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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43. 교단분열

기자명 법보신문

고려 광종 때 선종-화엄종 갈등 표면화

 
의천 스님 진영. 의천은 분열된 교단을 통일하고 왕권의 지배이념 강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훗날 그의 문도와 계승자간에 주도권을 둘러싼 분열이 일어났다.

법을 둘러싼 논쟁으로서의 법담을 넘어, 서로의 날선 대립각이 정치권력과 얽히면서 생겨난 교단의 분열과 분쟁사례는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교파의 정치세력화와 세속화를 동반한 분열과 분쟁은 초기경전인 『법구경』에서 설한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원한을 빨리 버릴 때에만 풀리나니, 이것은 변치 않을 영원한 진리”라는 가르침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치열하기도 했다.

한국불교에서 교단의 분열 역시 불교와 정치권력의 연관관계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불교는 고구려에 처음 전래될 때부터 왕법과 불법이 하나인 것처럼 됨에 따라 정치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백제에서는 정치권력과의 연관이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을 정도로 직접적 관계를 맺었다.

신라 계율종으로부터 시작한 불교종파는 통일신라시대 들어서면서 화엄종과 법상종이 중심이 되었다. 통일신라 초기 최대 종파였던 화엄종은 고구려·백제의 귀족과 신라 귀족의 반목 및 나라 잃은 유민들의 포용문제 등 정치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을 때 귀족사회의 갈등이나 모순을 치유할 정신적 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권력자들은 불법을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승병을 양성하기도 했고, 승병은 불법수호를 넘어 국가적 목적에 동원되거나 귀족세력간의 정치싸움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한국불교에서 교단 갈등을 유발한 분열의 싹이 자라기 시작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왕건 시기엔 선종이 주류

화엄종을 중심으로 한 교종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정치권력과 유착관계를 강화하고 있을 때 선종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9세기 들어 교종사찰에서 기반을 닦은 선종은 9세기 중엽 중국의 회창폐불 이후 유학승들의 귀국이 본격화되면서 구산선문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지눌 스님 진영. 지눌은 종파간 분열이 심각해지고 교단이 부패하자 이를 바로잡는 것은 물론 불교쇄신을 주창하며 정혜결사문을 발표, 결사운동을 벌였다.

선종은 교종이 중앙 정치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기반을 다진 것과 달리 지방호족들의 비호를 받게 됐고, 신라 왕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후 왕건, 견훤 등의 새로운 세력과 서서히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선종과 가까운 관계를 형성했던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왕조를 세웠다. 불교를 신봉했던 왕건은 이때 자손들에게 남긴 유훈이라 할 수 있는 ‘훈요십조’에서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님의 가호에 힘입은 것이므로 선·교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보내 분향 수도하게 하라”고 숭불을 표방하면서도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아 승려의 청탁을 따르게 되면 각 종파가 서로 사찰을 뺏는 다툼을 벌일 것이니 이를 엄히 금하라”며 불교를 국가가 직접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어쨌든 고려초기에는 개경의 호족 출신인 태조 왕건의 영향으로 선종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왕건은 지방으로 분산돼 독자적 기반을 갖춘 각각의 불교세력을 종파로 인정했고, 개경에 각 종파의 근거를 마련해주면서 불교의식을 분담시키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선종과 교종의 분열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고려 광종 시기에 이르러 교단 분열이 수면위로 부상하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광종은 왕실의 왕권 강화 정책을 펴면서 지방 호족세력의 이념적 기반이자 태조의 후광을 받았던 선종을 버리고 화엄종을 택했던 것. 그리고 왕권강화 정책으로 과거제도를 실시면서 승과를 개설해, 승과의 선발 기준으로 균여의 화엄학을 채택했다. 여기에 균여 역시 화엄종의 남악파와 북악파의 갈등을 해소해 통합된 지배이념으로써 광종의 왕권강화 정책을 도왔다.

때문에 지방호족 세력과 친분을 맺고 있던 선종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외면당하면서 전면에서 물러나 와신상담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불교사에서 첫 번째 등장하는 교단분열상은 이렇게 왕권과 직접적으로 연계돼 있었다. 이후 고려초기를 지나 중기로 접어들면서 화엄종과 법상종이 왕권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위세를 떨치던 시기, 지방의 호족세력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던 선종도 서서히 왕권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기득권을 지키려는 교종과 새롭게 왕권에 다가서려는 선종은 상호 대립과 분열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각 종파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시기 불교는 정치적 관계에서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을 받았던 화엄종과 왕실의 외척 및 문벌의 지원을 받았던 유가종, 그리고 지역토호와 하급관리의 지원을 받으며 새롭게 왕권에 다가서는 선종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태조가 훈요십조를 통해 말했듯, 왕권을 가진 입장에서는 교종과 선종의 분열이 통일된 지배이념을 실현하는데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각 종파의 융화를 바탕으로 한 지배이념의 통일화가 필요했고, 왕자 신분으로 출가한 의천(1055~1101)은 이같은 필요사항을 충족시킬 적임자로 떠올랐다. 왕자가 승려의 지도자가 됨으로써 불교세력을 적당히 통합하고 왕권의 통제아래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통합 나섰던 의천 제자들도 분열

