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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47. 독립운동가

기자명 법보신문

친일 원종에 맞서 임제종 세운 만해-박한영

김연일의 제주 법정사 봉기가 불교계 첫 무력항쟁
비구니 상근은 자금조달 … 신상완은 日 회담 동행
 
왼쪽부터 불교계 독립운동의 핵심 만해 스님, 민족대표로 3·1운동 참여한 용성 스님, 한성임시정부 불교대표 한영 스님, 의병활동 후 출가해 독립투신한 운허 스님.

“아등은 기(起) 하였노라. 대한의 국민으로서 대한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여 2천년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대한불교를 일본화와 절멸(絶滅)에서 구하기 위해 아 7천의 대한 승니(僧尼)는 결속하고 기(起)하였노니 시사보국(矢死報國)의 발원과 중의경생(重義輕生)의 이 의기(義氣)를 뉘 막으며 무엇이 막으리오. 한번 결속하여 분기(奮起)한 아등은 대원(大願)을 성취하기까지 오직 전진하고 혈전(血戰)할 뿐인저.”

1919년 11월 15일 범어사 주지 오성월을 비롯한 12인이 불교계 대표 이름으로 상해에서 발표한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의 이 내용은 독립운동에 나선 불교계의 각오가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불교계 항일독립운동은 1919년 3·1만세운동을 기점으로 다양하게 전개되기 시작했고, 11월 15일 상해에서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를 발표한 이후 더욱 적극적인 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불교계 항일운동은 3·1만세운동 이전에도 있었다. 1895년 8월 민비 시해사건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을 때, 조직적이지는 않았으나 스님들이 개별적으로 참가했던 것. 그 중 강원도 건봉사의 창기 스님은 여주 의병 대장 민룡호의 비밀 편지를 운현궁에 전달하려다가 붙잡혀 한성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이어 1905년 일제 통감정치가 강행된 후 1907년 의병이 봉기했을 때는 의병장을 지낸 박순근, 경봉 김재홍, 운허 용하, 응송 박영희 등 개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 더욱 많았다. 특히 운허는 의병활동을 거쳐 출가 후에도 직접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고, 1936년 귀국한 이후에는 창씨개명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독립 의지를 펼쳐 보였으며 봉선사에 불교강원을 설립해 후학을 양성하는 등 불교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정미의병 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스님들은 여주 신륵사 스님 9명과 서울 동대문 밖 원흥사 스님 3명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어 불교계 항일독립운동은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이때까지 나타난 모습은 불교계 전체가 아니라 개인들의 참여에 국한됐던 한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불교계가 단독으로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은 1910년 8월 29일 강제합병 이후 원종에 맞서서 설립된 임제종의 자주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불교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던 불교연구회의 주축 세력이 만든 원종이 종정 이회광을 앞세워 일본 조동종과 맹약을 맺으며 한일불교의 병합을 추진하고 나서자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석전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오성월 스님 등은 전국 사찰을 찾아 격문을 돌리며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합병 반대운동을 펼친 데 이어, 1911년 1월 영호남 승려들을 모아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을 세웠다.

이때 임제종 종정에 선암사 김경운 스님을 선정하고 만해 스님이 나이 많은 경운 스님을 대신해 관장 대리로 종무를 보기 시작했다. 당시 범어사 주지 오성월, 담해 덕기, 경산, 김상호, 김법린 스님 등이 만해·박한영 스님과 더불어 친일파 원종 이회광 일파에 대적하며 투쟁했다.

때문에 임제종은 단순히 한 불교종파의 생멸을 떠나 한일합방 초기 일본에 맞선 항일투쟁의 측면에서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 만해 스님과 더불어 불교계 독립운동의 한 축을 형성했던 인물이 바로 박한영 스님이다. 그는 불교유신의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만해와 함께 유신운동을 펼쳤고, 임제종 운동도 이끌었다. 그리고 3·1운동 직후 서울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에 월정사 이종욱과 함께 불교대표로 참여하는 등 열정적인 독립운동을 펼치는 동시에 불교근대화에 기여하다 1948년 정읍 내장사에서 입적했다. 일제하 불교계 독립운동은 이렇듯 직접적인 항일투쟁에 앞서 간접적 저항 및 식민통치정책과 친일정책에 대한 극복으로부터 시작됐다.

1930년 비밀지하조직 ‘만당’ 결성

그리고 1918년 10월 뜻하지 않게 제주도에서 스님들의 첫 번째 항일무장투쟁이 일어났다. 제주도 법정사 스님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연일을 비롯해 강창규, 방동화, 김상언 등 스님 12명이 주도한 이 독립운동은 1918년 10월 5일 제주도 좌면 도순리 법정사에서 봉기해 중문 경찰주재소와 일본인 관헌 및 상인들을 대상으로 투쟁한 불교계 최초의 조직적 무력투쟁이다. 당시 스스로를 불무황제(佛務皇帝)라 칭했던 김연일은 “왜노들을 섬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고 대중을 설득해 봉기군을 400여명이나 모으기도 했으나, 채 뜻을 펴지 못하고 진압 당했다.

