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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48. 잡지

기자명 법보신문

1910년 발간된 ‘원종’이 불교잡지 효시

실물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잡지는 ‘조선불교월보’
만해 스님의‘유심’은 1918년-‘불교’는 1924년 창간

 
1912년 창간된 조선불교월보. 사진제공=불교와 문화

시대의 단면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논설을 비롯해 수필, 소설, 시 등 문학작품까지 다양한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엮여 정기간행물로 발간되는 잡지(雜誌)는 1663년 함부르크의 신학자이자 시인인 요한 리스트가 세계 최초로 『계발 월간 토론』을 발간하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각국에서 여러 형태로 발전해왔고, 우리나라에서는 1896년 2월 ‘대조선인 일본유학생친목회’가 발행한 『친목회회보(親睦會會報)』와 같은해 11월 30일 발간된 『대죠션독립협회보』가 잡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잡지는 언제 처음 등장했을까.
불교계에서는 1910년 원종 종무원에서 발행한 잡지 『원종』이 ‘조선불교잡지의 효시’로 기록되고 있으나, 잡지의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원종』이 불교잡지의 효시라는 점은 만해 스님이 쓴 ‘불교 속간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해는 이 글에서 “조선불교 유신이래 불교의 선전 겸 보도기관으로 신문과 잡지를 발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는 불교도 중 유지의 창도는 그 유래가 자못 오래거니와 잡지의 명목으로 나타나기는 불기 2937년(경술, 1910) 경에 『원종잡지』라는 것이 2호가 발행되었으나, 그 내용과 형식이 불비하여서 완전한 잡지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것이 조선불교 잡지의 남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인 즉 그것이 조선불교 잡지의 효시가 될 것이다”며 『원종』이 불교잡지의 효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원종』에 이은 두 번째 불교잡지는 1912년 2월 창간한 『조선불교월보』다.
『조선불교월보』는 발행 취지문에서 “세계를 통틀어 오직 종교가 가장 숭고하고 종교 가운데 우리 불도(佛道)가 높은 자리에 있다. 오늘과 같이 종교가 경쟁하는 마당에 선 우리 승려는 어찌 편안히 잠자고 있겠는가”라고 발간 이유를 밝혔다. 특히 경제적 근간이 되는 광고에 대해서도 “본보는 세출(世出) 세간(世間)과 내외(內外) 인민에게 보급하여 신속 유통하므로 광고력이 탁월하다”고 언급하고 있어 상업적인 면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하게 하고 있다.

권상로의 「조선불교혁신론」이 10회 이상 연재되기도 했던 『조선불교월보』는 1913년 8월 제19호를 끝으로 종간되면서 그리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조선불교선교양종 각본산주지회의는 『조선불교월보』 종간 이후 1913년 11월 『해동불보』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한영 스님이 발행인을 맡고 최동식이 편집인으로 자리했던 『해동불보』 역시 그 생명이 짧아 1914년 6월 제8호를 끝으로 종간되는 비운을 맞았다.

‘조선불교계’엔 당시 교세 설명

 
만해 스님의 시·사상이 담긴 유심. 사진제공=불교와 문화

조선불교선교양종 각본산주지회의는 이어 1915년 1월 “도속(道俗)이 일치하여 불교 진흥할 방법을 연구 실행하겠다”는 취지로 불교진흥회를 설립했고, 이 불교진흥회는 설립 직후인 1915년 3월 『불교진흥회월보』를 창간했다. 그러나 이 잡지 역시 같은해 12월 제9호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게 됐다. 당시 이능화가 편집 및 발행인으로 활동했었다.

당시 불교 잡지들이 창간 이후 겨우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종간되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겨우 3호까지 발간하고 불과 3개월 만에 종간한 잡지도 있었다. 불교진흥회가 스님들을 배제하고 신도 중심 단체로 전환한 이후 1916년 4월 『조선불교계』를 발간했던 것. 그러나 이 잡지는 겨우 3호를 내고 그해 6월 막을 내렸다. 이 잡지의 발행과 편집도 이능화가 맡았었다.

『조선불교계』는 비록 3호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긴 했으나, 1910년대 조선불교의 교세를 짐작하게 하는 언급이 발간사에 등장해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발행인 이능화가 발간사에서 “산에는 9백 사찰과 7천 법승이 있고, 들에는 40교당에 10만 신도가 있다”면서 “우리 동토(東土) 1천 5백만 인의 동포 중생에게 두루 권하여(…)다같이 부처님을 뵙고 불법을 듣게 함이니, 이는 본 잡지의 목적하는 바이다”라고 당시 불교계 현황을 설명했었다.

이능화가 편집 및 발행인으로 있었던 『불교진흥회보』와 『조선불교계』가 단명하면서 불교계 잡지의 맥이 끊기는 듯 했으나, 이능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능화는 여기서 주저앉지 않고 잡지 발간에 있어서 재기에 성공(?)하는 집념을 보였다. 이능화는 30본산연합사무소가 1917년 3월 창간한 『조선불교총보』의 편집 및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1921년 1월까지 통권 22호를 발간했다. 당시 불교잡지의 짧은 수명을 고려하면 장수한 셈이다.

그리고 1918년 9월에는 만해가 주도한 『유심』이 창간됐다. 불교적 수양을 주로 하고 문예작품을 게재한 이 잡지는 개인이 잡지 형식을 빌어 만들어낸 대표적 잡지로 평가받고 있다. 비록 잡지는 3호를 끝으로 12월에 종간됐으나, 당시 ‘유심사(惟心社)’에서 결속한 백성욱, 김법린, 신상완 등은 만해와 함께 3·1만세운동의 선봉에서 불교계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펼치는 등 활발한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유심』을 발간한 ‘유심사’는 불교계 독립운동의 산실로 불리고 있다.

