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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53.어린이법회

기자명 법보신문

1923년 개설한 각황일요불교학교가 시원

 
1900년대 서울의 일본불교 일련종 호국사에서 주관한 일요학교대회에 참석한 어린이들의 모습. 사진=한국불교 100년

부처님은 어느날 탁발을 위해 제자들과 사밧티 거리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개울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 모양을 물끄러미 곁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개울에서 잡은 고기를 난폭하게 내팽개치기 시작했다.

이에 부처님은 “애들아 너희들도 남에게 그렇게 당하면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타일렀다. 아이들은 그때서야 부처님을 바라보고는 “예, 대덕이시여. 난폭하게 맞는다면 우리들도 싫습니다”하고는 물고기를 개울로 돌려보냈다. 아이들의 모습을 본 부처님은 기쁜 얼굴로 그 자리에서 여러 가지 말을 들려주었다.

『자설경』「소나장로품」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부처님이 아이들을 만나 불살생의 법를 설하는 교화장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곧 어린이들에게 내재된 불성을 깨우는 모습이기도 하며,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어린이포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법화경』「방편품」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놀며 모래로 탑을 쌓아도 불도를 이룰 것이며 풀이나 나무로 붓을 삼아 불상을 그릴지라도 공덕을 쌓고 자비심을 구축하여 불도를 이룰 것”이라고 했다. 어린이포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경구이다.

그렇다면 어린이포교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는 어린이법회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우리나라의 어린이포교는 일제시대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한 포교사들을 중심으로 전국 주요사찰의 포교소에서 운영했던 일요불교학교로부터 시작됐다. 오늘날의 어린이법회와 같은 일요불교학교에는 보통 몇 백 명 이상의 어린 학생들이 참여해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중앙불교전문학교 출신 포교사들이 일요불교학교를 열어 어린이포교에 나서기까지는 일본불교와 기독교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당시 기독일요학교의 위세를 보며 위기감을 느낀 일본 불교계는 전국의 각종각파가 초당파적으로 기독교에 대항해 어린이포교사업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1915년에 일요학교령을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전종단적으로 전문기관을 설립, 교사양성과 교재발행을 통해 어린이포교에 나선 결과 10년 후인 1925년에 일요불교학교의 수가 4천 개에 달했고 일요불교학교에 참여하는 어린이의 수가 50만 명을 넘었다. 그리고 당시는 개항 이후부터 이 땅에 물밀 듯 들어오기 시작한 기독교가 이른바 주일학교를 열어 어린이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빠르게 정착하고 있을 때였다.

일본불교-기독일요학교에 영향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불교계 엘리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불교전문학교 출신들의 감성을 자극했고, 이에 따라 이들은 졸업 후 전국에서 일요불교학교를 개설해 어린이포교에 적극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일요불교학교 가운데 최초로 문을 연 곳은 경성 각황사다. 지금의 조계사에 해당하는 각황사는 1923년 ‘각황일요불교학교’를 개설했으나, 개설 당시의 창설자나 교육자 등에 대한 자료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1932년 6월 발행한 「불교시보」에 따르면 7년이 지난 1930년에 중앙포교사인 김태흡과 박윤진이 일요불교학교 운영 책임을 맡아 이끌었고, 뒤를 이어 정봉윤, 김진원, 김삼도 등이 운영했으나 재정난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1935년 11월 박성권이 다시 문을 열었고 1936년 2월에는 학생의 수가 15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황리에 운영됐다.

어린이법회의 다른 이름인 일요불교학교는 각황사에서 처음 문을 연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곳 중 하나가 경성에서 두 번째로 문을 연 ‘대각일요학교’다. 「불교」지 1928년 6월 호 등 당시 불교계 소식지에 따르면 대각일요학교는 1928년 4월 15일 경성부 봉익동 2번지 대각교회(대각사)에서 개설됐다.

백용성 스님을 비롯해 이인표, 이만승, 고봉운, 최창운 등이 고문을 맡았고 이근우가 교장으로 재직했다. 또 교사로는 춘성 스님과 안수길 등이 있었고 학생이 80여명에 달했다. 이 학교는 문을 연지 한 달 만인 5월에 학예회를 개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고, “하모니카 독주, 자수노래 독창, 동화, 유희, 딴스, 뻬니쓰, 요술, 연극 등을 선보여 관중의 갈채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어 1931년과 1932년에 경남 진주와 동래 등지에서 일요불교학교가 개설되는 등 전국적으로 확산돼 갔다. 「불교시보」, 「불교」, 「신불교」 등에 실렸던 일요불교학교 관련 내용에 따르면 중앙포교소에서 운영하는 각황불교일요학교와 대각사가 운영하는 대각불교일요학교를 비롯해 경상남도에는 통도사포교소에서 운영하는 진주불교일요학교 및 마산불교일요학교가 있었고 범어사포교소에서도 동래불교일요학교를 운영했다.

그리고 경상북도에서는 김룡사포교소에서 상주불교일요학교, 동화사포교소에서 대구불교일요학교를 각각 운영했다. 또 강원도에서는 월정사포교소가 강릉불교일요학교, 건봉사포교소가 양양불교일요학교, 금화읍불교포교당이 금화불교일요학교를 개설했다.

