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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40.법난(法難) [상]

기자명 법보신문

고구려 보장왕, 사찰 도교사원으로 전환

 
고려시대 몽고군 침략으로 인해 사찰이 소실되는 법난을 당한 황룡사 터

기나긴 역사 속에서 불교를 핍박하거나 나아가 불교 자체에 대한 말살을 시도한 사건들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사찰을 훼손하거나 철폐시키는 것은 물론 사찰재산의 몰수, 탑과 불상 및 경전의 파손, 불법을 펴는 법회의 금지, 승려의 환속, 출가금지에서 학살까지 법난(法難)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이러한 사건들은 불교를 태동시킨 인도에서부터 우리나라까지 불교가 전래된 많은 나라에서 발생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에 버금가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불교를 태동시킨 인도에서는 6세기 초 북인도를 침입한 훈족이 자행한 법난과 8세기 이후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으로 비롯된 법난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호전적 기질을 갖춘 회교도들의 침략과 박해가 지속되면서 탑과 불상이 파괴되고 경전이 불태워졌다. 또한 불법을 전하는 승려들까지 학살되면서 사실상 명맥이 단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연개소문 주청에 왕이 도교 숭배

그리고 세계적인 종교지도자 달라이라마를 배출한 티베트에서도 란다르마왕에 의해 심각한 파불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왕이었던 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면서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키는 등의 박해를 가함으로써 승려들이 법난을 피해 이웃나라로 피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이쇼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불교는 다시 부흥의 시기를 맞았다.

인도나 티베트에 이어 가장 널리 알려진 불교 탄압 사건은 중국의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 당의 무종, 후주의 세종 때 불교가 겪었던 탄압 사건을 이르는 말로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황룡사 9층탑 복원도.

북위 태무제는 도교를 신봉하면서 446년 불교를 배척하는 명령을 내려 6년 동안이나 사찰과 불상을 불태우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는 파불을 자행했다. 그리고 북주 무제는 유교를 신봉하면서 574년에 불교를 폐지하고 승려들을 강제 환속시켰다. 이어 당 무종은 841년부터 5년간 4600개의 사찰을 철폐하고 26만여명의 승려를 환속시킴으로써 불교계 각 종파의 교세를 크게 약화시켰다. 이 무종의 법난은 그의 연호를 딴 ‘회창(會昌)의 폐불’로 더 유명하다. 후주 세종은 앞의 세 법난과 달리 각기 다른 종교와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재정난과 승단의 타락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세종은 불교교단을 숙청하는 한편 불상을 녹여 주화를 제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로 다른 종교와 갈등을 빚지 않았다. 스스로 시련을 겪으면서도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해왔고, 그처럼 지혜와 자비를 바탕으로 한 종교이기에 정권차원의 조직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국가에서 오랜 기간 그 존재를 이어올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법난의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는 불교 수용에 있어서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컸었고, 이 때문에 결국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단적 상황을 거치면서 불교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차돈의 순교를 한국불교 역사상 최초의 법난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기존에 그 존재가 확실했던 불교를 탄압하거나 배격했던 일반적 법난의 역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또한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기존에 그 민족이 믿고 따르는 종교가 있을 경우 새롭게 종교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이차돈의 순교를 법난으로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법난이라 부를 만한 첫 번째 사건은 무엇일까.
불교탄압의 첫 번째 사례는 『삼국유사』‘보장봉노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조에서 볼 수 있다. 고구려 연개소문은 보장왕에게 “솥에는 발 세 개가 있고 나라에는 삼교(三敎)가 있는 법인데, 신이 보기에 우리 나라에는 오직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위태롭습니다”라고 진언하는 대목이 나온다. 연개소문의 진언에 따라 고구려는 당나라에 도교의 전파를 요구했고, 당 태종은 숙달 등 도사 8명을 고구려에 보냈다.

이때 고구려 보장왕은 사찰을 도관(道?)으로 만들고 도사를 그곳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유교의 유사 위에 도사를 앉혀 도교가 불교와 유교보다 우위를 차지하도록 했다. 이처럼 보장왕이 국가차원에서 도교를 숭배함에 따라 불교계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위치가 된 것이다. 비록 『삼국유사』에서 법난에 대한 더 이상의 구체적 기술이 없기는 하지만 사찰을 빼앗아 도관으로 사용하도록 했으니, 불상을 치우고 승려들을 그곳에서 쫓아내는 것은 물론 경전까지 없애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보장왕이 사찰을 도관으로 바꾼 사실은 고구려 최초의 불교탄압 사건이자, 곧 한국불교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최초의 법난이 되는 셈이다.

