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라싸를 가다] 12.긍정의 에너지 샘솟는 조캉 [下]

기자명 법보신문

파드마삼바바의 자비로운 미소 여전한데…

 

티베트에 불교를 전승한 인도의 고승 파드마삼바바.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우리가 기대고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매일 아침 일체의 인연들을 맞이하는 이 세상, 우리는 세상의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하면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로를 부대끼게 하며 살아갈 뿐이다. 여기는 어디인가. 아주 가끔은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떠돌고 있는 나를 측은하게 여겨 삼독(三毒)을 내려놓고 본디 청정했던 마음을 찾는다며 길을 나선다. 순례자가 되어 잠시 잠깐 기쁨을 맛본다.

그러나 그 동안 내가 지은 인연들과 욕망은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일분일초 동안 일었던 참회의 마음도, 청정한 마음도 신기루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는 다시 삼독에 이끌려 일상으로 돌아온다. 누군가의 힘에 의해 강제로 온 것도 아닌데 매번 자기 집처럼 익숙하게 돌아오는 이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바로 윤회의 세상이다. 윤회의 세상은 욕망이란 그물이 너무나도 촘촘해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 삼독의 그물에 걸려 있는 한, 욕심을 내려놓으려 어쩌다 수행도 하고 마음을 비우려 길을 나서 보지만 허망하게 다시 윤회의 세상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부처님 위신력으로 조캉 영원하길”

욕망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그 길은 일체의 장애와 걸림에서 벗어나 완벽하고도 영원한 행복의 가르침을 깨달으신 부처님의 지혜를 따르는 것이리라. 달라이라마는 “남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이 되기 위한 희망의 씨앗”이라고 강설하곤 하셨다.

내가 받은 일체의 고통을 다른 이의 고통이 사라지게 하는 최상의 도구로 여기는 참회의 마음,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이웃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자비의 마음이 항상(恒常) 한다면 그것이 곧 보리심이며 불성의 씨앗이라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티베트 불교의 최대 종파인 겔룩파를 창시한 총카파(1357~1419년) 대사는 『보리도등론』(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관한 주석서를 통해 보리심의 각성에 따른 이타심과 이타심을 증장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자비로운 가르침으로 안내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의 전설적인 스승인 총카파 대사는 “분별심을 가진 일체의 존재들은 그 어떤 행동을 하건 스스로의 행복을 갈망하기 마련이며 고통을 바라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하셨다. 그러한 가르침은 나(我)와 다른 이(他人)가 다르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행복을 나누려는 존귀한 존재라는, 그러한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분별과 삼독을 끊어 없앨 수 있다는 지혜의 길로 귀결된다.

부처님께서는 정각에 오르신 후 “내가 새롭게 깨달은 것은 없다. 본래 나 자신은 부족한 것이 없었으며 완전한 존재였다. 일체의 생명 역시 그러하다”라고 이르셨다.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일체의 생명들이 곧 ‘나’이며 부처님의 성품을 지닌 부처의 아들임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각(自覺)은 삼독을 버리고 자비심을 증득하려 하는, 이웃과 행복을 나누려 하는 영성의 본성이다.

본래 존귀했던 존재들 틈에 끼어 조캉의 미로에 몸을 맡겼다. 눈이 부셔 똑바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맑디맑은 라싸의 하늘 아래에 있다가 곧바로 조캉의 어둠으로 들어온 터라 한참 동안 머리와 눈이 멍하다. ‘어둠’은 두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힘을 지닌다. 그래서일까,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금시라도 미로의 끝인 어둠 속 저편에서 티베트의 불보살님과 신장님, 신화적인 스승님들이 구름처럼 무리를 지어 내려오실 듯하다. 상상 속에 스치듯 지나간 광경이지만 인연의 감사함에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의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조캉의 여느 순례자들처럼 맑은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조캉과 인연을 맺은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의 위신력과 수미산을 지켜온 오랜 스승님들의 위없는 원력으로 티베트의 영성이, 티베트의 문화가, 티베트의 언어가, 티베트의 생명들이 영원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옴마니 반메훔 옴마니 반메훔 옴마니 반메훔.”

