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게오르그 그림(1868-1945)
⑧ 게오르그 그림(1868-1945)
  • 이동호
  • 승인 2004.08.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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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탄압 속 불교신앙의 씨앗 일궈 내
21년 번역가 자이덴슈티커와 불교회 결성

나치 정권 땐 '古 불교회'로 개칭해 활동

2차대전후 사망…그의 집 불교 중심 역할


게오르그 그림(Georg Grimm) 박사는 1868년 2월 25일 남부 독일 바이에른 주 프랑켄 지방 뉘른베르그시 부근의 조그마한 마을인 롤호펜(Rollhofen bei Nuernberg)에서 대장간집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도의 집안이라 부모님은 그가 신부가 되기를 바래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갈수록 믿음에 대한 회의가 깊어져 결국 다시 법학을 공부하게 됐다. 성공적으로 법학 공부를 마친 그는 법학박사의 학위를 취득하고 법조계의 판사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판사라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남들보다는 수월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지식인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아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접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서 출생

쇼펜하우어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칼 오이겐 노이만이 번역한 불경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불교의 깊은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후 주법원 판사인 그림 박사를 중심으로 하나의 작은 불교연구 및 신행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기독교도들간의 전쟁은 이렇게 그림 박사로 하여금 평화의 철학이자 종교인 불교에 관심을 보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림 박사가 불교활동을 본격화할 당시 북부 베를린에서는 파올 달케 박사가 활발한 불교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림 박사는 파울 달케 박사와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개신교인 루터 복음교도였던 달케 박사와는 달리 그림 박사는 로마 가톨릭신자였으며, 달케박사는 동프로이센 출신이였지만 그림 박사는 남부 바이에른 출신이었다.

또 달케 박사가 자연과학도(의학)에서 불교에 귀의한 것과는 달리 그림박사는 정신/인문학인 신학도였다는 점도 하나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1921년 7월 20일 그림 박사는 뮌헨에서 출판가며 번역가인 자이덴슈티커(Seidenstuecker)와 함께 '독일불교회(Buddhistische Gemeinde fuer Deu tschland)'를 창립했다. 이어 1924년 '삼보회(Loge zu den drei Juwelen)'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나, 나치정권이 들어서면서 또다시 1935년 6월에는 '고(古)불교회(Altbuddhistische Gemeinde; ABG)'로 단체 명칭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험난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이 불교 단체는 2차대전이 끝난 뒤인 1951년 12월 18일 비영리종교단체로 등록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독일 내 가장 오래된 불교단체로 자리하고 있다.

그림 박사는 중년이후 천식을 앓고 있어서 53의 나이로 조기 정년퇴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악화된 건강상태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더욱 불교연구 및 활동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불교적 세계조명(Buddhistischer Weltspigel)」이란 잡지를 발간했는데, 이때 자이덴슈티커가 편집인, 발행인 겸 기고가로 함께 동참했으나 1차 세계대전 후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정권동안에 고불교회의 활동이 금지되고 심지어 그림 박사의 활동도 매우 엄격히 통제되고 관찰되었다. 그가 쓴 글은 물론 출간한 책이나 잡지들까지 모두 강제 몰수 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당연히 모임의 활동도 완전 금지 당했다.

이런 까닭에 그림 박사는 답답한 뮌헨을 벗어나 풍광이 좋은 암머호반가의 우팅(Utting am Ammersee)으로 이사를 하게 됐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교를 우수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독일불교의 선구자격인 칼 오이겐 노이만과 자이덴슈티커를 수년동안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대학에선 신학 공부에 전념

그러나 안타깝게도 2차 세계대전 후 곧 세상을 하직하게 되며, 이곳 그의 저택은 오늘날까지 그가 창립한 고불교회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의 묘비에는 절친했던 동료 판사가 그를 일컬어 '바이에른의 가장 인자한 판사에게(Dem mildesten Richter Bayerns, 영역 Bavaria's most benevolent judge)'라고 애도한 추도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의 사후 고불교회는 프랑스인 루이 안시아노(Louis Ansiano 1893??1961)가 이끌었다.

그림박사의 딸인 마야 켈러-그림(Maya keller-Grimm)과 그의 제자 중 여러 불교저작들로 잘 알려진 막스 호페(Max Hoppe, 법명 담마팔로)가 실제적으로 주도하다가 1951년 공식적으로 단체를 이끌게 됐다. 1977년 말 켈러-그림여사는 단체와 야나출판에서 손을 떼고 은퇴하게 된다. 하지만 고불교회는 1948년 이후 격월간 「야나」(Yana 수레라는 의미)를 오늘날까지 꾸준히 발행해 오고 있다.

그림 박사는 달케 박사와 마찬가지로 탁월한 글 솜씨가 있었다. 그래서 차근차근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를 학습해 팔리어로 된 불교 경전을 추려서 번역하기도 했다. 일생동안 수많은 글들을 발표했으며, 총 10권의 책을 썼다.

「삼사로 Der Samsaro」(1935년초판, 1960년 재발행), 「행복 Das Glueck」(1933년 초판, 1979년 재발행), 「당신을 위한 불도(佛道) Der Buddhaweg fuer dich」(1935년 초판, 1974년 재발행)와 「불교의 과학Die Wissenschaft des Buddhismus」(1923년 초판, 1978년 재발행)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을 꼽는다면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 이성의 종교(Die Lehre des Buddho, die Religion der Vernunft)」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1915년 뮌헨의 피퍼출판사에서 처음으로 출판됐으며, 1957년 15판이 발행되면서 더욱 내용이 보강됐다. 그리고 1979년에는 18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주저인 「부처님의 가르침」은 국제적으로도 영어, 불어, 심지어 베트남어로도 번역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그 자신이 불법을 공부하고 실제 수련한 것을 바탕으로 잔잔히 썼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도반이었던 자이덴슈티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1916년 1월 10일자 편지에서 자이덴슈티커는 그림 박사에게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불서 10권 저술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심오하게 적합하게 표현한 것은 다른 어디에서도 여태껏 보지 못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네. 초월적인 주체에 대한 긍정과 강조는 무엇보다 나를 기쁘게 했네…'

그림 박사의 저작들은 2차 세계대전 후 다시 발행되고 미발표 글들은 「야나」를 통해 소개됐다. 그리고 그의 딸 마야 켈러-그림 여사와 막스 호페의 주도로 그림 박사의 평소 생각과 사상을 정리해 「위인의 빛 속에서- 질의 응답으로 본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불교 교리서를 1979년 발행했다. 그리고 마야 켈러-그림 여사도 아버지 못지 않게 불교 공부와 활동을 하면서 1977년과 1979년에 「부처님의 영토에서」란 불교 서사시를 두 권으로 발행하여 널리 알려 지게 된다.

그가 남긴 저작과 가르침은 그가 창립한 고불교회를 중심으로 독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고불교회 지부를 결성하여 공부하도록 했다.

평화롭고 잔잔한 남부 독일 암머호반가의 우틴에는 매년 두 차례 막스 호페가 중심이 된 세미나가 열리고 있으며, 일요일마다 불교 강연, 법회, 단체 수련, 참선, 그리고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동호 박사 (발틱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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