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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46. 종정

기자명 법보신문

한암,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선출

불교 종단에서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인 종정은 신성함을 상징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하기 때문에 종통을 계승하면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 어른으로 존중하고 있다. 그러나 종정의 직위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그 역사는 정확하지 않다. 종단 성립의 역사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만큼 그 시대부터 종정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실제 종정이라는 직위를 사용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신라시대를 비롯해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등장하는 적지 않은 수의 종단 역사에서는 종문을 연 종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종정의 직위는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한국불교 역사에서 종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첫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시대 ‘종단을 팔고 조상을 바꾼 매종역조(賣宗易祖)’를 한 인물로 지탄받으며 불교계의 이완용으로 불리고 있는 이회광이다.

원종 이회광이 기록상 최초

 
일제시대 원종 종정 이회광.

이회광은 보운 긍엽 선사의 법맥을 이어 강당을 개설하고 독자적으로 설법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황해도와 평안도를 일컫는 양서와 충청·경상·전라도를 아우르는 삼남의 학인들이 수없이 몰려들었을 정도로 뛰어난 학덕과 명성을 지녔었다. 그 명성은 범해(梵海)가 편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에 “조선왕조 마지막 대강백”으로 기록될 만큼 대단했다.

이처럼 대강백으로 추앙 받던 이회광은 불교연구회와 인연을 맺으면서 변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06년 창립한 불교연구회는 한국불교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명진학교(현 동국대학교 전신)를 설립하기도 했으나 일본 정토종을 표방하며 친일행위를 이어갔다. 그 때문에 불교계 안팎의 비난을 받자 1908년 6월 전국사찰대표자 60여명을 모아 원종(圓宗)을 창립하고, 당시 학인들 사이에 명망이 높았던 이회광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이회광은 이후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일본불교 종파의 힘을 빌리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조동종과 연합 맹약을 체결함으로써 매종역조한 인물로 낙인찍히게 됐다.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연합하는 맹약을 체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교계 내에서 강한 반발이 일어났고, 영호남 지역 선원과 강원을 중심으로 이회광을 비판하는 여론이 들불처럼 번졌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불교의 법맥은 임제종에 있다며 송광사, 범어사, 선암사, 통도사 등을 기반으로 임제종이 창립됐다. 이때 임제종 초대 종정에 선암사의 김경운이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힘을 빌린 원종과 원종에 맞서 조선불교 법맥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창립된 임제종 모두 1912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간판을 내려야 했다. 이후 전통선 보존과 중흥을 갈망하는 수좌들이 자구책 차원에서 선학원을 설립, 정법포교를 통해 불법을 널리 알릴 것임을 밝히고 나서게 됐다. 선학원은 1934년 12월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개편되면서 위상이 안정됐고, 1941년 비구승 40여명이 모인 가운데 유교법회를 열어 선종의 전통을 확인하고 승풍 진작에 노력할 것을 천명하기도 했다.

31본산 체제의 불교계는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통일기관 설립 운동을 꾸준히 전개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30년대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전시체제로 돌입하게 되자 오히려 전시 동원체제 구축을 노린 일제가 불교계 숙원사업이었던 통일기관 설립을 적극 지지하고 나서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됐다. 이에 따라 본사 주지들 사이에 불교계 통일기관 총본산 신축이 공론화 되어 조선불교선교양종의 중심이 되는 총본산 대웅전 신축 불사가 진행됐고, 1938년 10월 드디어 낙성식이 거행됐다. 이때 총본산 이름이 태고 보우의 법맥을 계승한다는 법통의식에 따라 태고사로 결정됐다.

총본산 태고사 건축을 계기로 통일기관 설립의 동력을 확보한 불교계는 1940년 열린 본사주지회의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 대신 ‘조선불교조계종’이라는 종명을 담은 태고사법을 확정해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이어 1941년 6월 조선불교조계종 제1회 중앙종회에서 선거를 통해 방한암 스님을 종정에 선출했다. 총본산 건립과 조계종 탄생 그리고 조계종 이름을 회복한 이후 첫 번째 종정 선출 등 일련의 상황은 일제의 정책적 지원에 따른 것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 전통을 계승한 종단의 설립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한암 스님.

조선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에 추대된 한암 스님은 보조국사 지눌의 선(禪) 사상을 계승해 선을 중흥시켰던 고승. 금강산 장안사, 신계사 등에서 공부하고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 화상으로부터 법을 듣기도 했으며 이후 전국 각지를 다니며 법을 강론했고 통도사 내원선원 조실로 추대돼 선승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어 1925년 봉은사 조실이 되었으나, 이듬해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가 세간으로의 발길을 끊었다.

참선, 염불, 간경, 의식, 가람수호 등 승가 오칙을 강조했던 한암 스님은 오대산에 들어가 오로지 수행과 후학양성에 뜻을 두었으나, 대중의 뜻에 따라 초대 종정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한암과 관련된 일화 중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근거지로 이용할 것을 우려한 국군이 오대산 상원사 법당에 불을 지르려 하자 법당에 앉아 나도 함께 불사르라며 법당을 지켜낸 일은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통합 종단 첫 종정은 효봉 스님

그러나 한국불교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할 종정의 역사는 순탄치 않았다.
불교계는 해방과 함께 교단 개혁활동에 착수했고 과도기적 임시집행부인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또 그해 9월 태고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해 일제의 사찰령을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교단기구 구성과 본말사제를 대체할 도별 교무원제 도입을 결의했다. 이어 기존에 한암 스님이 자리했던 종정의 지위에 해당하는 교정에 박한영 스님을 추대하고 조선불교교헌을 제정 반포했다.

