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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효 교수의 다시 읽는 신심명] ⑩존재론적 사유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의 계율은 선정에 들기 위한 방편
도덕적 관점으론 여래 마음 이해 못해

다시 『신심명』의 원문을 보자.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툼은 마음의 병이 되나니(違順相爭 是謂心病),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不識玄妙 徒勞念靜).”혹시 독자들 중에 원문의 진도가 늦고 설명이 많다고 걱정하는 분이 있겠으나, 그것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리라. 충분한 사전 설명으로 원문 진도가 뒤에 빨리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승찬 대사의 『신심명』은 우리에게 존재론적 사유를 권장하지, 도덕주의적 사유를 설파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 전통문화는 도덕주의적 순수주의에 너무 얽매어 사유의 깊이와 소견의 창조적 힘을 빠뜨리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경향이 짙다. 이것이 한국의 병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런 말은 불교의 계(戒)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물음을 불러 온다. 불교의 계는 기독교와 주자학처럼 도덕주의적 진리를 설파하기 위함이 아니고, 선정(禪定)에 들어가기 위해 마음의 끄달림을 막기 위함이겠다.

한국불교의 가장 큰 약점은 수행을 너무 도덕주의적 순수성으로 해석해서 교조적 사고방식을 가까이 하여 부처님의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길을 멀리하는 데에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아마도 주자학의 영향에 기인한 소치가 아닌지 모르겠다. 조선시대 정도전으로부터 포문이 열린 주자학의 강력한 배불(排佛) 이데올로기는 불교가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이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길은 불교를 도덕주의로 포장하는 길이겠다.
 
불교가 도덕주의의 생존방식을 선택함으로써 한국불교는 대승을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소승적 사고방식에서 헤어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소승적 사고방식은 도덕적 범주를 기준으로 삼고 있음에 반하여, 대승적 사고방식은 존재론적 사고방식을 여래의 마음이라고 여기는 데에 있다. 존재론적 사고방식은 언듯 와닿지 않는 추상적 표현이다. 그러나 달리 다른 뾰족한 대안이 없다.

존재론적 사고방식은 비소유론적 사고방식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도덕적 사고방식은 승찬 대사의 말씀처럼 ‘어긋남과 따름’을 분별하여 마음 안에서 서로 싸우는 심리를 말한다. 도덕주의적 사고방식은 어긋남과 따름을 갈라 보기에 선악의 소유론적 이원론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다. 지난번에 원효 대사의 이른바 파계를 일예로서 잠시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제 그것을 좀 더 심도 있게 성찰해 보자.

원효 대사가 성욕의 충동 때문에 요석 공주와 통정을 했다는 것은 대사를 너무 모르는 무식한 소리다.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는 대사의 깊은 마음을 잘 묘사하고 있는 걸작이다. 규범을 지켰다는 도덕의식의 소유를 깨뜨리고 일체와 한마음으로 회통하는 존재론적 사유가 되기 위하여 원효 대사는 고귀한 학승의 권위를 던져버려야 했다.

존재론은 모든 분별을 녹여버리는 사유다. 존재는 개별적이고 명사적인 존재자로 지명 가능한 독립적 실체개념을 없애고, 모든 명사적 주어들을 오직 하나의 동사로 통일시키는 사유다. (하늘, 땅, 구름, 사람들, 짐승들 등이 존재한다.) 존재(동사)와 존재자(명사)는 다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사상인데, 나의 글에서 여러 번 반복된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

존재론적 사유는 원효 대사가 강조한 일심(一心)사상의 핵심이다. 일심은 우주심처럼 우주 삼라만상을 마음으로 융섭하는 의미다. 존재론적 사유는 도덕적 규범이 갈라놓은 어긋남/따름, 선/악, 귀족/평민, 승려/대중 등의 차별을 다 지운다.

파계의 순간에 대사는 기존의 습득한 권위를 다 무너뜨리고, 그는 세인들의 무시와 모멸 속에서 철저한 하심의 경지로 들어갔다. 이광수의 사상처럼 대사는 도도한 학승의 자리를 버리고, 전쟁 시기에 의지처 없던 중생들에게 보살 스님으로 다시 태어났다. 여래의 마음은 존재론적 사고방식의 생활화다. 이 사고는 도덕을 함의하나, 도덕은 결코 현묘한 존재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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