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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44. 교단분열 (하)

기자명 법보신문

근현대 비구·대처 절 뺏기서 종권분쟁까지 치열

 
1994년 서의현 총무원장의 3선 강행에 맞서 불교개혁을 기치로 내세운 개혁회의는 종교문제에 간섭하는 공권력과 대치하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불교는 진리를 놓고 그에 대한 진지한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소모적인 다툼에 매달려 분열로 치닫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연구자료에 따르면 1954년 정화운동 이후 한국불교는 무려 40여건의 크고 작은 싸움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지난 반세기 동안 불교계의 관심은 ‘잿밥’에 치우쳐 있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일부에서는 “불교 종단 또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지향할 뿐,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의 영역에 속하는 곳이기 때문에 대립과 갈등이 밥 먹고 숨쉬는 일처럼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스님들이 운영의 주체격인 종단 역시 사람 사는 세상에 있으니 다툼과 대립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원인이 불법(佛法)에 있지 않고 이권과 세력다툼이며 갈등이 결국 폭력으로 발전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60년대 종정·총무원장 동반퇴진

한국불교는 해방시기 이후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 발표를 계기로 시작된 불교정화 과정에서 심각한 분열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색불교의 청산, 청정수행가풍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갖고 시작된 비구 측과 대처 측의 갈등은 상호 사찰을 뺏고 빼앗기는 양상으로 진행됐다.

비록 정화가 비구 측이나 대처 측 모두에게 생존권이 달린 일이기는 했으나, 결국 승자인 비구 측 역시 상처투성이 영광만 남았을 만큼 정화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남겼다. 즉, 권력과의 밀착을 비롯해 삼보정재 탕진 그리고 무자격 승려 양산 등의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진행된 비구-대처간 다툼에서 열세에 놓였던 대처 측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퇴진하자 반격에 나서면서 분규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됐다.

하지만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이 불교분규를 수습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1962년 1월 18일 비구 측과 대처 측은 문교부에서 만나 불교재건위원회 결성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같은해 3월 문교부 주선으로 열린 재건비상종회에 대처 측이 불참한 가운데 15인 위원회를 구성해 새로운 조계종 종헌을 공포하면서 양측은 분열을 봉합하지 못한 채 대립과 분열의 연속선상에 놓이게 됐다.

이에 따라 비구와 대처의 다툼은 사회법에 호소하는 소송과 사찰접수 시도 등으로 이어졌다. 60년대 양측의 소송과 사찰접수 시도는 1963년 흥천사 사찰 점유권 다툼을 비롯해 1964년 대처 측의 종헌 무효소송과 1965년 비구-대처간 ‘종헌 및 종정추대 무효 확인 소송’ 공방으로 이어졌다. 또 1967년 비구-대처 통합논의가 불발되는 와중에 종정 청담 스님과 총무원장 경산 스님간 대립으로 양측이 동반 퇴진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종정과 총무원장의 대립은 종단의 모든 권력이 종정에게 집중된 최초 종헌이 원인이 됐다. 종정은 인사와 재정에 관한 전권을 가진 반면에 총무원장은 종정을 보좌하는 역할에 그치도록 한 것이 화근이 됐던 것. 이같은 종헌은 비구와 대처의 분규 와중에 종정을 비구 측이 맡기로 하면서 종정에게 모든 권한을 몰아주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었기에 결국은 자승자박한 꼴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종정의 권한에 비해 뚜렷한 권한을 갖지 못했던 총무원장이 반발하게 됐던 것이고, 이는 곧 비구 측 내분 양상을 띠면서 가열되다가 결국 모두가 퇴진하는 사태로 일단락하게 된 것이다. 어쨋든 한국불교계는 67년 조계종 종정과 총무원장이 동반퇴진하는 사태를 겪은 이후에도 분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1968년에는 비구와 대처 측이 동국대 총장 후임 인사를 놓고 다시 불화를 겪었고, 대처 측은 불국사 부정 및 난동 사건 등 비구종단의 부패상을 공격했다. 이어 1970년에는 내장사 명도 집행에 항의하는 대처 측의 할복 소동이 있었고, 대처 측은 결국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해 문교부에 등록하면서 비구 측과 결별했다.

70년대와 80년대엔 총무원 양분

그러나 양측의 대립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며, 비구 측은 또 다른 내부 분열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1971년에는 동화사 승려가 부패에 항의하는 뜻으로 조계종 총무원에 뱀이 담긴 소포를 보내기도 했고, 1974년에는 중앙종회에서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는가 하면 불국사에서는 주지 자리를 놓고 분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어 1975년에는 조계종 총무원 재무부장과 교무부장 그리고 수종사 주지가 사기혐의로 구속 된데 이어 관음사 대성암 토지부정사건으로 총무원장이 구속되면서 집행부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처럼 종단이 어수선한 가운데 종정중심제로 종헌이 개정되고, 김대심 등 20여 명의 승려가 총무원을 강제 점거해 종권 탈취를 기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1977년에는 종정중심제를 주장하는 총무원 측과 종헌종법개정을 요구하는 재야 측이 대립하면서 집행부 참여 없이 제49회 임시종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종정추대취소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종정은 비상종령 제37호로 중앙종회 해산을 명령하면서 끝간데 없는 대립으로 치달았다. 결국 양측은 종정 측의 조계사 총무원과 종회 측의 개운사 총무원으로 양분되고 말았다.