이어 나타난 잡지가 바로 권상로와 만해가 바통을 이으며 관계했던 『불교』지다.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 운영하던 불교사에서 1924년 7월 창간해 1933년 8월까지 통권 108호를 발간하며 불교잡지의 신기원을 이뤄냈다. 1924년 창간된 『불교』는 권상로를 발행인으로 108호까지 발간하다가 휴간되었고, 1931년 만해가 인수해 속간했다. 그리고 1933년 당시의 선교양종중앙교무원으로 운영권이 넘아갔다가 재정난을 이유로 폐간되었다. 『불교』는 이후 1937년 해인사·통도사·범어사 등 3본산 종무협의회에서 재정을 지원 받아 다시 『신불교』로 속간되기도 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상당기간 지속해서 발행된 『불교』는 불교잡지 역사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우선 잡지의 체제나 내용, 간행호수 등으로 미뤄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 번째 불교잡지였다는 평가가 따르고 있다. 그리고 1924년 창간 이후 1931년까지 주로 불교의 홍보와 교리 해설 등을 중심으로 내용이 구성된 반면, 1931년 만해가 발행인으로 관여하면서 1933년 폐간 때까지 항일운동의 기수 역할을 한 점이 이채롭다.

유심사는 불교 독립운동 산실

만해는 이 시기 『불교』지에 ‘불교청년운동에 대하여’, ‘불교 신임 중앙간부에게’ 등 총 45편에 달하는 논설을 실었으며, 그 내용의 대부분이 기성종단에 대한 혁신과 개혁론이었고 정교분립의 원칙을 내세워 일본의 한국불교 탄압에 대해 항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해의 논조는 중앙교무원과 일제 당국이 이 잡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게 되는 계기가 됐고, 결국 재정난을 내세워 『불교』지를 폐간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뒷날 다시 선보인 이 잡지는 급기야 친일적 성향을 보이면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등의 권두언이 실리는 등 일제에 동조하는 논설들이 주류를 이루기도 하는 질곡의 역사를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잡지는 광복 이후까지 이어온 가장 비중 있는 불교잡지였으며 만해, 권상로 등 당대의 석학들이 남긴 시·논문·평론·수필 등이 담겨 있어 근세불교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불교잡지들은 일제 강점기였음에도 대중들의 눈 높이에 맞춰 한문 대신 한글을 택했고, 이 가운데 조선불교회가 1924년 7월 창간한 『불일』에 실린 김세영의 ‘부처님 세계 그림 장엄’은 순 한글과 함께 만화 형식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불교잡지는 이후에도 1924년 『황야』, 1928년 『무아』, 1931년 『관서불교』, 1934년 『회보』, 1937년 『녹원』, 1938년 『불심』등 지속적으로 발간됐다. 일제시대에 발간된 불교잡지들은 포교라는 명분으로 당시의 불교상황을 전달하는 것과 함께 민족 독립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고, 때문에 근대조선불교 건설을 위해 헌신했던 스님과 재가불자들의 실천의 장이 되기도 했다.

 
친일과 항일의 논조를 오갔던 불교. 사진제공=불교와 문화

실례로 봉선사 홍법강우회에서 발간한 『홍법우』는 잡지에 실린 ‘전조선강원학인명부’를 통해 1937년 12월 15일 현재 32곳의 강원 현황과 662명에 이르는 학인들의 성명, 연령, 소속사찰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어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조음』은 창간사에서 “민족의 사랑과 사회의 행복이 모두 이 조음(潮音) 속에서…”라고 적고 있고, 『회광』은 권두언에서는 “학인들아! 우리 자신부터 진불자(眞佛子), 시대가 요구하는 승려가 되자. 주위에 노소(老少) 동반(同伴)들로 하여금 다 보살의 행로(行路)를 밟게 하자”고 역설했으며, 『홍법우』권두 강령에서는 “우리는 해행(解行)을 구비하여 불교조선 건설의 전위(前衛)가 되자”고 호소하기도 하는 등 대부분 청년승가와 청년불자들의 투혼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만해를 비롯해 능화, 운허, 구하, 한영 스님을 비롯해 권상로, 오세창, 김달진, 최남선, 김어수, 조지훈 등 당대의 선지식과 명망 높은 작가들의 생생한 글과 생각을 가감없이 들을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특히 만해가 발간한 『유심』은 스님이 처음 발표한 시 ‘심(心)’을 비롯해 ‘조선청년과 수양’, ‘전로를 택하여 진하라’, ‘고학생’ 등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이 다수 실려 있기도 하다.

일제시대 이후 불교잡지는 1970년을 전후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법륜』과 『불교』가 재 창간되고 월간 『불광』과 『여성불교』가 이 무렵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1980년대는 종합잡지 성격을 갖춘 『불교사상』, 『선사상』, 『금강』등이 발간돼 대중들로부터 호응을 얻었고, 최초의 사보인 『해인』지를 시작으로 사보가 30여종 발간되기도 했다. 이어 『대중불교』, 『법회』, 『정토』, 『보리수』등 신행단체와 신도회에서 신앙운동 성격의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했고, 80년대 말에는 최초의 어린이 불교잡지 『굴렁쇠 어린이』가 창간됐으나 대부분 경영난 등의 이유로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있다.

청년 승가·불자들 투혼 반영도

현재는 『불광』, 『해인』, 『불교와 문화』 등 월간지 10여종과 격월간  『참여불교』가 있으며, 계간 『불교평론』, 『유심』 등이 있다. 그리고 학술잡지 30여 종과 1990년대 이후 각 사찰에서 발간하는 사보(寺報)가 급증해 100여종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 잡지에 견줄만한 불교계 대표 잡지가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어서 핵심 잡지 육성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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