이어 지금의 북한 지역에서도 일요불교학교 개설이 잇따랐다. 평안북도에서는 보현사포교소가 강계불교일요학교, 신의주불교소년단이 신의주불교일요학교 및 태천불교일요학교를 운영했다. 그리고 함경도에서도 귀주사포교소가 함흥불교일요학교, 석왕사포교소가 원산불교일요학교 및 라남불교일요학교를 개설하는 등 전국적으로 16개의 불교일요학교에서 어린이법회가 이뤄졌다. 일제시대 일요불교학교에 대한 기록은 이동은 씨가 논문 「사찰의 어린이 복지프로그램 활성화에 관한 연구-어린이법회를 중심으로-」에서 자세히 다루기도 했다.

또한 김태흡의 행적을 상당부분 기록하며 친일행보를 걸었던 「불교시보」에서는 만주의 봉천 관음사에 동포 어린이포교를 위해 조동호가 지도하는 불교일요학교가 있었고, 1939년 11월 김태흡이 찾아가서 불교동화를 들려주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어 어린이법회가 멀리 만주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자료에 따르면 당시에도 호남과 충청지역은 불교세가 약했던 탓인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불교일요학교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일제시대 ‘불교일요학교’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어린이법회는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까지의 시기에 단절되다시피 한다. 전쟁과 미군정의 노골적인 친기독교적 성향 등 외부 요인에 따른 영향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정화로 인한 내홍에 휩싸여 불교 내부적으로 어린이포교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전국 16곳에서 운영

 
정화시기에 어린이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해 어린이포교에 나섰던 운문 스님.

이때 조계종 감찰위원으로 활동하던 운문 스님이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입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린이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본격적으로 어린이포교에 나서면서 그 맥을 이었다. 운문 스님은 이후 목포 정안사를 시작으로 대구 관음사, 진주 연화사, 서울 조계사, 칠보사, 마포 석불사, 청룡사, 동국대 정각원, 의정부 약수암, 종로 대각사, 개운사, 녹야원 등 15개 어린이법회를 창립하는데 깊이 관여했고 일부는 직접 지도하기도 했다.

당시 어린이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어린이법회 운영에 적극 나섰던 인물로는 고 석주 스님을 비롯해 안병호, 황해진 씨 등이 있었다. 그리고 70년대 들어서는 성일 스님이 1975년 화성 신흥사에서 어린이포교를 시작, 현재까지 많은 성과를 올리며 정진하고 있다.

한국불교에서 어린이법회는 근근히 명맥을 이어오다가 198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1970년대 불붙은 중·고등학교 불교학생회와 대학생불교연합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청년불자들이 1980년대 초반부터 지도자로 참여하면서 어린이법회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서울은 1977년 보문사를 시작으로 1979년 석왕사, 1980년 조계사, 1982년 불광사와 화계사, 1987년 구룡사 등이 어린이법회를 본격적으로 운영했고 이는 대전, 광주, 울산, 대구, 경남, 전북, 경기도 등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특히 경남 함양군 안의면 법인사 어린이법회는 인근의 안의국민학교 재학생의 70%에 달하는 400여 명이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커져 기독교 중앙교단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이는 어린이포교 자체를 철저한 실천수행으로 받아들인 철오·각묵 스님의 노력 덕분이었다. 이곳 법인사에서는 입정, 예불, 다라니독경, 염불, 정근 등으로 법회를 진행해 놀이를 접목해서 법회를 진행해온 대부분의 어린이법회 지도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 어린이법회의 신기원을 이룩한 곳이 바로 부산이다. 부산지역은 1977년 지역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법륜사 어린이회의 탄생을 시작으로 1979년 미룡사, 1980년 대각사, 1981년 옥련선원·소림사·금화사 등에서 잇따라 어린이법회가 개설됐다.

어린이포교에 새로운 바람이 일기 시작한 부산에서는 1982년 부산불교어린이지도자회가 만들어졌고 당시 10여 개 사찰 1480명의 어린이가 참가한 ‘자비학교’는 그야말로 불교포교의 대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최초로 시행된 자비학교는 사찰 밖으로 어린이를 찾아가는 적극적인 포교의 전형을 보여줬고, 이로 인해 사찰 대중을 하나의 공동체로 이끄는 계기가 되는 시너지효과까지 얻을 수 있었다.

80년대 부산 중심 전국적 활기

 
1977년 부산지역에서 처음으로 개설한 법륜사 어린이법회 창립식 모습(왼쪽). 사진제공=부산 금정중학교 현익채 교장 사진=한국불교 100년

당시 자비학교에 참가한 어린이들은 사찰예절을 비롯해 절하는 법, 설화, 찬불가 등을 배움으로써 불자로서의 자부심을 간직한 채 수료증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 부산지역 어린이불자들의 여름합동수련회인 ‘제1회 연꽃대행진’을 8월 8일부터 10일까지 통도사 입구 야영장에서 개최했다.

이때 400여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지도자, 후원자 등 모두 500여명이 부산역에서 발대식을 갖는 장면을 문화방송이 일요매거진을 통해 소개하는 등 이슈가 되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이어 1983년 어린이법회 교재 「연꽃」이 창간됐고, 1985년에는 부산불교어린이교사대학이 창설되는 등 어린이법회의 선두주자로 자리를 굳건히 했다.

이렇게 불붙은 어린이법회는 1980년대 말 전국 600여 사찰에서 열렸고, 법회 참가 어린이만도 무려 5·6만 명에 달하며 한국불교의 희망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동련’이 조사한 2005년 어린이법회 운영실태에 따르면 전국 295개 사찰에서만 법회가 열렸고, 그나마 참가하는 어린이의 수는 1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일제시대에 시작해 1980년대 한국불교의 희망을 꿈꾸게 했던 어린이법회. 다시 한번 그 희망의 나래를 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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