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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지성] 15.보르헤스-김홍근 성천문화재단 부원장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는 인류의 숭고한 문화유산이며 구원의 길”

직접 체험 통해 의식의 이분법 넘어선 중도 지향
업·연기 착안 ‘미로그물’ 이론 인터넷 탄생 기여
인간은 업그물 그물코…무한 과거·미래 교착점

 
근본체험을 통해 의식의 이분법을 넘어 중도를 지향하게 된 보르헤스는 불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보르헤스의 불교강의’를 썼으며 만년에는 고향에서 가진 최후의 강의에서 “불교는 인류의 숭고한 문화유산이며, 특히 저에게는 구원의 길”이라고 고백했다.

작금 세계 지성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흐름은 서구 지식인들이 불교를 비롯한 동양사상을 깊이 공부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직접 명상수행까지 실천하고 있는 현상이다. 그 주된 이유는 그들이 자체의 전통 안에서 어떤 한계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서구사상은 의식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다. 주관이 의식의 창을 통해 객관을 보면, 세상은 항상 이분법적으로 나뉘게 마련이다.

1899년 아르헨티나에서 출생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대립, 유물론과 유심론의 대립,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의 대립, 특히 지금 우리 사회가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 치루고 있는 좌우와 지역의 대립 등등. 대상 세계를 둘로 나눈 다음에 한쪽은 가치를 매겨 고양시키고 나머지 한쪽은 평가절하 하면서 억누르는, 소위 진영 논리의 갈등을 빚어온 것이 서구 근대사다.

그러나 세상은 선악이나, 피차의 이분법으로 재단되지는 않는다. 기껏 악의 축을 제거하고 나면, 항상 또 다른 악의 축이 나타나는 법이다. 좌충우돌하던 서양이 시행착오를 거쳐 발견한 것은, 객관을 나누어 가치 판단을 내리고 우월한 가치와는 일치하고 열등한 것은 제거하면서 진보하고자 하지만, 그 행위자로서의 주관이 이미 병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주관의 눈에 끼고 있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이상, 아무리 공정하게 객관을 대하려 해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볼 수 없다는 사실.

즉 인간은 누구나 무의식이 있고, 그것이 대부분 시커멓게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불행히도 그 무의식의 오염은 의식의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다. 스스로의 병을 돌아보았지만 서구의 전통 안에는 마땅한 치유책이 없다는 사실이 지성인들로 하여금 불교수행을 하게 만드는 이유다.

불교는 중도실상을 가르친다. 무의식이 오염되면 밖의 선악을 문제 삼기에 여념이 없지만, 그것이 정화되면 선악을 포용하되 어느 한쪽에도 물들지 않는 성숙한 인격이 되는 것이다. 내면의 눈이 깨끗하면 객관의 변화에 따라 주관이 그대로 순응하는 지혜가 생기기 때문에, 밖의 대립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육조대사의 말대로, “움직이는 것이 밖의 바람이냐 깃발이냐고 따지는 것보다, 그것을 문제 삼고 있는 자기 마음의 동요를 먼저 자각하고 놓아라.”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등이 물꼬를 튼 ‘자기 무의식의 오염과 정화’에 대한 자각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후기구조주의, 해체주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으로 더욱 심화된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주된 논지는 ‘세계를 좁은 의식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무의식까지 포함해서 넓게 보자.’는 것이다. 무의식은 이분법적인 선악을 모두 포용하되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지 않기에, 세계의 중도적 실상을 접하려면 무의식의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서구에서 ‘의식의 한계를 자각하고 무의식으로 눈을 돌리게 된 계기’로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하나로 꼽히는 미셀 푸코는 그의 『말과 사물』의 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이 책의 발상은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1899~1986)의 글을 읽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며 지금까지 간직해온 내 사고의 전 지평이 산산이 부수어진 경험에서 연유한다.”

푸코를 포복절도시킨 보르헤스의 글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한 백과사전’에서 동물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a)황제에 속하는 동물 (b)향료로 처리하여 방부 보존된 동물 (c)사육동물 (d)젖을 빠는 돼지 (e)인어 (f)전설상의 동물 (g)주인 없는 개 (h)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i)광폭한 동물 (j)셀 수 있는 동물 (k)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질 수 있는 동물 (l)기타 (m)물주전자를 깨트리는 동물 (n)멀리서 볼 때 파리처럼 보이는 동물.”

