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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전 조계종 교육원장 청화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이익 없는 말이라면 알아도 하지 말아야

오늘은 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왜 말을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말을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입이 있으니까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심심하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말을 왜 하느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분분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을 하는 목적, 말을 하는 취지의 본질은 의사소통일 것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하는 어떤 목적이 뚜렷하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른 언어를 통해 상대방에게 전달되어야 그 말에 대한 반응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말은 소통과 교류의 매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계는 이 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지속되고, 유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쓸데 없는 지식 자랑은 똥같은 말

부처님께서 어느 때 나뭇잎을 한 움큼 쥐고 오셔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비구들아, 내가 지금 이 손에 들고 있는 나뭇잎을 저 동산에 있는 나뭇잎들과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많다고 생각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그거야 당연히 부처님 손에 들고 있는 나뭇잎보다 저 숲에 있는 나뭇잎들이 훨씬 많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나뭇잎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뭇잎이 저 숲에 있다. 나의 말도 그와 같다. 내가 알고 있지만 하지 않은 말이 훨씬 더 많다. 내가 너희들에게 하는 말은 얼마 되지 않는다. 왜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겠느냐.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그 말을 너희들에게 해 봤자 너희들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그 말들은 너희들이 들어봤자 수행을 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고 마음을 평안하게 하거나, 고통을 소멸시키거나, 완전한 지혜를 얻거나, 깨달음을 성취하거나 이런 것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이런 것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하는 말은 무슨 말이겠느냐. 너희들에게 말을 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유익함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들에게 하는 말은 ‘이것은 고통이다. 이것은 고통의 원인이다. 이것은 고통을 소멸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을 소멸하는 길에 이르는 것이다’ 등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하는 말들이다. 이러한 말은 너희들 수행의 목적에도 부합하고, 내가 너희들에게 얻도록 하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까닭에 말을 하는 것이다.”

이 사례를 볼 때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깨달음을 통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꼭 사람들에게 유용하다고 판단되고 이익이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만 선별해서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분명하게 선별해서 하신 것입니다. 예컨대 시간적으로 이 지구는 영원할 것인가, 아닌가. 이런 것에 대해서 부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공간적으로 이 지구라는 것이 영원한 것인가, 영원하지 않은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지구가 시간적으로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를 안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그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공간적으로 이 지구가 영원한지 영원하지 않은지를 안다고 해도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예컨대 하루살이가 고작해야 하루를 사는데 그 하루 동안 이 지구가 영원한 것인가 영원하지 않은 것인가를 갖고 고민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주제 파악을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 100년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긴 것이 아닙니다. 그 짧은 시간에 정말 유용하고 가치 있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 그것을 지향해야 하는데 지구가 영원하냐 아니냐, 하늘에 별이 몇 개냐 이러한 것을 알고자 했을 때 이것이 그 사람의 삶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알고 계시지만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유익함을 줄 수 없는 것은 일체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슨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지견이 있다고 해서 쓸데없는 지식자랑을 하기 위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별거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어법을 배워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구분해서 하셨습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유형의 말하는 사람들에 관해 설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똥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똥처럼 말하는 사람은 어떤 말을 하느냐.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아는 것은 모른다고 합니다. 보지 않은 것은 봤다고 하고 본 것을 안 봤다고 합니다. 사실을 전도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똥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말을 똥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똥은 가장 더러운 것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입으로 나온 말이라고 해서, 또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라고 해서, 또는 어떤 상황의 감정에 의해 폭발되는 말이라고 해서 다 쏟아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깨끗한 입을 갖고 있는데 이 깨끗한 입으로 똥 같은 말을 해서 피해를 주고 아픔을 주고, 이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러한 까닭에 말은 항상 생각하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리고 삼가해 말하면 분쟁 없어

둘째는 꽃처럼 말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꽃처럼 말하는 사람은 아까 하신 말을 뒤집은 것입니다. 본 것을 봤다하고, 보지 않은 것을 보지 않았다고 하고,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과 진실에 근거한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실과 진실에 근거해서 하는 말, 그것이 바로 꽃처럼 하는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 꿀처럼 말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꿀처럼 말하는 사람이란 말하는 그 표정이 온화하고 또 그 말하는 음성이 듣기에 좋고 그 말하는 어투에 아주 촉촉한 정감이 있고 그 표현이 마음에 들고 말하는 내용이 오랫동안 감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꿀 같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꿀을 좋아합니다. 꿀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은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똥같이 말하는 사람, 꽃처럼 말하는 사람, 꿀같이 말하는 사람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 부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경전 속에 남기셨을까. 이렇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똥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면서 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겠습니까. 똥 같은 말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있다면 꽃 같은 말을 하고 꿀 같은 말을 하라는 메시지도 있는 것입니다.

꽃 같은 말을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꿀 같은 말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없으니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는 그런 말을 선택해서 언어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른바 꽃 같은 말만하고 꿀 같은 말만 하며 살게 된다면 어째서 말에 의해 상처 받는 사람이 생기고, 말로 말미암아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고, 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지는 그런 일상사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말한 마디에 담긴 영향력, 힘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언어의 구사에 신중해야 하고 말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해서 이것이 옳은 말인가, 정의에 거스르는 말인가 등을 분명히 성찰한 다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 분쟁, 원한 관계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 사이가 평화롭고 상부상조하며 화목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든 불자들은 모두가 행복하고, 혼탁한 이 사회를 정화하는 언어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의하고 노력합시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서울 조계사에서 6월 7일 봉행된 미타재일 및 일요법회에서 전 조계종 교육원장 청화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청화 스님

1944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했다. 1964년 화계사에서 혜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2년 해인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7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돼 등단했다. 1986년 대한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 의장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 공동의장, 1992년부터 2002년까지 실천불교승가회 의장, 1994년 조계종 초심호계위원장을 역임했다.

조계종 11대 중앙종회 의원 및 차석부의장, 12대 중앙종회 의원 및 수석부의장, 13대 중앙종회 의원을 거쳐 2004년 제5대 조계종 교육원장에 취임, 승가교육과 전법활동에 진력하다 2009년 3월 24일 퇴임했다. 스님은 현재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상임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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