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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41. 법난(法難) [하]

기자명 법보신문

조선 성종-연산군-중종 70년간 불교 말살

 
86년 해인사에서 개최된 전국승려대회 참가자들이 10·27 법난 해명과 불교악법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89년 10월 27일 정토구현 전국승가회 등 7개 단체 500여 명이 동국대에서 10·27 법난 진상규명을 위한 실천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민족사 간 한국불교 100년

사찰-불상-경전 불태우고 승려 강제 환속
도승법 폐지로 불교존립 법적 근거 폐기도

삼국시대 고구려와 이후 고려에서 벌어진 법난은 조선시대에서 벌어질 최악의 법난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을 뿐이다. 조선 500년은 법난과 박해로 점철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종과 세종 시대에 자행된 교단 통폐합을 시작으로 성종, 연산군, 중종 시기의 불교 말살 정책까지 가히 폐불 시대라 부를만한 사건이 쉼 없이 일어났다.

조선시대 법난은 조선 태종 5년(1405) 11월 의정부에서 상서를 올림에 따라 사찰에 소속된 노비의 수가 대폭 감축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 태종 6년(1406) 3월에 다시 의정부의 주청에 따라 지역별로 사찰을 구분해서 전국에 11종 242사만을 남기고 나머지 사찰은 모두 폐사 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태종 7년에는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 등 7개 종단만 존속시켰다.

이같은 사실은 『태종실록』에 그대로 실려 있다. 실록에 따르면 태종 6년 3월 의정부에서 선종과 교종의 각 종파를 합해 남겨둘 사찰을 정하도록 했던 것. 이에 따라 의정부가 조계종과 총지종을 합쳐 43사, 천태소자종과 법사종을 합해 43사, 화엄종과 도문종을 합쳐 43사, 자은종 36사, 중도종과 신인종을 합해 30사, 남산종과 시흥종은 각각 10사를 남길 것을 건의하면서 당시 11종이던 종단이 7종으로 통폐합 된 것이다.

태종에 이어 세종이 왕위에 등극한 이후에는 일부 승려들의 도덕적 타락이 빌미가 돼서 유생들이 극단적인 불교폐지론까지 주장하고 나섰다. 유생들의 척불론이 강해지자 급기야 1424년 4월 예조에서 불교계 비리를 지적하며 대폭 정비할 것을 주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세종은 당시 7개 교단을 다시 통폐합해서 선종과 교종으로 양분하고 사찰도 36개 사찰만을 남겨 선종과 교종에 각각 18개씩 배정했다. 그야말로 불교를 싹부터 잘라내는 법난이 일어난 것이다. 세종은 이어 선종에 전 4250결, 교종에 전 3700결을 나눠주고 대부분의 사찰재산을 나라에 귀속시켰다. 뿐만아니라 승려의 수도 선종 1970명, 교종 1630명으로 제한함에 따라 불교교단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세종은 선교양종 36 사찰만 남겨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정책적으로 탄압 받으면서 불교문화재의 손실도 이어졌다. 태종 6년에는 명나라 사신이 제주 법화사의 미타삼존상을 본국으로 가져갔고, 이듬해인 태종 7년에는 명나라가 다시 사신을 보내 사리를 요구하자 태상왕이 보관했던 사리 303과를 보내기도 했다. 또 태종 11년에 다시 사리를 요구해 전국에서 모은 558과의 사리를 헌상하는 등 조선왕실은 명나라가 요구하는 대부분의 불교유산을 유출함으로써 성보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조선 초기 법난에 이어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성종과 연산군· 중종으로 이어지는 70년 동안 불교계는 참기 어려운 법난의 회오리 속에 몸을 움츠려야 했다. 성종은 재위 2년(1471) 도성 안에 있던 염불당과 경전을 언문으로 번역해 간행하던 간경도감을 폐지시켰다. 그리고 4년에는 사대부의 부녀자가 출가하는 것을 금지했고, 6년에는 도성내외의 비구니 사찰 23곳을 헐어냈다. 또 8년에는 국왕의 생일 때마다 사찰에서 행해지던 축수재(祝壽齋)를 폐지했고, 이어 23년(1492)에 경국대전의 도승법을 정지시킴으로써 도첩이 없는 승려는 모두 강제 환속시키고 군역에 충당하도록 했다. 그로 인해 전국 사찰은 텅 비게 되었고, 끝내 폐사가 되고 말았다.

당시 유생들은 인수대비가 정업원에 안치했던 불상을 불태워버리는 등 척불 행각을 계속했고, 이어 백성들이 불교제례를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불교 말살정책이 극에 달했다.
성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그나마 남아 있던 조선불교 양대 종단의 본산인 선종도회소 흥천사와 교종도회소 흥덕사, 그리고 세조가 세운 원각사를 폐지해 관아로 삼았다. 그리고는 이도 모자라 겨우 남았던 사찰의 승려들마저 내쫓고 환속시켜 노비로 삼는 등 횡포를 그치지 않았다. 연산군은 한발 더 나아가 승려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마저 폐지함으로써 불교의 존재성을 말살했다.

