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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42. 청기와 건물

기자명 법보신문

조선 태조와 왕실 지원 받은 회암사 법당

 
근현대 들어 지붕에 청기와를 얹은 석남사 조사전.

우리사회에 근대화 바람이 불며 이른바 지붕개량사업이 한창 펼쳐지던 시절, 대부분의 서민주택은 초가집이거나 겨우 양철 또는 슬레이트 지붕을 씌운 정도였으나 이 때도 사찰의 지붕만은 기와로 덮여 고풍스런 멋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찰의 지붕은 언제부터 기와로 덮기 시작했을까.

역사적으로 보면 삼국시대 유적 중 산성을 중심으로 한 건물지와 사찰 터에서 기와가 집중적으로 출토됨으로써 이미 삼국시대 사찰에서도 지붕에 기와를 얹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기와의 역사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기와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 시기는 122년.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 6대왕인 지마왕 11년(122)에 “11년 여름 4월, 큰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 나무를 꺾고 기와를 날리다가 저녁이 되어 그쳤다”는 기록이 있다. 또 와박사를 두어 일본에 사람을 파견하기까지 했던 백제에서는 비유왕 3년(429)에 “11월 지진이 발생하고 큰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미 삼국시대 초기부터 기와가 지붕에 얹혀졌음을 설명하는 기록들이다.

그리고 기와는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를 상징하는 장식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수막새에 연꽃(蓮花), 인동(忍冬) 등으로 장식을 하기 시작했고, 통일신라시대 이후부터는 암막새에 당초(唐草)무늬가 새겨졌다. 이어 고려시대에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범자(梵字)가 새겨진 막새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화려함 상징…조선시대 본격 등장

사찰에서 기와를 사용한 시기는 이처럼 삼국시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큰 사찰을 세울 때 인근에 기와공장을 차려 직접 굽기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기와를 공급하는 일은 정책적으로 이뤄졌고, 당시 기와를 생산하던 별와요(別瓦窯)의 일을 해선(海宣)이라는 스님이 중심적으로 했었다. 해선 스님은 전국에서 기와장이와 스님들을 불러들였고 스스로 화주가 되어 자금을 담당하면서 도성 안 주택의 지붕을 기와로 개량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일반기와에 이어 소위 ‘화려함의 상징’으로 불리는 청기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기와를 만든 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 색조변화를 추구했다. 특수한 재료를 이용해 청색이 나도록 했는데 그 기술을 배우기 어렵고 일반기와의 다섯 배에 달하는 제작비용 때문에 물량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청기와는 왕실이외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고, 이것이 곧 왕실의 권위와 사치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청기와가 꼭 왕실에서만 사용됐던 것은 아니다. 요즘 잊혀진 가람(폐사지)을 발굴할 때 간혹 청기와가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는데서 알 수 있듯, 청기와는 대규모 가람을 형성했던 일부 사찰에서도 사용됐다. 물론 이 사찰들은 보통의 일반 사찰이 아니라 왕실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다.

왕실의 권위를 상징했던 청기와는 어떤 연유로 어느 사찰에서 가장 먼저 사용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사찰에서 청기와를 사용한 흔적을 남긴 직접적인 기록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현대 들어 발굴된 폐사지 관련 기록이나 일부 기와 관련 기록 그리고 지금도 남아 있는 몇몇 사찰의 전각 용마루 청기와 등을 통해서 그 일면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한 아산 봉곡사 청기와 법당. 청기와는 후대에 얹었다.

조선시대 이전 청기와 관련 기록은 『고려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록에 따르면 유흥을 즐겼던 고려 18대 의종 왕이 민가 50여 채를 헐어 태평정이라는 정자를 지을 때 남쪽에는 큰 연못을 파고 북쪽에는 양이정을 지어 청기와를 올렸다. 하지만 이외 고려시대 청기와 관련 기록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어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청기와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 광해군 시절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왕실과 관련된 사찰에까지 청기와를 공급하게 되고, 연산군 때에는 정전은 물론 사찰과 이궁, 황각, 정자에 이르기까지 청기와를 덮었다. 청기와는 임진왜란 때 제작기법이 끊어졌고, 이 때문에 광해군 때는 와장을 중국 사신과 동행시켜 기술을 배워오도록 하기도 했다. 또한 청기와를 구울 때 필요한 염초를 구하기 위해 중국과의 무역이 크게 성행하기도 했으며, 소요되는 땔감의 공급을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각 도에 할당하기까지 해 지방관리와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되면서 반감을 사기도 했다.

여하튼 조선시대 왕의 취향에 따라 청기와를 굽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노역과 물량을 책임져야 하는 백성들의 고초가 적지 않았으나, 왕실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한 사찰들은 그 덕(?)에 호화로운 청기와를 사용해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사찰 중 가장 먼저 청기와 건물을 지은 곳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각종 기록에 따라 양주 회암사가 청기와를 사용한 첫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를 살았던 목은 이색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서 건물의 명칭과 함께 규모, 위치 등을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겼고, 이 기록은 오늘날 발굴에 있어서 일정정도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색은 또 한 시에서 “흑사의 긴 냇물이 섬돌을 휘돌아 흐르는지라”라는 표현을 이용했는데, 이 시에서 표현한 흑사는 당시 민간에서 청기와로 지붕을 덮은 사찰을 부르던 말이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에 창건돼 조선 전기까지 왕실의 절대적 후원을 받으며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사찰이다. 특히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가 매년 참배했고 말년에 이곳에서 지내기도 했을 만큼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사찰이다. 지금까지 청기와 관련 기록이 남겨진 사찰 가운데 회암사가 가장 먼저 등장하기 때문에 회암사를 최초의 청기와건물을 지은 사찰로 보는 것이다.