조계사와 개운사 양측 총무원의 분열은 1980년 개운사 측이 법적 다툼에서 승소하고 양측이 총선거에 합의하면서 일단락됐으며, 이때 제17대 총무원장에 송월주 스님이 당선됐다.
불교계의 6·70년대 분열은 80년대 들어 종식되는 듯 했으나, 계엄군의 10·27법난 사건 자행으로 또 다른 분란의 씨앗을 낳게 됐다. 조계종은 81년 1월 총무원장 중심제로 종헌을 개정하고 사법기능을 갖춘 호계위원회를 신설해 3권 분립의 모양새를 갖췄다. 이후 80년대는 실권이 사라진 종정과 총무원장의 대립이 아니라 종단 대표자인 총무원장과 대의기구인 종회의 대립이 분열의 주된 현상으로 나타났다.

당시 총무원장과 종회의 분열은 총무원이 주요사찰예산조정안을 신설하고 직영사찰관리법 등 재정과 인사권에 관한 세력간 알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러한 종단 중앙권력기관간의 다툼은 1983년 신흥사 살인사태로 파국을 맞았다. 1983년 8월 6일 신임주지로 부임하기 위해 신흥사에 들어가던 전 총무원 규정부장 일행 14명이 신임주지 부임을 반대하는 신흥사 측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한 것. 이에 정부는 불교계 정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게 됐고, 같은해 9월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98년 다툼은 해외언론도 대서특필

이때 승려대회에서 비상종단운영회의가 설치됐으나, 총무원장 권한 강화와 본말사 폐지 등 중앙집권제 제도개혁안을 담은 새 종헌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비상종단운영회의는 1년여만에 좌초됐다. 그리고 1986년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들어섰다. 1962년부터 시작해 1986년 서의현 총무원장이 취임할 때까지 24년간 무려 25명의 총무원장이 교체되는 바람잘 날 없는 시절을 살아온 조계종의 상황을 고려할 때 서의현 원장의 취임과 순항은 언뜻 종단이 안정된 시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1998년 조계종 종권다툼에는 건장한 용역업체 직언들이 등장하기도 했으며, 양측의 폭력을 동반한 싸움은 해외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불교의 신뢰도를 한 없이 추락시켰다.

그러나 조용한 조계종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8년 총무원장 중심제 종헌종법 개정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강남 봉은사에 또 다른 총무원 현판이 내 걸리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조계사에 사무소를 둔 기존의 총무원에 강남 봉은사에 사무소를 둔 강남 총무원이 생기면서 소위 강남북 양 총무원 시대가 열린 셈이다. 양측은 1992년 정부 중재로 원로회의 주도의 개혁안 마련을 결의하면서 양분 사태를 마감했다.

하지만 1994년 서의현 총무원장이 종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선을 강행하면서 이번에는 구종차원에서 출·재가를 아우르는 개혁의 깃발이 올랐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가 결성돼 조계사에서 구종법회을 열었고,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해 총무원을 점거하면서 개혁회의가 출범했다. 개혁회의는 종회 권한까지 이양 받으며 종단 전반에 걸친 개혁의지를 불태웠고, 선거를 통해 송월주 총무원장이 당선되는 과정까지 종단을 이끌다가 해체했다.

그러나 수많은 불자들의 열정이 담긴 개혁종단 출범에도 불구하고 1997년 불교방송에서 공금횡령사건이 터지고 일부 종회의원들이 총무원 불신임 성명을 발표하는 등 조계종은 바람잘 날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총무원장 선거과정에서 송월주 총무원장의 3선 여부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 개혁과 종헌종법수호를 명분으로 내세운 양측의 갈등은 다시 한번 폭력을 동반한 종권 다툼으로 비화됐다.

당시 사태는 공권력이 투입돼 총무원 청사를 점거하고 있던 정화개혁회의 측을 강제 해산하면서 종식됐으나, 그 후유증은 상당기간 지속됐으며 CNN 등 해외 언론에까지 대서특필되면서 불교에 대한 세간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국불교, 특히 그 중심에 선 조계종의 근현대사는 이렇듯 분열과 분쟁의 연속이었다. 학자들은 조계종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분열상과 관련해 “종단의 출발부터 분열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비구와 대처의 다툼이 있을 당시 비구 측을 승리로 이끄는 일이 급선무가 돼 방법에 대한 불교적 성찰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결과”라는 설명인 것이다. 조계종이 지금이라도 심도 깊게 되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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