이 교헌에서 조계종 종명이 또다시 ‘조선불교’로 개칭되었다. 이후 1954년 비구·대처 갈등이 표면화되기 전까지 세 명의 교정이 자리를 지켰다. 1대 교정 한영에 이어 2대 교정은 다시 한암, 3대 교정은 만암이었다. 그리고 1954년 5월 이승만의 불교정화 유시가 발표된 이후 비구·대처간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불교계는 승단정화운동의 과도기 상태로 접어들었다. 사찰 소유를 둘러싼 폭력 등 온갖 다툼이 이어졌던 이 과도기는 1962년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비구 승단은 독자적으로 종정을 추대했고, 이 시기 첫 종정이 또한 한암 스님이었다.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된 이후 조선불교 교정에 이어 세 번째로 종정에 추대된 것이다. 그리고 2대 종정은 동산, 3대 종정은 석우, 4대 종정은 효봉 스님이었다.

생사를 건 싸움으로 일관했던 비구·대처 양측은 1962년 군사정부의 힘에 눌려 합의하에 불교재건비상종회를 열어 새로운 종헌을 만들었고, 1962년 4월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을 공식 출범했다. 이때 초대 종정에 비구 측 효봉 스님이 선출됐다. 당시 비구 측이 종정을, 대처 측이 총무원장 직위를 맡기로 합의했으나, 1966년 4월 대처 측 김법룡 총무원장이 물러나자 비구 측 손경산이 총무원장으로 선출됐다. 이로 인해 그동안 외형적으로나마 유지되던 비구·대처의 균형이 무너졌으며 비구 측이 종단의 실권을 모두 장악하게 됐다.

그러나 이때부터 비구 측은 권력을 둘러싼 내분에 휩싸이게 됐고, 종정의 권위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우선 대처승 문제에 있어서 온건파인 손경산과 강경파인 2대 종정 청담 스님이 대립각을 세우는가 싶더니 결국은 종권다툼 양상으로 확대됐고 1967년 해인사 종회에서 종정과 총무원장이 모두 퇴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조계종은 이어 제3대 종정에 윤고암 스님을 선출했다. 고암이 연임해 4대 종정의 자리에 있던 중 다시 손경산이 총무원장으로 되돌아왔고, 손경산 총무원장 집행부에서 올린 사회국장 해임안을 종정이 거부하면서 종정 권한 문제를 둘러싼 다툼이 불거졌다. 결국 1974년 고암 종정이 물러나고 제5대 종정으로 서옹 스님이 추대됐다. 그러나 서옹 종정 역시 종정 친정체제에 나서자 손경산 집행부가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성철 스님, 80년대 6·7대 역임

그러나 손경산 원장은 토지 매각대금 전용 혐의로 조계종 사상 최초로 현직 총무원장 구속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퇴진하게 됐다. 이후 송서암, 박기종, 고경덕, 김자운 등이 총무원장으로 선출됐다가 물러나고 1977년 김혜정이 총무원장으로 선출됐으나, 김혜정 총무원장이 서옹 종정 측 인물이라는 점이 문제가 돼 이에 반기를 든 종회 중심의 재야세력이 집행부에 맞서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한불교조계종 6·7대 종정 성철 스님.

종회 측은 서옹 종정 불신임안을 통과시킨데 이어 종정직 해임 확인 청구소송으로 종정을 압박했고, 종정은 종회 해산 명령으로 맞섰다. 이에 종회 측은 1978년 해인사 종회에서 채벽암 스님을 종정 직무대행으로 추대하고 서울 개운사에 임시 총무원 간판을 내걸었다. 종단의 두 총무원 양분사태는 80년대 들어 양측이 총선거에 합의하면서 일단락 됐으나, 80년 4월 6일 치러진 선거에서 총무원장과 종회 집행부까지 개운사 측이 독식하게 되자 조계사 측이 반발하면서 종정 추대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1980년 10월 27일 법난을 겪고 나서 11월 8일 정화중흥회의를 발족, 종헌을 개정하면서 종정에 성철 스님이 추대됐다. 그러나 이때 정화중흥회의가 총무원 중심제로의 종헌을 제정하면서 분란이 이어지게 됐다. 종헌 개정에 따라 총무원장이 본말사 주지 임명에 개입하면서 총무원은 각종 비리와 부패의 진원지가 되다시피 했다. 그 때문에 81년 이후 1년 동안 4명의 총무원장이 교체됐고 83년에는 신흥사 주지 교체 인사를 둘러싼 승려살인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어지러운 시대였다.

조계종 6·7대 종정을 역임한 성철 스님의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가르침이 열반 후 널리 회자되면서 한 때 한국불교 중흥의 기운이 싹트는 듯 했으나, 불교계는 그 기운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고 종정이 관련된 내부 다툼은 98년까지 이어지면서 그 권위가 상당부분 상처를 입기도 했다. 성철 스님에 이어 8대 종 서암, 9대 종정에 월하, 10대 종정을 혜암 스님이 역임했고 11대 종정에 오른 법전 스님이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편 태고종은 비구·대처 다툼에서 밀려나 1970년 창종했으나 종정의 연원을 제1대 교정 박한영 스님에 두고 한암, 만암, 묵담의 계보를 이어 박대륜을 초대 종정에 임명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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