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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만다라] 69. 말을 다스리는 이유

기자명 법보신문

남의 종교에 상처 내고도 천국 간다는 이상한 종교

 
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조계사 원심회 김장경 회장.

말을 삼가고 마음을 억제하고
몸으로 악한 일을 말아야 한다
이 세 가지 덕으로 깨끗이 하라
그러면 옛 성인이 말씀한 그 길에 이르리라.   
                                                       - 『법구경』

우리의 삶은 습관의 연속이다. 어제 남을 흉보는 습관을 몸에 지녔다면 오늘도 그 습관에 머물러 있기가 쉽다. 이러한 습관이 좋은 습관이 아니라고 스스로 깨달을 때 우리는 나쁜 습관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 습관은 이처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습관이 뭉쳐지면 관념이 생기고 관념은 사회 관습을 만든다.

사회의 관습은 사회의 통념이 되어 공업(共業)을 만들어서 함께 고통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습관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 곧 업(業)을 맑히는 행위인 것이다. 업을 맑히기 위해서는 습관을 고쳐야 하고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는 하루의 삶을 바르게 살아야 한다. 하루의 삶을 바르게 사는 근본이 어렵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바로 불교의 시작이다.

강의 근원은 한 잔의 물로 넘치는데서(濫觴) 시작하지만, 그 한 잔의 물은 드디어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어 흘러간다. 그와 같이 습관을 고치는 근원도 우리의 몸과 입과 마음을 통해서 고쳐진다고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요즈음 불자님들의 자제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출가사문도 결혼식장에 가는 일이 자주 생긴다. 결혼식장이라는 곳이 가족 친지가 다 모이다 보니 종교도 다양하고 생활수준도 가지각색이다. 빈부의 격차를 느끼는가하면 가족 구성원이나 참석자의 면면이 서로 보여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요즈음 부쩍 마음에 걸리는 일은 주례사들의 일방적인 언어 폭력이다.

결혼하는 양가가 다 불자이기도 하고 때로는 어느 한쪽이 불자일 때 스님들도 시간을 내어서 축하를 해주기 위하여 참석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한 자리에서 몰상식한 주례사들은 스님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아 가면서 자기 종교를 떠들어 대는 경우를 많이 만나게 된다. 스님이 결혼식에 참석할 정도면 양가 중에 어느 한쪽은 불자임이 분명하고 참석자도 불자가 대부분이다.

편안함 주는 말이 ‘언어의 德’

참석한 사람 중에도 사람마다 종교가 다르다. 굳이 함께 즐겁고 행복해야 할 자리에서 까지 종교를 편파적으로 주장하거나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장소도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의 종교를 주장하는 언어의 습관이 있다면 그 나쁜 습관을 고쳐야 하고 일부러 마음을 나쁘게 썼다면 남의 결혼식에 주례사로 서서는 안 된다. 신혼부부의 행복을 가르치는 주례사가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없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예의도 없다면 그는 이미 주례사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언어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를 종교의 이름으로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신의 사랑을 받아서 천당을 간다면 그들의 신 또한 유치하기 짝이 없는 꼴이 될 것이다. 언어로 짓는 악행은 사람들이 직접적인 상처를 내지 않는다고 안이하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언어로 받은 상처는 그 깊이가 깊기 때문에 제일 먼저 다스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언어의 덕과 몸의 덕과 마음의 덕이 결국은 우리의 삶을 향기롭게 하고 편안하게 한다. 언어의 덕이란 상대방의 마음을 살펴서 편안한 말을 하는 습관이다. 몸의 덕이란 나의 몸으로 짓는 행위가 다른 이에게 해로움을 끼치지 않는 행동을 말한다. 서로의 행위를 통해서 신뢰를 쌓아가고 함께 선한 일을 실천해 나간다면 몸으로 짓는 덕이 될 것이다. 마음의 덕이란 남을 향한 끝없는 배려이다. 전직 대통령이 바위 위에서 몸을 날려서 투신자살을 하였다.

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했는지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의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것으로 끝이겠지만, 불교에는 고정된 운명은 없다. 끝없이 이루어지고 변멸해 가는 연기의 현상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목숨을 끊었는데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이 너무나 삭막하다.

누가 그를 바위 위에서 몸을 날리게 하였는가를 묻지 않는다면 세상이 너무나 선하지 못하다. 세상의 고통과 불행은 모두 우리의 책임인 것이다. 우리가 착하지 못한 악업의 책임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멀리 있는 구세주를 믿으려하지 말고 가까이에 자기의 책임 하에 있는 자신의 몸과 입과 마음을 다스리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또는 권력의 힘으로 남을 배려하지 않고 파벌을 조장한다면 입으로 백날 서로의 벽을 넘자고 하더라도 그 벽의 높이는 날로 더해갈 것이다. 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오늘날 한국사회는 참다운 가치도 세우지 못하고서 서로 아우성만 치고 있다.

종교보다 살만한 세상이 우선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야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애도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변태적인 현상인 것이다. 종교를 떠나서 그리고 권력의 강자와 약자의 굴레를 벗어나서 책임지고 참회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일상생활의 평화로운 풍토를 조성해 가야한다.

그것이 종교의 힘을 등에 업고 천당을 갈구하기 이전에 사람이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위해서 제일 먼저 자신의 신구의(身口意) 3업을 잘 다스리라는 부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본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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