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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 보다] 단양 광덕사 회주 포산 혜인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신심발로는 나를 밝히고 세상 맑히는 첫걸음

13살의 어린 나이에 출가한 혜인 스님은 세납 30세가 되던 해 백련암 성철 스님을 찾아갔다.
“부처님께 100만 배를 올리겠습니다.”
“중간에 그만둘 요량이면 시작도 말고, 끝장낼 각오라면 한 번 해 봐라.”
“하겠습니다.”
“절하다 죽은 놈 없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 번 시작했으면 멋지게 회향해야 한다.”
하루 5000배 200일 여정이 해인사 장경각에서 시작됐다.

1943년 제주도 화순에서 출생한 스님은 1956년 동진출가해 일타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한 후 1962년 해인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스스로도 큰 복을 갖고 이생에 오지 않은 것 같다고 술회한다.

해인사 장경각서 하루 5천배
200일 백만배 성취 후 진일보

“전생에 술 많이 마시면 지혜롭지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제가 그런 것 같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30등 아래서 놀았고, 출가해서 천수경 외우는데도 어지간히 애 먹었습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하다보면 비슷한 말이 많아 반복만 할뿐 끝을 내지 못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지혜도 없지만 인복도 없었다’는 스님은 일화 한 토막을 꺼냈다.

하루는 원주에서 강릉 보현사로 갈 일이 있었는데 차비가 모자랐다. 차비는 530원이지만 갖고 있던 돈은 130원. 사정을 들은 버스 운전사는 승차를 허락했지만 딱 130원 거리만큼만 가서는 ‘하차 하라’는 것이었다. “웬만하면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터인데 역시 제 복이 없는 거지요.” 결국 스님은 중간에 내려 인근 비구니 스님 절을 찾아갔다. 초파일 연등을 만드는 비구니 스님 앞에서 『초발심자경문』을 외우고 차비를 얻어 보현사를 무사히 당도했다고 한다.

출가한지 15년이 되어도 양말 한 켤레 사주는 사람이 없었다.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할 당시, 남들은 불자들이나 도반이 책을 사주기도 하는데 자신한테는 책 한 권 사주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자신보다 먼저 출가한 누이를 찾아가 도움을 청해 다른 비구니 스님이 쓰던 책을 얻어 공부를 해야만 했다.

“원력을 세웠습니다. 내가 가진 복이 그 무엇이든 불제자로서의 내 길을 가겠다는 서원을 굳건히 세워보려 한 것이지요.”
그냥 올리는 절이 아니요, 기도가 아니다.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이 알게 모르게 지은 업에 대한 참회였다. 그리고 부처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의 마음을 담았다. 코피가 쏟아지고 무릎에 고름이 고이기도 했다. 하루 5000배를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될 무렵, 방석 밑에서 송곳이 무릎을 찌르는 듯했다. 포기할 생각도 해보았다.

“성철 스님이 해주신 말씀으로 심지를 잡아갔습니다. 절하다 죽은 놈 없고, 절하다 죽어도 지옥은 안 간다는 그 말씀 말입니다.”
매 시간, 매 분이 괴로웠지만 어느 순간 고통이 절정에 이르더니 이내 사라졌다. 절을 하든, 안하든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결국 200일 만에 100만 배를 회향했다. 강원과 선원에서 공부한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환희심이 밀려왔다. 이제야 진정한 수행자의 길, 사문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듯했다.

진정한 기도와 절은 가피가 뒤따른다 했다. 혜인 스님은 어떤 가피를 얻었을까!
“염불이든 절이든 원력을 세워 실천했다면 가피는 분명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기도전에 정말 불보살님의 가피가 있을까하는 의심부터 하는데 이미 틀린 겁니다. 그대로 믿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숫자에 얽매여 행하는 절보다
진심 담긴 108배가 더 뜻 깊어

100만 배를 올리기 전에 혜인 스님은 불자 다섯 명만 모여도 가슴이 떨려 짧은 법문도 어려웠다고 한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지 하는 메모장을 들고 법석에 올라가도 허사였다. 그러나 참회기도를 올린 후부터는 감로법문이 끝없이 흘러 나왔다고 한다.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도 눈에 들어와 나름대로 선지도 발휘할 수 있었다.

출가 초기 양말 한 켤레 사주는 이 없었지만 제주도 11만5700m²(3만5000평)의 부지 위에 약천사를 건립하겠다고 원력을 세우자 도와주는 이가 줄을 이었다. 이 모든 게 불보살님의 가피라는 것이다. 삼십 세 당시 이룬 100만 배가 육십사 세인 지금은 어떻게 다가올까?
“가짜입니다.”

법문이 터지고 대작불사를 일으킨 원동력 100만 배가 ‘가짜’라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삿된 마음이라도 일으켜 시작한 100만 배였다는 뜻일까?
“100만 배를 하려니 일단 숫자를 세어야 했지요. 하루 5000배를 채워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니 절도 설익게 한 겁니다. 그러니 가짜입니다.”

혜인 스님은 지금도 매일 108배를 올린다. 부득이 서울에 머물러야 할 때도 새벽이면 조계사를 찾아 절을 올리고, 여의치 않으면 머물고 있는 방안에서 일 배, 일 배를 올린다. 사부대중을 위한 절, 이 세상에 생명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이슬로 사라진 영가의 명복을 비는 절도 있고,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극락왕생 발원의 절도 있으며, 이 세상에 핀 꽃과 나무를 위한 기도도 있고, 나아가 지옥중생을 위한 절도 포함 돼 있다. 일 배, 일 배에는 스님의 원력과 정성이 응축돼 있는 것이다.