고려 땐 황룡사탑-대장경 소실도

당시 고구려 고승 보덕화상은 보장왕에게 불교탄압을 수차에 걸쳐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구려가 곧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며 신통력으로 방장(암자)를 날려 천리길이나 떨어진 전주 고달산으로 옮겼다. 보덕화상이 고구려 반룡산에서 전주 고달산으로 방장을 날려서 옮긴 기록은 훗날 고려 문필가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서도 의천 스님이 이곳을 방문해 시를 남긴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일연 스님 역시 “불교는 넓고 한이 없는 바다다. 냇물 같은 유교 도교 다 받아들인다. 가소롭다 여왕(麗王)은 웅덩이에 한계를 치고 와룡이 바다로 옮아감을 알지 못했네”라는 시를 통해 보덕화상을 기리고, 고구려 보장왕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다.

어쨌든 보덕이 백제로 떠난 이후 고구려의 고승들 역시 백제와 신라 그리고 일본으로 떠남에 따라 보장왕과 연개소문에 의한 법난이 더욱 심각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결국 고구려는 이때부터 멸망의 길을 걸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단 한차례 고구려에서 발생했던 법난 이외에는 특별히 법난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고려시대에 와서는 숭불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에 걸쳐 큰 법난이 발생한다.

먼저 몽고군이 1232년 12월 2차 침공을 강행했을 때 고려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몽고군은 온 백성의 정신적인 표상이자 신앙이며 호국정신의 결정체인 대장경판을 불태워서 민심을 동요시키고 이 땅을 유린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 고종은 초조대장경 소실 4년 만인 1236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대장경 재조에 착수, 15년 만인 1251년에 이를 완성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귀중한 불교문화재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몽고 군은 경주까지 내려가 신라시대 이래 호국의 상징으로 남아 있던 황룡사와 9층탑을 불태웠다. 이처럼 초조대장경과 황룡사 소실이 외세의 침략에 의해 겪어야 했던 법난이었다면, 문신과 무신 그리고 무신과 무신들 간의 정권찬탈 과정에 휩쓸려 일어난 법난은 내부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는 국가에 변란이 많았던 시대상황이 원인이기도 했다. 당시 각 사찰에서는 전란에 대비해 승군을 조직하면서 독자적인 무력기반을 갖추게 됐다. 때문에 권력찬탈을 도모하는 무리들은 승군을 이용했고, 이 과정에서 때론 반대파의 보복을 받아 무참하게 사찰이 짓밟히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사』에 나타난다. 그 연유를 알 수는 없으나 명종 4년 귀법사 승려 수백 명이 북문을 침범해 행정을 맡아보던 승록 언선(彦宣)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이의방에게 보복을 당해 승려 수십 명이 죽었다.

 
무신들의 권력다툼에 끼어들어 법난을 자초했던 불교계의 자성과 나아갈 바를 제시했던 보조국사 지눌 진영.

고려 무신 권력다툼 관여 법난 자초

이의방은 이후에도 사찰을 파괴하는 보복전을 통해 불교를 탄압했다. 이후 경대승은 정중부가 정권을 수립할 때 지원한 사원세력, 즉 승병을 제거하기 위해 10여명의 승려들을 해도로 귀양보냈고, 명종 26년에는 최충헌이 권력을 잡으면서 승려와 사원의 정치적 관여를 차단하고 사찰의 경제력 증가를 막기 위해 비보사찰(裨補寺刹, 도참설과 불교 신앙에 따라 전국의 명처 명산에 세운 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사원을 통제했다. 이에 따라 무신정권이 집권한 기간 동안에는 사찰파괴, 승려학살 등 가장 극심한 형태의 법란이 자행됐던 것이다.

고려시대에서는 이처럼 외침과 내부 자정능력 상실로 인한 법난이 있었고, 무신정권 이후에야 비로소 자성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몇몇 결사(結社) 형태로 나타났다. 선종에서 지눌의 정혜결사와 천태종 요세의 백련결사, 교종 요일의 반룡사 결사 및 대고의 화엄결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때 결사운동의 선봉에 섰던 보조국사 지눌은 「정혜결사문」에서 “우리들의 소행을 아침저녁으로 돌이켜보면 어떠한가. 불법에 핑계하여 나와 남을 구별하여 이양(利養)의 길에서 허덕이고 풍진 가운데에 골몰하여 도덕은 닦지 않고 의식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 한들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며 권력과 밀착해 현실적 이익만 추구하는 승도들의 폐단을 지적하고, 나아갈 바를 제시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실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법난에 직면하게 된다. 삼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던 법난은 폐불에 가까운 법난의 전주곡에 불과했던 것이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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