송나라에서 천태학을 익힌 의천은 천태종을 창립해 불교교단을 재편하고 선교의 대립과 분열을 극복하는데 나섰다. 의천은 천태학의 회삼귀일을 이념으로 활용했고, 1101년 뛰어난 학승 100명을 봉은사에 모이게 해서 승과를 통해 40명을 선발했다. 그러나 이때 천태종의 승과 이후 의천이 입적하면서 그의 문도와 계승자간에 주도권을 둘러싼 또다른 분열이 일어났다. 선봉사의 대각국사 비문에 법안 종풍의 5산문도가 제외된 이유도 이때의 분열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문도 의천 사후 무려 36년이 지난 시기에 그것도 의천의 자취가 없는 선봉사에 세워졌다. 의천이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종파의 고착화에 기반한 분열상을 해소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고려중기를 지나면서 교종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문벌의 시대가 지고, 무신정권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교종이 위기를 맞았다. 무신정권과 교종은 불편한 관계를 형성했고, 최충헌은 선종세력을 중심으로 불교계 재편을 시도했다. 때문에 12세기말에서 13세기초까지 불교계는 급격한 변화가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변화는 국사(國師)와 왕사(王師)를 책봉하는데 있어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국왕의 입장에서는 국사나 왕사를 매개로 불교계의 지지여론을 흡수하여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12세기 전반에는 문벌출신의 교종 승려가 국사와 왕사 자리를 독점했고, 무신정권이 들어선 12세기 후반에는 선종 출신의 국사와 왕사가 책봉됐다. 그리고 교종의 쇠퇴는 곧 군소 종파의 성립으로 이어져 교종에 가까운 지염업, 율업, 분황종, 소승업 등의 종파가 형성됐다. 물론 여기에는 교종의 분열을 염두에 둔 무신정권의 정책적 고려도 작용했다.

고려 후기 불교 종파 사이의 갈등과 분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무신의 난 등 정치적 변동을 거치면서 더욱 세속화됐다. 불교계 제 종파가 이처럼 각각 왕권, 문벌, 지방 호족 등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본연의 자세를 상실한 채 타락해갈 무렵 등장한 인물이 바로 지눌(1158~1210)이다.

지눌은 1190년 정혜결사문을 발표하면서 불교계 현상을 비판하고 불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주창했다. 지눌에게 부여된 시대적 과제는 분열된 승단을 통합하고 승려의 도덕적 타락과 잘못된 수행풍토를 바로잡는 것이었던 셈이다.
지눌은 이에 따라 결사공동체인 정혜사를 세우고, 교종인 화엄종의 이론을 선종의 수행에 연결시킴으로써 분열된 불교계를 통합하려 노력했다. 즉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괄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천태종의 요세(1163~1245)도 1208년 보조선에서 천태교관으로 사상을 전환하고, 1211년 만덕산에 사찰을 세우고 백련결사를 시작했다. 요세가 훗날 이런 저런 이유로 정치권력에 밀접해지기는 했으나, 지눌과 요세 모두 고려후기에 교단분열을 해소하고 타락상을 바로잡는데 기여했던 인물들이다.

 
일제시대 승려들의 친일행각이 위험수위에 이르자 30본산 주지들이 불교개혁을 주제로 각황사에서 회의를 열고 있다. 사진=민족사 간행 한국불교 100년.

고려 말기인 공민왕 시대에는 신돈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면서 또다시 선종을 밀어내고 화엄종의 천희를 국사로 책봉하는 등 선종계열과 신돈의 분열이 두드러졌다. 공민왕 초기 왕사로 추대돼 분열됐던 선종 각파의 통합을 꾀했던 보우(1301~1382)는 승직임명권을 갖게 됨으로써 고려불교 전체를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신돈이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왕권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자 왕에게 그를 멀리할 것을 주청하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결국 자연스럽게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고려말 신돈은 선종 배척 일관

고려시대가 마감되고 숭유억불의 조선시대가 열리면서 불교계는 분열하고 다툴 사이도 없이 존폐의 기로에 서게됐다. 다만, 조선후기 들어 백파와 초의 사이에서 고려시대 보여줬던 권력투쟁 양상의 분열이 아닌 법담의 한 양식으로 볼 수 있는 ‘선 논쟁’이 벌어져 주목을 끌었다.

백파는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의 3종선을 주장하면서 의리선을 가장 하급선으로 보는 한편 조사선과 여래선을 격외선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초의는 여래선, 조사선, 격외선, 의리선에 대해 『선문염송설화』를 지은 귀곡각운의 설을 인용해 의리선과 격외선, 여래선과 조사선, 활인검과 살인검, 진공과 묘유의 네 가지 측면에서 백파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리고 백파의 견해대로라면 세존이나 혜능도 도를 깨치지 못한 인물이라고 논박했다. 이후 백파와 초의의 문인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때가지 한국불교사에서 보기드문 신선한 논쟁이자 분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불교는 암울했던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시대에 이르러 적지 않은 수의 친일파가 등장하는 등 분열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1945년 광복기에는 혼란을 틈타 종권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이후 불교교단은 비구와 대처간 피를 부르는 이른바 정화시기를 거쳐 종권을 향한 분열과 분쟁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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