그리고 1919년. 마침내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에서의 불교계 대표는 널리 알려진 대로 만해와 백용성 스님이다. 특히 만해 스님은 최린과 3·1운동을 협의한 이후 불교계 참여를 독려하며 직접 부산 범어사 오성월 스님 등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만해는 2월 28일 독립선언서 1만 매를 받아 서울 계동 자신의 집에서 기다리던 중앙학림 학생 김법린, 김상헌, 백성욱, 정병헌, 오택언, 신상완, 김규현, 김봉신, 김대용과 중앙학교 학생 박민오 등 10명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네주며 3월 1일 오후 2시 이후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했다.

이날 만해는 3·1운동 이후 불교독립운동을 이끌어간 이들 10명의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들과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구국의 명장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후예임을 명심하여 불교청년의 기백을 과시하라”며 결연한 각오로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불교계 3·1운동은 서울에 이어 만해의 제자들에 의해 해인사, 범어사, 통도사, 동화사 등 전국 각지로 이어졌다.

이중 해인사 만세운동이 가장 크게 일어났으며 관련 내용은 최범술 스님의 회고록 『청춘은 아름다워라』에 자세히 기록돼 전하고 있다. 특히 해인사 만세운동 당시 활동했던 박달준 스님은 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하고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21년 군자금 모금 중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 불교계 만세운동 중 봉선사만은 서울중앙학림 학생들과 직접적 연관이 없었다. 봉선사는 재적승 이순재를 비롯해 김성숙, 강완수, 현일성, 김석로 스님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물론 김성숙이 만해와 인연이 있기는 했으나 김성숙은 중앙학림 학생이 아니었다. 김성숙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투신해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스님 출신으로는 가장 뛰어난 독립운동 업적을 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불교계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은 3·1만세운동을 계기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불교계 독립운동의 선구자이자 핵심으로 불리는 만해는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일본에 건너나 일본 상황을 살펴보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유학생들과 교분을 쌓기도 했다. 이어 원종에 대항해 조동종 운동을 주도한 이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하기도 하고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돌아보기도 했다. 특히 3·1운동 이후 많은 민족대표들이 변절의 길을 걸었으나 만해 만큼은 끝까지 자존심을 지켰고, 해외 망명이 아닌 국내에 남아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펼치다가 1944년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이외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백용성 스님이나 백성욱, 김법린 등 많은 스님들은 후세의 노력으로 독립운동 활약상이 널리 알려졌으나, 비구니 상근 스님 만큼은 상대적으로 아직까지도 생소한 인물이다. 당시 숭인동 청룡사 주지였던 상근 스님은 한용운, 백용성, 백초월, 신상완 스님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조달하며 불교계 독립투쟁에 크게 기여했다.

3·1만세운동 이후 불교계 독립운동은 상해임시정부와 교감하며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됐다. 한성임시정부 국민대회 취지서 발표 때 25인 대표로 박한영과 이종욱이 참여한 것을 비롯해 만해의 지시로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중앙학림의 젊은 스님들은 인사동 신상완의 집을 본부로 새로운 독립운동 전개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신상완, 백성욱, 김법린, 김대용을 상해로 밀파했고 이들 중 김법린과 김대용은 임정 국내 파견원으로 귀국해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또 건봉사 정남용 스님은 대동단 활동에 적극 개입했고, 월정사 송세호 스님은 청년들이 조직한 항일독립운동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서 활동했다. 송세호는 임정 재무부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어 백초월 스님은 한국민단본부 항일비밀단체를 조직하고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는가 하면 혁신공보를 간행해 국민들의 독립의식 고취에 나서기도 했다. 또 신상완은 임시정부 내무부 강원도 특파원으로 활동했고, 여운형을 보좌해 일본 정부 당국자와의 회담에 동행하기도 했다. 1920년 12월 보안법 및 정치범죄 처벌령 등 위반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김상호는 임정 국내 비밀통신 사무를 담당했으며 1920년 6월 청년 승려 도진호와 함께 조선불교청년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송세호는 임시정부 재무위원 활동

1920년대 이후 항일운동으로는 1930년 만당 결성이 대표적이다. 1924년 이용조, 조학유, 김상호, 김법린이 불교계 현실을 비판하면서 불교청년운동의 부진 극복을 위해 동지들을 대상으로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기로 결의한 이후 1930년 만해를 당수로 만당을 결성했다. 만당은 선언문을 통해 “보라 3천년 법성(法城)이 허물어져 가는 꼴을. 들으라 2천만 동포가 헐떡이는 소리를.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의분에서 감연히 일어선다. 이 법성을 지키기 위하여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라고 설립 취지를 명확히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배후에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이라는 단체를 조직해 전국조직화에 나섰다가 외부인의 밀고로 와해됐다.

이후로는 1942년 10월 일제가 우리말과 글의 연구에 대한 탄압책으로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검거하는 사건이 벌어져 최범술이 잡혀가는 등 해방을 맞을 때까지 불교계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운동은 국내외에서 지속됐다. 이같은 불교계 독립운동 사실은 일제의 종교침략에 대한 호법 정신을 바탕으로 일제 식민지지배에 항거해 조국의 광복을 쟁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뚜렷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불교계 독립운동 역사는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민족사)』을 펴낸 임혜봉 스님이나 근현대불교사 연구에 천착해온 김광식 등에 의해 자세히 밝혀지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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