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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서강대 길희성 명예교수

기자명 법보신문

현실 저항 상징인 열반-천국이 두 종교의 접점

기독교와 불교는 우리나라의 양대 주류종교입니다. 수는 불자들이 더 많지만 기독교인들은 신자라는 정체성과 응집력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어서 사회적 영향력이 불교보다 더 크게 보이기도 합니다. 두 종교가 이렇게 막상막하의 세력을 갖고 하나의 사회 속에 공존하는 모습은 그 어느 나라에도 없습니다. 매우 희귀한 상태이고 우리 사회가 갖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저는 두 종교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이 두 종교가 보다 심층적이고 창조적으로 만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종교는 역사를 통해 계속 발전하고 변화해 왔습니다. 다양한 사상, 이질적인 사상이 만나면 오히려 역사적으로는 창조적인 사상, 세계를 주도할 만한 사상이 나오곤 했는데 우리는 차이만 보고, 대립만 보고 피상적인 이해만 하다 보니 그런 것이 나오질 못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유니크한 역사적 경험과 상황을 선용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향하는 열반의 실현과 예수가 일생 동안 목숨 걸고 추구한 하느님의 나라라는 부분에 시각을 맞춰 두 종교의 만남을 시도해보면 상호 이해와 시사점이 많아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예수를 통해서 드러난, 예수가 가르쳐준, 예수의 삶과 말씀과 행위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그냥 하느님을 믿는다면 이슬람도 있고 우리민족도 하늘 숭배 사상 등이 있었으니 막연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성품과 속성을 가장 결정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준 역사적 사건이 예수라는 존재입니다.

그 예수를 알아야 하느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려면 예수를 잘 알아야 하고 예수를 잘 이해하려면 예수와 하느님의 관계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러한 예수와 하느님의 불가분성이 기독교 신앙의 특징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佛-基 만남은 위대한 사상의 요람

그럼 예수는 어떤 인물인가. 예수는 천국운동, 하느님 나라 운동을 벌인 인물입니다. 유태인들은 하느님을 하늘이라고 우회적로 표현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나 하늘나라, 천국이 모두 같은 뜻입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지금까지의 삶을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종말론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통치하는 시대는 폭압과 억압과 차별, 착취의 시대이며 하느님이 통치하는 시대가 오지 않으면 평화롭게 살 수 없다는 역사의 비관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곧 하느님이 직접 통치하는 시대가 온다는 운동이었습니다.

새 시대가 곧 도래하니 옛 삶의 방식은 접어두고 새롭게 살기위해 결단할 때가 됐다고 선언하며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행동, 말씀, 인격을 통해 보여준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너무 극명하게 표현했으며 예수의 행위와 말 인격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 행위, 사랑, 나라를 보았기 때문에 예수의 영향력은 강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에 대한 기억이 복음서로 쓰이고 숭배로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 운동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많은 오해와 변절과 왜곡이 있었고 지금은 교회가 마치 하느님의 나라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만드는 것이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도 오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하느님의 나라가 올 것이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는 긴장 속에서 2000년을 이어왔고 그 긴장은 영원히 계속 될 것입니다.

종말 예언한 예수는 현실과 대립한 투사

그렇기에 기독교에서 역사의 완성은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 하느님이 끝까지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창조를 완성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거기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동력자로서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미래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종말론 운동을 일으켰으며 종말론적인 예언자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는 매우 다르게 보이는 종교이지만 심층적으로는 닮은 점이 있습니다. 초월적 구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현 사회적 질서, 정치질서나 존재론적 질서가 불만족스럽습니다. 불교로 말하면 고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자기중심적 역사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탐진치의 세계가 계정혜 삼학으로, 역사의 탁류가 정화돼서 불국토, 정토 등 내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열반입니다.