위의 인용은 물론 실제가 아니라 보르헤스가 허구로 꾸며낸 이야기다. 서구 이성주의의 ‘동일자와 타자’ 같은 엄격한 구분을 조롱하기 위해, 허구의 중국백과사전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다. 이 글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자장의 공간에 들어서는 사람은 비단 푸코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어이없는 실소와 동시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보르헤스의 작품은 편협된 의식과 고정관념에 길들여진 사고를 산산이 부수는 망치와 같다. 푸코는 보르헤스의 글을 마치 “이 문을 들어서면 알음알이를 내지 마라.”는 선방의 경구와 같이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의식의 고정관념이 무너져야만 비로소 무의식의 광활한 세계가 열린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라 불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있는 것 같았으나 돌아보니 집이 없었다.” 이처럼 보르헤스 작품의 숨겨진 의미를 알아들은 서구의 지성들은 열광했다. 모리스 블랑쇼, 제라르 쥬네트, 자크 데리다, 보드리야르, 로브 그리예, 리오타르, 폴 드 만, 존 바스, 이탈로 칼비노, 주제 사라마구, 오르한 파묵 등의 사상가와 작가들은 보르헤스를 ‘20세기의 창조자’, ‘사상의 디자이너’, ‘아이디어의 보석상자’,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 등으로 부르며 따랐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렇게 말했다. “두 명의 대가가 인류에게 장차 1000년을 먹고 살 양식을 남기고 갔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새천년의 이미지는 바로 월드 와이드 웹이다. 조이스는 그것을 언어로 구축하고, 보르헤스는 아이디어로 디자인하였다.” 보르헤스가 불교의 ‘업과 연기’에서 착안하여 제시한 ‘미로그물’의 이미지에서 인터넷의 아이디어가 나왔다는 사실은 인류 지성계에 끼친 그의 깊은 영향을 잘 보여준다.

보르헤스는 1899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된 책이 빽빽이 꽂혀 있는 집안의 도서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불어, 독어, 라틴어를 익히며 중·고등학교를 보낸 그는 일찍부터 타자(他者)의 존재에 대하여 눈뜨고, 지구상에는 다양한 문명이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문화적 세계시민(cultural cosmopolitan)으로 성장했다.

조국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청년 보르헤스는 인간에게 주어진 시공간의 제약이라는 존재론적인 조건을 뚫고 초월의 세계로 비약하여 절대와 부닥치는 ‘근본체험’을 하게 된다. 이후 그는 ‘인간이 본래면목과 대면하는 형이상학적 매혹과 공포’를 형상화하는데 자신의 문학을 바친다. 그 내용은 대부분 일상의 시간이 끊어지면서 존재가 흔들리고 신비적 통찰이 일어나 ‘무아(無我)와 무한(無限)’을 경험한다는 내용이다.

보르헤스라는 이름은 마치 카프카처럼 이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적 상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날렵한 직관으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포착하여 짧은 단편소설 속에서 형상화하는 보르헤스의 작품세계는 많은 독자들을 경이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그의 책을 펼치면, 평소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환상의 세계가 갑자기 눈앞에 전개되곤 한다. 만년의 보르헤스는 매우 유명해져서 하버드대학 등 전 세계를 순회하며 문학 강연과 집필을 이어갔다.

근본체험을 통해 의식의 이분법을 넘어 중도를 지향하게 된 보르헤스가 불교에 관심을 가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는 『보르헤스의 불교강의』를 썼으며, 만년에 고향에서 가진 최후의 강의에서 “불교는 인류의 숭고한 문화유산이며, 특히 저에게는 구원의 길입니다.”고 고백했다.

보르헤스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두 단편소설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과 「알레프」는 그대로 ‘업사상’과 ‘화엄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전자에서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은 시간이며, 그 오솔길이 있는 정원은 곧 인생이다. 우리는 많은 가능성이 얽혀 있는 시간의 그물을 살고 있다. 우연과 필연이 얽혀 엮어내는 다양한 가능성에 열려있는 우주는 곧 시간의 미로이며, 인생은 그 미로 속을 헤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시간의 그물’ 즉 ‘인연의 천으로 만들어진 미로’라는 아이디어를 불교에서 얻어왔다.

석존 본심에 가까운 것은 禪

또한 업그물의 한 그물코로서의 인간은 무한 과거와 무한 미래가 교차하는 지점이면서, 전 우주가 축약된 소우주이다. 이 시공간 연속체의 개념은 「알렙」에 잘 묘사되어 있다. ‘알렙’이란 말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번째 글자로서, 인간의 문명과 우주의 비밀을 담은 은유로 작용한다. 그는 자신의 신비체험을 형상화한 이 1인칭 소설에서 자신의 두 눈이 직접 ‘불가해한 우주’를 보았다고 말했다.

“알렙은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2~3센티미터의 작은 구체였다. 하지만 그 속에는 전혀 크기의 축소 없이 무한한 우주 공간이 들어있었다.” 이어지는 보르헤스의 묘사는 법성계의 ‘하나 속에 모두, 모두 속에 하나(一中一切多中一)’를 연상시킨다. 또한 보르헤스가 이 소설에서 설명하는 ‘우주의 심오한 구성방식’은 연기법(緣起法)과 매우 가깝다. 인간이 상대세계에서 벗어나 절대와 부닥치는 근본체험에 대한 묘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유사하게 표현되고 있다. 보르헤스는 불교의 다양한 종파 중에서 석존의 본심에 가장 가까운 것은 ‘선(禪)’이라고 보았다. 

김홍근 성천문화재단 부원장


김홍근 박사는

한국외국어대를 거쳐 스페인 마드리드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천문화재단 고전아카데미 부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서 『보르헤스 문학전기』, 『참선일기』, 『禪畵』 등이 있고, 역서로는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활과 리라 - 옥타비오 빠스의 시론』 등이 있다.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계간 『진리의 벗이 되어』 편집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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