1465년 원각사 건축때 8만장 소요

사찰 창건 연대와 청기와 사용 내용이 정확하게 밝혀진 사찰로는 10층 석탑(국보 2호)만 남아 있는 지금의 종로 원각사가 꼽힌다. 세조 10년(1464) 4월, 효령대군은 회암사를 원찰로 삼아 회암사에서 원각법회를 열던 중 부처가 현신하는 영험을 겪었다고 세조에게 고한다. 당시 악몽과 피부병에 시달리던 세조는 부처에 의지할 것을 다짐하고 흥복사 중창을 선언했다.

그리고 절 이름을 흥복사에서 원각사로 바꾸고 절 안에 두었던 악학도감과 유생소를 옮기도록 했다. 이때 기와의 조달을 맡았던 홍윤성은 불과 두 달여 만에 청기와 8만장을 구워 원각사에 공급했다. 따라서 원각사는 세조의 지원을 받아 1465년 청기와 8만장을 얹은 법당을 지은 셈이다. 원각사터에서는 또 산스크리트 문양이 새겨진 수막새가 발굴되기도 했다.

그리고 남양주 봉선사는 1469년 세조의 부마 하성부원군 정현조와 상당부원군 한명회, 능성부원군 구치관 등이 절을 짓는데 참여했다. 1472년에 숭은전을 봉선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1480년에 왕명으로 절을 보수했다. 이어 1488년에 전각의 지붕을 청기와로 바꿨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의 기치 아래 수많은 사찰이 폐허가 되었으나, 이처럼 왕실의 비호를 받을 수 있었던 일부 사찰은 오히려 사치의 상징으로까지 불렸던 청기와를 법당 지붕에 얹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또한 서울 종로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인근에 있던 장의사(藏義寺)에도 청기와 건물이 있었다. 이 절은 신라 태종무열왕 6년(659)에 지어져 고려 태조의 국사였던 원종대사 찬유를 비롯해 법인국사 탄문 등 고승이 배출된 사찰이며 이 때문에 고려 국왕들도 자주 절을 찾았다. 기록에서는 조선 초 이 사찰의 스님이 1100명이었고 지붕을 청기와로 덮은 대찰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연산군 일기」에서 연산군이 이 절을 헐어버리고 이곳에 연회장을 꾸며 놀았다는 설명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후 사찰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게 됐다.

청기와 건물을 지은 사찰은 대부분 왕실과 관련이 있는 곳이었고, 도성 안이나 도성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 성종의 명으로 1481년 편찬한 한국의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전남 영광에도 청기와를 법당 지붕에 얹은 사찰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에 재마호사라는 절이 있었고, 조사 당시 주민들은 이 재마호사가 송광사, 백양사, 불갑사 보다 큰 절이었으며 왕이 하사한 청기와가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이 없어 청기와가 얹혀진 사연은 밝혀지지 않았다.

 
고창 선운사 창건당시부터 있었던 건물로 알려진 만세루 지붕 용마루 가운데에 청기와(흰색 원)가 얹혀져 있다.

이외에도 사찰에서의 청기와 관련 기록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찰이 고창 선운사. 이곳에 머물던 행호 극유 스님은 조선 성종 4년(1473) 성종의 작은아버지 덕원군에게 사찰 중창의 뜻을 밝히고 도움을 청했다. 이때 덕원군은 재물과 함께 직접 원문을 써주기까지 했다. 중창불사는 1474년 가을에 완공됐으며,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로 알려진 선운사 만세루 지붕 용마루 가운데에는 지금도 청기와가 얹혀져 있다. 다만 이 청기와가 창건 당시 제작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광해군 후 사라졌다가 근현대 등장

그리고 무학대사가 18나한상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용인 백련사는 본래 법당이었던 요사채 건물의 용마루와 대웅전 용마루에서 고려 때부터 전해오던 청기와 1개씩이 얹혀져 있었다고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1960년대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 또한 해남 대흥사 법당 용마루에 올라앉은 청기와는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의 활동에 따라 호국사찰을 상징하는 징표라는 설명이 있기도 하다. 또 조선시대 광해군이 복원한 것으로 알려진 진주 청곡사 대웅전 지붕에서도 청기와 3장이 발견됐으나 1970년대 도둑맞아 지금은 소재를 알 수 없다.

청기와는 조선 광해군 이후 제작비용과 기술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점차 사라졌으나, 근현대 들어 많은 사찰에서 청기와를 법당 지붕에 얹고 있다. 대표적으로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한 아산 봉곡사가 후대에 청기와를 얹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으며, 서울 수국사는 황금법당에 청기와를 얹어 그 웅장함과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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