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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51. 신문

기자명 법보신문

1935년 8월 1일 김태흡이 창간한 ‘불교시보’

‘뉴스·논설을 비롯해 지식·오락·광고 등 여러 정보들을 특정 또는 불특정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정기간행물’로서의 신문(新聞) 역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 길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1883년 10월 30일 창간, 10일에 한번씩 순간으로 발행된 「한성순보」가 최초의 신문이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한 개화기에 선보인 「한성순보」는 수구파들에 의해 1884년 12월 폐간되면서 단명하고 말았다.

「한성순보」로 시작된 신문의 역사는 처음부터 거대한 세력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고, 호시탐탐 조선침략을 노리던 제국주의 세력들은 온갖 방법으로 정확한 보도를 통제하기 위해 애를 썼다. 때문에 「독립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으로 이어지는 신문들은 일제의 언론통제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고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신문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기업의 이익이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제에 영합하는 신문도 적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종교계도 언론의 기능을 갖춘 신문 발행에 참여했고, 「원종」을 시작으로 「조선불교월보」, 「해동불보」, 「불교」, 「유심」 등의 잡지를 발행해온 불교계에서도 1935년 드디어 첫 번째 신문을 발행했다.

일본 유학파인 대승사 김태흡(金泰洽)이 주도해 설립한 불교시보사(佛敎時報社)에서 1935년 8월 1일 월간 신문 「불교시보(佛敎時報)」창간호를 발행한 것. 타블로이드 8면으로 발행된 「불교시보」는 1944년 4월 15일 발간된 제105호까지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매월 1회씩 발간했다.

한국불교의 최초신문 불교시보 창간호(맨왼쪽)와 일본내각의 발표문을 실은 37호(가운데). 그리고 발행인 김태흡(오른쪽).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교시보」는 발행인 김태흡의 친일행각으로 인해 창간부터 종간까지 친일언론의 모습으로 일관했다.

「불교시보」가 창간된 배경에는 일제의 심전개발운동에 동조하는 불교계 정서가 자리했다. 1933년부터 시행한 심전개발운동은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에게 국체 관념을 명확하게 할 것을 비롯해 경신숭조의 사상 및 신앙심을 함양하는 한편 보은·감사·자립의 정신을 양성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불교계는 일제의 이러한 주장과 관련해 간담회를 여는 등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월 1회·타블로이드 8면으로 발행

당시 불교계 인사들 중 일제의 심전개발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앞장선 인물이 바로 김태흡과 권상로였다. 특히 김태흡은 「불교시보」 창간사에서 “심전개발운동의 한 팔이 되고, 한 다리가 되어서…”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노골적으로 심전개발운동 홍보에 나섰다. 즉, 「불교시보」를 통해 일제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겠다는 다짐을 한 셈이다.
김태흡은 또 「불교시보」에 「심전개발과 교화운동」이라는 논문을 게재하면서 적극적인 심전개발운동의 첨병 역할을 자임했다. 이에 따라 불교 최초의 신문인 「불교시보」는 발행인 김태흡의 친일행각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그의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하면서 친일 언론의 행보를 보이게 됐다.

「불교시보」를 창간한 김태흡은 법주사 강원 대교과를 이수하고 10년 동안 독학으로 일본 도쿄에서 인도철학과 종교학을 공부한 엘리트 승려로 처음부터 친일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다. 김대은(金大隱) 혹은 석대은(釋大隱)으로 알려져 있는 김태흡은 일본 유학중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수만 명이 살육되는 재난 속에서 겨우 살아나는 체험을 한 후 1927년 5월 1일자 「불교」지(제35호)에 「임진병란과 조선승병의 활약」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때 글의 내용이 반일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일부분이 삭제되기도 했었다. 따라서 이 일은 그가 처음부터 친일 행각을 벌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러나 1928년 귀국 후 조선불교중앙교문원 초대 중앙포교사로 활동하다가 1935년 8월 「불교시보」를 창간하면서 급격하게 친일파로 전락했다.

따라서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가 주창한 심전개발운동의 팔과 다리가 될 것을 자청하며 창간한 「불교시보」는 이후 쉼 없이 스스로 자청한 역할을 해내는데 충실했다. 발행인 김태흡은 중앙교무원 서무이사 김정해가 쓴 「심전개발의 3대 원칙에 취하여」를 비롯한 심전개발의 목적과 실행사항 등을 자세하게 보도해 일제의 조선민족 동화에 적극 협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발행인 김태흡과 「불교시보」는 시대상황에 재빠르게 영합하며 매월 1회 발간하는 신문을 심전개발운동 관련 기사로 가득 채워 나갔다.

일례로 「불교시보」는 본산 주지들의 심전개발사업을 비롯해 김천·동래·군위·임실·전주군의 각 군청과 사찰에서 행하는 심전개발운동을 자세하게 보도했고, 경성방송국에서 시행한 불교 측 심전개발강화에 대한 내용 역시 세세하게 빠짐없이 게재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같은 내용은 1935년 10월 15일자 7면에 불교 측의 이지광, 박성권(각황사 포교사), 김경주(불교전문학교 학감), 박윤진(불교전문학교 강사, 불교시보 직원), 김태흡(불교시보 주간 및 발행인), 권상로(불교전문학교 교수) 등이 1935년 4월 7일부터 9월 17일까지 16회에 걸쳐 행한 심전개발 방송에 대해 방송날짜와 연설제목 및 연사를 자세히 게재한데서 잘 나타난다.

