순간을 우리는 이분법적인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이분법적인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것에 젖어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은 강이고 강은 산입니다.

(다시 법상을 치고) 이 지점은 모양도 없고 공함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정적이고 모든 것이 없는 공한 상태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이 점으로부터 시작되어 공함이 계속돼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절대 세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때에는 이분법적인 생각이 사라지고 없는 세상입니다. 이 순간을 우리는 입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모양도 없고 공함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이 순간을 공하고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 역시 실수입니다. 이것은 모양도 없고 공함도 없을 뿐입니다. 산도 없고 강도 없습니다.

집착하지 않을 때 본성 드러나

(다시 법상을 치고) 이 지점은 모양은 모양이고 공함은 공한 지점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생각에도, 공함에도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본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것입니다. 모양도 완전한 것이고 공함도 완전한 것입니다. 하늘도 완전하고 땅도 완전합니다.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다 완벽한 것입니다. 생명도, 죽음도 완전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완전한 세계라 부릅니다. 진리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각이나 공,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본성이라고 하는 이것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냄새 맡고 만지는 모든 것이 분명하다면 모든 것이 분명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나무는 푸르고, 개는 멍멍 짖습니다. 설탕은 달고 모든 것은 그 나름대로 완벽하며 진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완벽한 세상, 혹은 진리의 세상이라고 부릅니다. 모양은 모양이고 공함은 공함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세 가지 상태의 세 가지 세계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모양이 공이고 공이 모양인 것, 산이 강이고 강이 산인 것, 이것은 이분법적인 세상입니다. 모양도 없고 공도 없는 세상, 산도 없고 물도 없는 세상, 이것은 완벽한 세계입니다. 모양은 모양이고 공함은 공함인 것,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세계. 이것은 완전한 세계이고 진리의 세계입니다. 이처럼 세 개의 세상으로 구분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바른 세상일까요. (할) 산은 높고 물은 흐르고 있습니다.

수행은 이분법적 세상에서의 탈출

이것이 끝입니다. 이것이 법문의 요지이고 끝입니다. 하지만 네 개의 세상이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이분법적인 세상, 완벽한 세상, 완전한 진리의 세상, 마지막은 순간의 세상입니다. 이것은 적용 혹은 실천의 세계를 말합니다. 산은 높은 것이 그것의 할 일이고 물은 흐르는 것이 그것의 할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수행이 이 네 개의 세상에 대해서 바르게 인지하고 그것을 수행한다면 여러분은 바르게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수행은 이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당나라와 송나라에 걸쳐 참선이 얼마나 부흥했는지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참선의 방식이 매우 복잡하고 지적인 부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명나라 시대에 와서 그것은 하나의 지적인 게임으로 전락했습니다. 매우 영리한 법문들이 많았습니다. 그 법문들과 여러 가지 참선에 대한 공안들이 내적으로는 굉장히 수준이 높았지만 이 세상과는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있었던 다섯 개의 참선 종파는 모두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남아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참선하는 방법과 그것에 대한 기록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우리 생활에 연결돼 있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산 속에 사는 스님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산은 산이라고 하고 물은 물이라고 하면 기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푸르다’는 말은 매우 근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우리 일상생활과 어떻게 연결돼 있을까요.

한 아기가 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아기에게 ‘아기는 아기고 엄마는 엄마다’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뼈를 부수고 어서 몸 밖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시겠어요? 그러한 말은 생각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일 뿐입니다. 이런 말들을 여러분이 매일 맞닥뜨리는 일상과 어떻게 연관 지을 수 있을까요. 이분법적인 세상에 머물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좋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다 공하다’고 아기에게 말하지도 마세요. 아기가 우는데 ‘아기는 아기고 엄마는 엄마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순간 그런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분명히 나타나고 그것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아기를 향해 배고프냐고 묻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바른길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식 속에 얽매여 있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아기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바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선수행이라는 것은 결국 이런 이분법적인 세상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와 진정으로 소통하는 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음식이 있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에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여러분이 베풀 수 있는 여러 보시에 대해 말씀하시며 ‘단 한 끼의 식사라도 나눠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아이가 길에서 엄마를 잃어버려 울고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달려와 아이를 보살펴 주고 엄마를 찾아줍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바른 본성이고 인간의 삶입니다.

우리는 선 수행을 통해 이분법적인 세상, 절대적인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적으로만 생각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동으로 여러분의 행동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선수행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수행자가 일본의 유명한 선사에게 선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선사는 ‘주의집중’이라고 글씨를 써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주의집중’이라는 글씨를 벽에 붙여 놓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과연 그것이 무엇 때문에 중요할까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선사가 와서 그것을 보고는 다른 종이에다 다시 ‘주의집중’이라고 써서 수행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수행자는 선사에게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선사는 그저 종이에 ‘주의집중’이라고 쓸 뿐이었습니다. 주의집중이라는 것은 그것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바로 이렇게 인지하는 것이 바른 길로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 순간 집중하면 일상이 수행처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의집중 하는 것일까요. 화두, 진언, 염불 등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절에서 염불을 하실 때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순간순간에 집중하기 위해 염불하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라는 하나하나의 소리가 매우 분명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참선수행입니다. 마음속에 깊은 질문을 갖고 주의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염불할 때는 염불하고, 진언할 때는 진언하고 참선할 때는 참선만 하십시오.
생활 속의 모든 일들을 참선수행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행동이 참선수행이 되어 계속해서 주의를 집중하고 수행을 하다 보면 여러분 마음속에서 어떤 질문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구하고 추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을 만약 갖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할뿐더러 오래도록 만족을 주지도 못할 것입니다. 진실된 평화를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멈추어 서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육조대사는 ‘중생이라 할지라도 한 순간 분명한 마음을 갖는다면 그것이 부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부처라 할지라도 한 생각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이 중생’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의 가르침입니다. 순간 순간이 중요합니다. 숭산 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은 너무도 많고 수없이 변화한다. 그 모든 것을 다 구제한다면 그때 여러분은 부처가 될 수 있다.’ 순간이 수행이 될 때 여러분의 수행은 사회와 연관돼 있는 것이며 그것이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서울대학교 불자 교수모임인 불이회가 3월 26일 마련한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초청 특별강연회에서 대봉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대봉 스님 은
1950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1977년 숭산 스님을 친견한 후 미국 프로비던스 선센터에 거주하며 선수행을 시작했다. 1992년 숭산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1999년 숭산 스님의 법을 전해 받았으며 숭산 스님을 도와 충남 계룡산에 무상사를 창건했다. 현재 무상사 조실로 주석하며 숭산 스님의 뜻을 이어 미국, 유럽 및 아시아 등에 선수행을 전하는데 진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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