 
긍정의 에너지를 내뿜는 라싸의 중심 조캉에는 파드마삼바바(사진 위)와 총카파 대사 등 티베트 고승들의 존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고승들의 자비로운 미소가 여전하기에 이곳에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기도를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두컴컴한 조캉의 미로 좌우로는 버터 램프의 불꽃들이 잔잔하게 연무를 추며 고요히 타오른다. 아마도 저 램프들은 수많은 순례자와 민초들에게 자신을 태워 무명(無明)을 물리치고 빛을 보시한 연기(緣起) 보살이리라.

램프의 불꽃 하나하나는 티베트인들이 꿈꾸는 천신들의 세상이며 불보살님들이 상주하는 불국토와 미륵부처님의 극락정토를 의미한다. 장엄하고도 신이한 조캉이 라싸의 중심에 나투셨던 647년, 그 시절부터 지금껏 버터 램프들은 1300년 동안 쉼 없이 자신을 보시해 순례자들에게 희망을 전하면서 신화적인 스승들의 숨결이 숨 쉬는 법당으로 안내했을 것이다. 코끝을 자극하던 버터 램프의 그을음도 이젠 자연스러워졌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램프의 얼굴에선 따스한 영롱함이 배어 나온다. 그 영롱함은 잠시 눈길을 잡을 만큼 포근하다.

‘티베트 불교 왕국’의 중심이며 완성을 의미하는 조캉. ‘티베트 불교 왕국’을 발원하면서 조성한 조캉의 법당 곳곳에는 ‘티베트 불교 왕국’의 기초를 금강처럼 단단하게 다지는 기초 불사에서부터 티베트 불보살님들의 가르침이 시방삼세(十方三世)에 두루 영원할 수 있도록 공덕을 쌓으신 스승님들이 부처님과 함께 주석하고 계시다. 그리고 신화적인 스승님들은 오늘도 자비의 미소로서 순례자들을 맞이하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한 티베트의 불교 이야기를 설하신다.

자비의 미소가 여전한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와 총카파 대사의 존상을 친견하고 나니 이야기가 아닌 신화라는 믿음이 더해진다. 티베트 왕국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는 7세기경으로, 이후 200년 동안 티베트는 중앙아시아의 패권자로 군림하면서 실크로드의 수많은 도시들을 통치했다. 당의 수도인 장안을 함락시키고 해마다 수만필의 비단을 조공받기도 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러한 역사적인 진실을 망각한 채 “티베트는 수 천 년 동안 우리의 속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 국가였던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억측에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티베트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송첸 깜포 대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민족의 정신적인 통합을 완성하고자 했다. 중국과 네팔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두 나라의 불교를 수용했으며 이후 조캉을 비롯한 수 없이 많은 도량들을 조성했다. 티베트에서 불교가 교학적으로, 수행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763년, 송첸 깜포의 고손자인 티송 데첸 황제는 당의 수도인 장안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보낸 뒤 곧바로 인도 불교의 大학자였던 산타라크시타(Santaraksita)와 파드마삼바바를 초청한다.

티송 데첸은 두 스승의 도움으로 티베트 최초의 사원인 삼예(Samye)를 건립하고 스님들을 양성하는 교육 체계를 수립한다. 이것은 티베트 최초로 승단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삼예에서는 인도 종파와 중국 종파의 사상을 모두 가르쳤으며 3년여 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인도의 학자들이 중국의 학자들을 누르고 승리하면서 티베트는 인도 불교의 교학과 수행 체계를 전승하게 된다.

두 스승이 티베트에 인도 불교를 전승하는 과정은, 특히 파드마삼바바의 노력은 신화에 가까울 정도로 신비스럽다. 두 스승이 티베트에 왔을 때는 토속 신앙인 뵌교(Bon)의 힘이 여전히 강력했다. 달라이라마 역시 티베트의 역사를 공부했기에 두 스승의 행장에 대해 잘 기억하고 있다.