기독교 역시 이 세상이 이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뤄져야 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가난하고 소외되고 탄압받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아들딸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귀한 존재이며 하느님의 성품과 뜻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고까지 추앙됩니다. 예수 또한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귀한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귀한 존재들이 차별받고 고통 받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들을 위한 운동을 벌였기에 기득권자로부터 탄압받고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에서 인간의 죄를 대속했다는 식으로 미화하는데 저는 그 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방법이 다를 뿐 불교와 기독교는 이렇게 심층적 의미에서 추구하는 바가 같습니다. 불교는 자기를 비우는 깨달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돼서 살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한 것입니다. 초월적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로서 불교와 기독교는 세계와 치열한 대결을 하는 종교이지 현실에 안주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현실에 불만하고 그것을 바꾸려 하지만 맑시스트처럼 혁명을 통해 바꾸자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시각과 부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보고 개인과 세상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이 두 종교가 구원, 열반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며 이 세계와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 치열한 구도정진을 통해 세계와 대결하고 한 인간이 탐욕과 자기중심적 삶, 그리고 이기성을 극복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는 네가 모두 하느님의 아들이 되면 나와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이러한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구나, 내 안에 신성이 있구나를 자각하면 거침없이, 당당하게 살게 됩니다. 이것을 깊이 자각한 사람이 예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살았던 삶의 의미가 어떤 형식으로든 계속 될 것이라고 믿는 종교는 불교와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불교의 윤회설과 기독교의 부활사상 만이 유일합니다. 해탈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사후에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진다는 윤회는 매우 중요한 사상입니다.

사후에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뿐이라면 세상에는 도덕적 의미가 없겠지요. 자신의 잘못에 대해 벌을 받지만 기독교에서도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서도 무간지옥에 떨어지긴 하지만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유사점도 있습니다.
물론 불교의 환생이나 기독교의 부활을 다 믿기는 또 어렵지요. 몇가지 풀기 어려운 문제도 있습니다. 특히 열반에 있어서는 나란 개체가 있느냐의 문제가 종종 거론되곤 합니다. ‘사후에도 나라는 개체가 꼭 있어야 한다’는 기독교 구원론에 대해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집착’이라고 보는 불교의 통찰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윤회-부활 양면성은 여전히 수수께끼

그러나 구체성이 없는, 나의 삶이 전혀 기억되지 않고 나와 전혀 무관한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역시 문제라고 봅니다. 특히 개체에 대한 집착이 강한 서양 사람들이 불교의 열반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런 점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나와 똑같은 자아가 반드시 사후에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그런 유치한 생각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여기서 내가 살았던 인간적 삶의 의미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의 나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부활사상입니다. 동양적 지혜로 보면 우주와 진리와 하나가 되면 굳이 객체가 있어야 하는가.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집착일 뿐이라고 보는데 이런 양면이 다 있습니다. 이런 대목에서는 서로가 배워야 하지만 서로가 배웠을 때 어떻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지는 역시나 또 하나의 수수께끼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기독교에서도 지금의 나와 똑같은 자아가 천국에서도 계속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추구했던 가치, 사랑과 정의를 위한 투쟁들이 끝까지 어떤 의미를 남기고 결실이 있어 그 결실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 세간적 사고방식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 갖고 있는 욕망의 잔재라는 것이 동양적 초월, 탈인격적 초월입니다. 숭고하고 아름답지만 참 어렵고 세간적 삶이 너무 무가치해보이기도합니다. 단절이 너무 심합니다. 너무 같아도 문제이지만 단절이 너무 심해도 무의미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것을 수수께끼로 남기고자 합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강의는 참여불교재가연대가 7월 7일 만해NGO교육센터에서 개최한 7월의 참여불교리더스포럼에서 ‘붓다와 예수 그리고 열반과 하느님 나라’를 주제로 서강대 길희성 명예교수가 진행한 강의를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길희성 교수
1943년 생. 서강대 명예교수이자 현재 종교자유정책연구원 공동대표다. 1987년 개신교의 초교파적 평신도 교회인 새길교회를 창립하여 한국교회의 변화에 앞장섰고 진보신학의 입장에서 시민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인도철학사』『지눌 선사상 연구』『보살예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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