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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39. 일본에 불교 전한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552년 백제 성왕 명 받아 간 ‘노리사치계’

 
백제에서 간 스님들과 기술자들이 지은 현존 세계 최고의 목조건물인 일본 법륭사 금당
“백제 성왕이 사신을 보내 금동석가불 1구, 번과 천개 약간, 경론 약간 권을 보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 13년 조에 전하는 이 내용이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한 첫 기록이다. 이때 백제의 제26대 왕이었던 성왕은 “이 법은 모든 법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다. 깨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 주공·공자도 오히려 능히 알지 못하였도다. 복덕과보를 낳고 곧 위없는 보리를 이룬다. 그리고 이것은 천축으로부터 이곳 삼한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에 의해서 받들어 모시고 존경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 때문에 왜에 전해주는 것”이라며 불상과 경전을 전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흠명 13년은 서기 552년이다. 그리고 552년 10월 성왕의 명을 받아 처음으로 일본에 불상과 경전을 직접 전한 인물은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다.  이 노리사치계는 백제의 귀족이자 승려로 기록되고 있으나 그가 스님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노리사치계가 승려였는지 여부는 불교의 전래가 불·법·승 삼보를 전할 때 완전한 전래로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하튼 지금까지 한일 양국의 불교계나 학계에서는 노리사치계를 성왕의 명을 받아 일본에 불교를 전한 첫 번째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720년에 제작된 『일본서기』와 달리 747년에 편찬된 「원흥사연기(元興寺緣起)」에서는 552년이 아닌 538년 12월에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원흥사는 바로 일본 최초의 사찰 비조사(아스카지)로, 헤이죠 환도 때 새로운 수도로 옮겨와서 이름을 바꿔 부른 사찰이다. 비조사의 창건 역사가 일본불교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 미뤄볼 때 「원흥사연기」의 기록이 『일본서기』의 기록보다 신빙성이 높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한일불교사를 밝히고 있는 대부분의 저서들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따르고 있다.

백제승 도심이 두 번째 인물

따라서 어느 자료가 정확한지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이나, 두 기록 모두 백제 성왕이 흠명천황에게 사신을 보내면서 불상과 불구 그리고 경전을 전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여하튼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선물한 불상과 경전은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새로운 문명의 수용이었기 때문에 정치상황과 맞물려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불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백제계 호족 소가는 “서쪽의 모든 나라들이 이미 하나같이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나 일본만이 따르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일본도 신봉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고, 반대파의 수장격인 모노노베노오시코는 “대대로 천지사직의 180 국신에 사시사철 제를 올리고 있는데 이제 와서 외국의 신을 숭배한다면 국신으로부터 무서운 재앙이 내려질 것”이라는 입장을 내세웠다.

즉 한반도나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한 소위 ‘도래인 호족’과 일본 ‘토착세력’이 찬반 양론으로 갈려 대립했던 것. 결국 양측은 대립 끝에 전투를 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 전투에서 소가 쪽이 모노노베노오시코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면서 불교를 본격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백제는 일본에서 불교수용을 놓고 찬반 양론이 격한 상황에서도 지속적으로 불교를 전파했다. 흠명 15년(554)에는 승려 담혜(曇惠) 등 9인을 일본에 보내 먼저 가 있는 승려 도심(道深) 등 7인과 교대시켰다. 이는 곧 552년 불상과 경전을 전한데 이어 곧 ‘도심’이라는 스님을 파견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만약 노리사치계가 스님이 아니었다면 이 도심이 바로 일본에 불교를 전한 첫 번째 스님이 되는 것이다.

백제는 성왕에 이어 위덕왕 때도 지속적으로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 성왕이 554년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위덕왕은 557년 11월 백제에 왔다가 돌아가는 일본 사신에게 경론(經論)을 들려 보내는 한편 율사(律師), 선사(禪師), 비구니(比丘尼), 조불공(造佛工), 조사공(造寺工), 주금사(呪   師) 등 6인을 함께 보냈다.

이어 584년에는 일본의 사신 녹심신(鹿深臣)이 백제에서 미륵석상 1구와 불상 1구를 가져갔다. 그리고 588년에는 또다시 백제가 사신과 함께 승려 혜총(惠摠), 영근(令斤), 혜식(惠寔) 등을 보내면서 불사리를 전했고, 또 승려 혜숙(惠宿), 혜중(惠衆)과 함께 절을 짓고, 기와를 얹고 그림을 그리는 전문가들을 보냈다. 그리고 같은해 일본은 자국에서 승려를 배출하지 못함에 따라 선신니, 선장니, 혜선니 등 비구니 3명을 백제에 보내 유학을 시켰고 이들은 백제에서 계를 받아 정식 비구니가 되어 2년 후인 590년 돌아갔다.

또 595년에는 백제의 혜총(惠聰)이 일본에 가서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와 더불어 일본 불교의 중추적 인물이 됐다. 당시 일본은 성덕태자가 정권을 장악한 초기였으며, 성덕태자는 고구려에서 온 혜자에게 2년간 불교를 배웠다. 이어 597년에는 위덕왕의 왕자 아좌가 일본에 가서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602년에는 삼론에 정통하고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관륵이 일본에 가서 역본, 천문지리서, 둔갑방술서 등을 전했으며 이후 일본 최초의 승정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일본불교 중흥의 기틀을 다짐으로써 훗날 석가모니의 화신으로까지 불렸던 성덕태자의 상.(왼쪽)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린 금당 벽화의 모사품(오른쪽).