“황제께선 산타라크시타를 초빙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뵌교의 교도들은 산타라크시타가 불교를 설하자, 신들이 너무나 분노해 폭풍과 번개, 홍수를 내렸으며 이것은 불교를 용납할 수 없다는 신들의 계시라고 경고했습니다. 삼예 사원을 지을 때도 같은 일이 반복됐습니다. 석공들이 낮에 열심히 벽돌을 쌓았지만 밤이 되면 성난 뵌교의 정령들이 내려와 벽돌을 허물었다고 합니다.

뵌교의 교도들은 이것을 새로운 종교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산타라크시타는 황제에게 ‘이제 물리적 실체를 조종할 힘을 가진 스승이 필요하다’고 조언합니다. 그 스승은 기적을 행할 사람이었으며 그 스승이 바로 파드마삼바바입니다. 파드마삼바바는 7일 동안 삼예 사원을 지을 곳에 앉아 명상에 들었고 정령들의 방해를 일시에 잠재우고 사원을 완성했습니다.”

 
당나라 웬쳉 공주가 티베트 황제에게 시집오면서 모셔온 조우 부처님이 철창에 갇혀 있어 안쓰럽다.

과학적 탐구와 논리적인 토론에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수승한 달라이라마라 할지라도 여느 티베트인들처럼 스승들의 신화 같은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는다. 달라이라마는 “구루 린포체(위대한 성취자)인 파드마삼바바는 정령들과의 신비스런 전투에서 이겼을 땐 바위를 손으로 눌러 신령스런 표시를 남겼으며 보다 빨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여러 곳에, 그것도 같은 시간대에 몸을 나투셨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며 “그러한 행동들은 유체이탈과 같은 과학적인 설명보다는 무한의 광명을 보이신 아미타부처님의 화신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파드마삼바바의 전법을 부처님의 원대한 활동으로 간주한 것이다.

신화에 가까운 파드마삼바바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티베트의 순례자들은 그러한 설화들을 ‘그냥’ 믿고 따른다.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지만 밀교 제일 수행자인 파드마삼바바의 가르침을 전승한 수많은 제자들이 스승의 화신이 되어 티베트 전역에서 일시에 공부를 지도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신화를 사실로 받아들여 그대로 믿게 되었을 법도 하다.

신화를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드마삼바바의 존상 앞에서 갸우뚱 거리는 표정이 불경스러웠을까, 조캉의 중앙 법당에 앉아 계시던 총카파 대사의 미소가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총카파 대사는 티베트 역사를 대표하는 개혁승이다. 1370년대 티베트 불교는 여러 종파로 갈라져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으며 승려들의 윤리적인 타락 역시 심각한 수준이었다.

총카파 대사는 윤리적으로 부패한 승단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었으며 특히 정치적인 주도권을 탐하려는 무리들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총카파 대사는 불교의 순수한 뿌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엄격한 규율과 학술적 우수성을 따라야 한다고 주창한다. 그것은 티베트 불교를 일시에 개혁하기 위한 시대적인 요구였다. 그리고 결국엔 인도 불교의 교리적, 수행적 전통에 바탕을 둔 겔룩파를 창시한다. 그 전통은 달라이라마를 통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스승들의 신화, 의심하는 이 없어

중앙 법당에서 이어진 어두운 미로를 지나 밝은 빛이 들이치는 쪽으로 향하다 보니 경내엔 ‘NO PICTURES’(사진 찍지마세요)라는 반갑지 않은 경고 문구가 들어온다. 그 문구를 보고 있자니 장안을 점령했던 티송 데첸 황제가 떠오른다.

대부분의 티베트 사람들은 티베트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인, 자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자랑스러울 법한 ‘장안 점령’을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티송 데첸의 불교적인 업적만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머릿속엔 티송 데첸이 파드마삼바바란 구루 린포체와 함께 티베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출가 승단을 완성했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다.

오로지불교에만 관심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의 넉넉한 영혼을 생각하니 ‘NO PICTURES’라는 문구가 새롭게 느껴진다. 이 한마디 문구는 티베트를 짓밟고 고향을 빼앗은 중국마저도 용서한 티베트의 위대한 영혼이 순례자들에 의해 바이러스처럼 확산될 것을 두려워 한 중국의 옹졸함을 반증하는 표식이리라. 

라싸=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