성종과 연산군이 대를 이어 불교말살 정책으로 일관한데 이어 왕이 된 중종은 불교말살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때문에 정권차원의 불교말살정책에 힘입은 배불론자들과 유생들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탄압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중종 4년(1509)에는 유생들이 청계사에 난입해 경첩을 훔쳐가는 일이 있었고, 5년에는 흥천사의 5층 사리각을 불태우기도 했다. 중종은 각 도의 사찰을 허물어뜨리는 한편 토지를 향교에 나눠주었고, 원각사를 헐어냈으며 흥천사와 흥덕사의 대종을 녹여 총통을 만들었다. 심지어 경주 동불상을 녹여 무기를 만들기까지 하는 등 불교 박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온갖 불교박해를 일삼아온 중종은 결국 11년(1516)에 이르러 경국대전에 있는 도승법을 아예 폐지함으로써 이름뿐이었던 선종과 교종의 종단은 물론 승과에 이르기까지 불교존립에 필요한 법적 근거마저 없애버렸다. 이처럼 성종에서 연산군과 중종에 이르기까지 3대 70여 년간 행해진 위정자들의 폐불 행위는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이후 1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거치며 이룩해 놓은 불교의 우수한 사상과 문화를 송두리째 짓밟는 결과를 초래했다.

보우(普雨) 스님은 「선종판사 계명록」을 통해 당시 불교계가 겪은 법난을 이렇게 설명했다. “본조(조선)의 연산군 때에 이르러 한번 거센 산바람이 불어닥침을 만났고 중종 때에는 버림을 받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선풍(禪風)은 부채를 숨기고 불일(佛日)도 빛남을 감췄다. 모든 나라 안의 사찰들은 나날이 없어지고 다달이 훼손되어 산에는 절이 없고 절에는 스님이 없어 요행히 총림 아래서 머리 깎고 물든 옷 입은 사람도 관리가 침범하고 속인들이 재앙을 일으켜 눈에는 눈물이 있었고 그 눈물에는 피가 있었다. 장차 외로이 명맥을 남길 곳도 없어지고 형세는 궁극하여 길짐승으로 전락했다.” 불교계에 불어닥친 법난으로 인해 폐불 위기에 처한 당시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 땐 사찰령으로 자율권 억압

조선시대에는 또 하류계층의 스님들을 중심으로 부역에 시달려야 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성종 14년에는 창경궁 창건공사에 4천명이 8개월 동안 동원됐고, 중종 30년에는 한강 상류 견항(犬項) 공사에 3천명의 승려가 1년간 동원되기도 했다. 또 태안과 서산의 중간 지점을 남북으로 뚫는 대규모 운하공사인 의항(蟻項) 공사에도 5천명의 승려가 동원되는 등 스님들은 그야말로 학대받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조선불교는 이렇게 황폐화되었던 것이다.

불교계는 조선시대 말미에 승려의 도성출입조치가 해제됨에 따라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듯 했으나, 일제가 1911년 6월 사찰령을 공포하면서 총독부의 관리감독을 받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총독부는 사찰령에 이어 사찰령시행규칙을 공포해 전국 1300여 사찰을 30본산으로 나누어 지배했고, 사원의 명칭을 변경할 때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것은 물론 집회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주권을 박탈했다. 여기에 더해 재산권을 박탈했음은 물론이다. 이 시기 불교는 총독부와 친일 주지들에 의해 수탈과 착취를 당하는 법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역대 독재정권 등 정치권력의 간섭과 탄압이 이어져 적지 않은 고초를 감내해야만 했다. 미군정은 미군이 진주한 그해부터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하는 등 편파적인 기독교 위주 종교정책을 시행했다. 기독교 위주 정책은 부처님오신날이 이로부터 30년이나 지난 1975년에 법정소송을 거쳐 겨우 공휴일로 지정된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군종장교는 1951년 대통령령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에만 군종제도를 시행하고 불교 군종은 이로부터 17년이 지난 1968년 월남파병을 계기로 허용돼 지금까지도 군종장교 중 군목이 다수를 차지하게 하는 모순을 낳고 있다.

그리고 이승만은 불교 내부 문제에 깊이 개입하면서 소위 불교관련 담화를 4차례나 발표해 비구승과 대처승이 혈투를 벌이는 불교계 내분을 부추겼다. 또 박정희 정권에서는 일제시대 사찰령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했으며, 불교재산의 합리적 관리를 명분으로 제정된 이 법은 이후 불교계를 통제하는 악법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1987년에 이르러 전통사찰보존법으로 대체입법됐다.

해방 이후 가장 큰 법난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자행됐다. 12·12 쿠테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자율적 종단 운영을 기치로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불교계를 군화발로 짓밟는 사상 초유의 10·27법난을 일으켰다. 전두환 정권은 사찰 내 용공분자 및 범법자 색출을 명분으로 18개 종단 소속 3000여 사찰에 일제히 계엄군을 난입시켰다. 신군부는 이때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해 승려와 민간인 등 153명을 강제 연행했고, 승려 10명과 일반인 8명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노태우 정권 때 국무총리가 사과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군사정권의 종교탄압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80년 10·27법난 근현대 최악

불교계는 이후로도 크고 작은 탄압에 직면해 그때마다 정권에 대항해야만 했다. 불교관계 악법 철폐와 불교의 자주성을 역설했던 1986년 9·7 해인사 승려대회를 주도한 스님들이 구속되기도 했고, 김영삼 정부 때는 종단개혁을 위한 구종법회에 수백 명의 폭력배와 전경들을 투입해 도량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2008년 이명박 장로 정권 출범 후 끊임없이 터져 나온 공공기관에 의한 종교편향 사건은 결국 불교탄압이라는 반발을 불러와 서울시청 앞 광장에 20만 명의 불자들이 모이는 사상초유의 불교도 정치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한국불교의 법난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이처럼 새로운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따라서 승가의 화합을 통한 진정한 불교의 자주성 회복이 절실하며, 이것이 바탕이 될 때 1700년 한국불교의 정통성도 굳건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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