일본에서 백제 불교를 받아들이는데는 성덕(聖德)태자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성덕태자 즉 쇼토쿠 태자는 불교 수용을 놓고 숭불파와 배불파가 대립할 때 숭불파와 손잡고 배불파를 제거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 싸움에서 승리한 후 불교를 적극 수용하는 한편 자신도 불교 공부에 심취했을 뿐만아니라, 고구려에서 온 스승 혜자의 가르침에 따라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불교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17조의 헌법을 제정하면서 그 안에 삼보에 귀의할 것을 명시하기까지 했다. 또한 백제의 혜총으로부터 경전을 배운 성덕태자는 『유마경』『승만경』『법화경』등 세 경전에 대한 소(疏)를 짓는 등 불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때문에 훗날 일본에서 석가모니의 화신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고구려 혜자는 성덕태자 스승

태자는 일본 최초의 정식 사찰인 아스카지(비조사)를 시작으로 41개에 달하는 사찰을 세우기도 했다. 587년 백제에서 전문가들이 파견된 이후 596년까지 9년에 걸쳐 완성한 이 절은 ‘일탑삼금당’식의 대가람으로, 일본에서 백제의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고구려 가람배치 형식을 하고 있어 학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특히 말년에 지은 법륭사(호류지)는 현재 일본에서 문화재의 보고로 불릴 정도로 옛 모습을 잘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에서 건너간 ‘백제관음’이 지금도 소장돼 있다.

또한 610년 고구려에서 건너 간 담징이 법륭사 금당의 벽화를 그렸던 인연이 있어 우리에게도 친근감을 주는 사찰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간 스님들은 일본의 종파성립에 있어서도 큰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는 교학적으로 중국과 한국의 학술적 성과를 받아들여 수입 경로에 따라 종파가 성립됐고, 이들은 이를 ‘남도육종(南都六宗)’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남도육종 가운데 삼론종은 성덕태자 시절 일본에 간 고구려 혜관(惠灌) 스님이 원흥사에 머물며 삼론을 가르쳐 많은 학자를 배출하면서 성립됐다.

그리고 성실종은 백제의 도장(道藏) 스님이 721년 일본에서 성실론을 가르침으로써 비롯됐고, 법상종은 당나라에 유학한 일본 승려 도소가 전래한 이래 신라의 스님이 4차례에 걸쳐 교의를 전하면서 확립됐다. 그리고 화엄종은 신라의 심상(審祥·689~773) 스님이 의상대사의 화엄사상을 전하면서 확립됐을 정도로 일본불교 종파 성립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 불교를 전한 스님들 가운데는 백제 이외에 고구려와 신라 출신도 상당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최초의 일본 전교자였던 혜편을 비롯해 혜자, 불교예술가 담징, 일본 삼론학의 시조가 된 혜관 등이 유명하다.

이들 중 혜편은 훗날 백제에 와서 계를 받고 비구니가 된 선신니, 선장니, 혜선니 등 일본 최초의 비구니들을 가르침으로써 일본 최초의 승려를 배출한 인물이다. 그리고 영양왕 때 일본에 간 담징은 법륭사 법당의 벽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고구려에서는 또 602년 승려 승륭(僧隆)과 운총(雲聰)이 일본에 법을 전했고, 605년에는 불상조성 지원금으로 황금 300냥을 건네기도 했다. 이외에 도등(道登)이 627년, 도현(道顯)이 668년에 각각 일본으로 건너가 법을 전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어 신라에서도 623년 사신과 더불어 불상, 금탑, 불사리를 일본에 보냈고 그 후로 스님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신라에 만개한 불법을 전했다. 백제를 비롯해 고구려, 신라 스님들의 일본 전법활동은 이후 백제 왕인 박사의 후손인 행기 (行基·668~749)스님의 행적에서도 잘 나타난다. 682년에 출가한 행기 스님은 나라의 야쿠시지에서 신라 승려 혜기 법사 문하에 들어가 3년간 유가유식론을 공부하고, 685년 아스카지 남쪽 선원으로 옮겨 백제 스님 도소 화상 문하에서 선을 배우며 금식과 심신 수련을 했다. 이어 22세에는 고쿠지로 가서 신라 덕광 법사 문하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백제에서 보낸 관음상도 현존하고 있다

신라와 백제에서 온 고승들의 포교가 활발했던 시기에 그들의 문하에서 불법을 배운 셈이다. 이 행기 스님은 훗날 쇼무왕이 도다이지 건립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일본 최초의 대승정에 추대되기도 했다.

日화엄종은 신라승 심상이 확립

일본은 나라시대(710~784) 중기에 이르러 중국에서 직접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강해졌으나, 이때에도 신라불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고 9세기에 활약한 천태종의 엔친은 『제가교상동이집』에서 화엄의 고조로 중국 법장과 신라 원효를 명시하기도 했다. 이후 고려시대에도 수 백여 권의 불교전적을 수입해갔고, 원효와 의상을 조사로 모셨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는 묘에(1173~1232)의 스승 케이가(1103~1189)는 의천의 「원종문류」와 「교장총록」을 갖고 있었다. 케이가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수계할 때 「원종문류」를 보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한일 양국간의 불교교류 흔적은 크게 나타나지 않으나, 일본은 조선왕조에 사신을 보내 고려대장경을 보내달라고 요구했을 만큼 한국불교에 대한 동경의 끈을 놓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불교를 전해 받은 일본은 현재 불교교단에서 세운 4년제 대학만 10여 개에 달할 정도로 불교학 연구에 열정을 보이고 있고, 이로 인해 오늘날 세계불교학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불교학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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