이어 1938년 2월 1일자로 발행한 제19호에서는 미나미 총독의 내선일체 선만일여 정책에 호응하는 「선만일여의 대정책과 불교도의 각성」이라는 제목을 붙여 노골적인 친일 시사문을 게재했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1937년 10월 1일자(제27호)에 ‘연전연승 함락의 축하’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고, ‘애국사상과 경신숭불’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일본에 애국해 서구의 백인들과 야합하는 중국인을 응징하는 일본과 일본군대인 황군에게 충성과 지원을 하자”고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다음호인 제28호에서는 ‘비상시국과 신앙생활’이란 제목의 친일 시사문을 통해 “국민이 정신적으로 총동원하야 절실한 신앙생활에 들 것 같으면 무력으로 경제로 사상으로 온갖 방면으로 통하야, 위대한 힘을 발휘하야 국력을 충실하게 되는 것이라, 진호국가와 황운부익의 대사를 무난히 성취하리라고 믿는다”면서 일본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신앙생활을 이어갈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또한 여기에 더해 호국불교를 빙자해 승려지원병으로 전쟁에 나갈 것을 촉구하는 권상로의 글이나, 직지사가 보국탁발로 국방헌금을 냈다는 등의 미담 기사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싣기도 했다.

44년 종간 할때까지 친일로 일관

그뿐만이 아니다. 「불교시보」는 천왕부처의 사진이나 일본 궁성의 사진은 물론, ‘황국신민의 서사’나 ‘신앙보국 내선일체’ 등의 광고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1940년 일본이 황기 2600년을 맞자 신년호인 제54호 1면에 천왕부처의 사진을 상단에 게재하고, 즉위 15년을 맞은 40세의 일본천왕과 황후 및 황태자 그리고 제2황자 등 일본 황실 주요인사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친일 아부 기사를 게재했다.

그리고 1940년 2월 총독부가 창씨개명을 실시하자 「불교시보」는 6월 15일자 1면에 ‘국민정신과 씨 창설’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미나미 총독이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내선 동포가 동일한 씨를 갖게 된 것은 가출한 자식이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상속받을 자격을 얻은 것과 같다”며 창씨개명을 찬양하고 나섰다.

이어 1942년 12월 제98호에서는 “조선불교도는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황도의 은의 속에 살고 있으며 황도를 여의고는 잠시도 살 수 없건만 황도의 은총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 많다”며 일본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것을 주문하는 등 친일행각에 더욱 열을 올렸다.

 
경북불교협의회에서 1936년 7월 창간한 경북불교. 사진자료=한국불교 100년

이처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친일기사를 쏟아낸 「불교시보」의 친일행적은 통권 105호 중 현존하는 95개 호에서 잘 나타난다. 전체 94편의 사설 가운데 시국을 언급한 친일 사설이 모두 39편에 달했고, 무기명 친일 기사와 총독의 훈시 등이 30여 편이었다. 그리고 친일 기명 기사로는 발행인 김태흡이 가장 많은 19편을 썼고, 초대 종무총장을 지낸 이종욱이 4편, 친일학승 권상로가 2편을 썼다.

또 김영수(불전교수), 김경주(불전 학감), 방한암(조계종 초대 종정) 등 12명이 각각 1편씩의 글을 기명으로 게재하기도 했다. 한국불교 최초의 신문이라는 영광을 친일로 먹칠한 「불교시보」는 마지막호인 1944년 4월 15일자에 김태흡의 기명으로 ‘적국항복의 기도에 대하야’라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허울뿐인 한국불교 최초 신문의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불교계 신문이 한국불교 최초 신문인 「불교시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또 하나의 월간 신문으로 경북불교협회가 발간한 「경북불교(慶北佛敎)」가 있었다.「경북불교」는 1936년 7월 창간해 1941년 제48호로 종간됐으며 타블로이드판으로 발간됐다. 당시 「경북불교」의 편집 및 발행인은 강유문에 이어 김해윤으로 이어졌으며, 주로 경상북도 지방에서 활동하는 불교인들의 글과 동향을 게재했다.

지역소식 전한 ‘경북불교’ 36년 창간

「경북불교」는 초대 편집 및 발행인이었던 강유문의 인물 됨됨이에 비춰 그 성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강유문은 고은사 출신 청년 승려로 호는 묵당이다. 또 중앙불전 출신으로 일본 대정대학 사학과를 졸업해 당시 엘리트 계층으로 분류된다. 그는 불교청년운동에 뛰어들어 조선불교청년동맹 준비위원, 총동맹 동경동맹 문교부장 및 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일반 청년학생운동에도 관여하면서 조선학생회 집행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청년운동에 매진했고, 불교청년운동을 주도하면서 항일불교 단체인 만당의 당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경북불교협회 서무주임으로 지역에서 활동했던 강유문은 협회의 기관지 격인 「경북불교」의 초대 편집 및 발행인이 되어 신문을 발행했고, 1938년에는 『포교법 개설』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포교방식을 세부적으로 제시하면서 ‘신문포교’를 포교의 한 영역으로 구체화하기도 했다.

한편 일제시대 친일성향으로 일관한 한국불교 최초의 신문 「불교시보」를 비롯해 동시대에 발간됐던 「경북불교」가 불교계 신문의 효시가 된 이래 불교계 신문도 많은 성장을 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1988년 창간해 2005년 불교계 최초의 독립언론으로 새롭게 출범한 「법보신문」을 비롯해 조계, 태고, 천태, 진각종 등 주요 종단의 기관지 등이 불교계 안팎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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