“100만이라는 숫자에 걸려 있었던 겁니다. 살아 계신 부처님을 대하듯 정중하게 마음을 다해 일 배를 올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겁니다. 정성이 실린 절을 올려야 하는 겁니다.”
100만 배가 ‘가짜’라면 108배는 ‘진짜’인 셈이다. 그러나 세속에서 말하는 ‘가짜’, ‘진짜’ 개념이 아니다. 100만 배가 없었다면 108배의 소중함을 알 수 있었을까!

이후 스님은 스님으로서의 본분사를 챙겨 갔다. 출가를 하며 다진 초발심에 귀를 기울였다. 혜인 스님은 스승 일타 스님이 보인 일화를 들려주었다. 해인사 선방에 머무를 당시 스승 일타 스님은 곰팡이가 잔뜩 들어있는 옷을 입고 계셨다.
“스님, 옷을 어디에 두셨다가 꺼냈기에 이렇듯 곰팡이가 슬었습니까?”
“수각에 버려진 옷인데 장마에 곰팡이가 끼였어!”

 
광덕사 경내 초입에 조성한 물레방아 연못이다. 부처님 친견에 앞서 자신의 내면을 한 번 들여다 보라는 작은 배려가 스며있는 듯하다.

심전 경작따라 열매 다르니
마음 하나 허투로 써선 안 돼

일타 스님은 어느 스님이 입다가 버린 옷을 주워 빨아 입은 것이다.
“일타 스님은 늘 그러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낡은 것을 입고 새 옷은 상좌들에게 나눠주셨지요. 단순한 상좌 사랑이라기보다는 일타 스님의 용심(用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혜인 스님도 스승 일타 스님의 용심 한 자락을 가슴에 담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려 애쓰고 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합니다. 말과 행동, 마음 하나까지도 다른 사람에게 분노나 슬픔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행복하려면 남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고, 무시받지 않으려면 남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혜인 스님은 누구보다 하심(下心)을 강조한다. 내 자신을 낮추면 남의 허물도 크게 보이지 않을 거라는 것인데, 사람과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한다고 한다.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자신이 그 허물을 알고 하나씩 고쳐 나가고, 타인의 허물은 덮어두려는 마음을 내보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감사하고 고마운 사람으로 남는다는 것! 멋진 삶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고 세상이 맑아지는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스님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마음 밭(心田)을 잘 경작해 가자는 것이다. 내 마음의 밭에 무엇을 심고, 어떻게 경작해 가느냐에 따라 그 열매도 달라진다는 것을 안다면 마음 하나 허투루 쓰진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혜인 스님은 상좌들에게는 자애롭지만 한편으론 엄격하기로도 정평이 나있다. 스님 상좌라면 일단 강원부터 들어가야 한다. 선원은 그 다음 일이다. 조계종 교육체계로 볼 때 크게 기초선원과 강원의 두 축이 있는데 굳이 선 강원 후 선원을 고집하는 연유가 궁금했다.

“부처님 말씀부터 귀담아 듣고,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봅니다. 근기에 따라 강백이나 선원장 재목이 따로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길을 가든 경전을 빼놓고는 불법을 말할 수 없습니다. 조사들의 말씀도 고구정녕하지만 그 이전에 부처님 말씀부터 헤아려 보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혜인 스님이 대중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신심이다. 일념수행도 여기서 비롯된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가벼운 돌도 그냥 물에 띄우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무거운 돌도 배에 실어 놓으면 가라앉지 않습니다. 당연한 이치이지만 간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심은 바로 배입니다. 튼튼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힌 배 한 척을 갖고 불법의 바다를 항해해 보세요. 기도의 노로 젖든, 참선의 노로 젓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법의 섬에 무사히 도착할 거라 확신합니다.”

좋은 믿음은 올바른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우리의 마음도 맑아지고 밝아져 갈 것이다. 무엇보다 믿음은 결코 좌절하게 하지 않는다. 금강불괴(金剛不壞)라 하지 않는가! 깨달음을 향해 가는 수행인이 첫 번째로 가져야 할 게 바로 신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심으로 세상과 인연 맺어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영명연수와 보조국사 지눌, 그리고 나옹 선사를 유독 존경한다는 스님은 나옹 화상의 발원문 한 토막을 건넸다.
내 이름을 듣는 이는 삼악도를 면하고,
(聞我名者免三道)
내 얼굴을 보는 이는 해탈을 얻도다.
(見我形者得解脫)
혜인 스님이 가고자 하는 길이 엿보인다.

사문의 길을 떠나며 세웠던 초발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본분사에 최선을 다하며 뭇사람들과 동고동락하겠다는 원력, 바로 중생구제다. 제주 약천사에 이어 단양 광덕사까지 창건하려는 불사의 원력도 여기서 비롯된다. 더 많은 사람이 부처님 법을 들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는 것이다. 9월 14일 예정된 도락산 광덕사 삼존불 봉불식에 앞선 13일, 33인 고승초청 대법회를 철야로 봉행하겠다는 뜻도 여기에 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面上無瞋供養具)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口裡無嗔吐妙香)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
(心內無嗔是眞實)
언제나 한결같은 진리의 마음일세.
(無垢無染是眞常)
도락산 자락에서 이는 혜인 스님의 향기가 널리 퍼져가기를 기대해 본다.

penshoot@beopbo.com


혜인 스님은

1943년 제주도 남제주군 화순리에서 출생, 1956년 출가해 일타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62년 해인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제방 선원에서 안거 수선했다. 1981년 제주도 약천사 대작불사 원력을 세운 후 1988년 대가람 낙성식을 가진데 이어 충북 단양 광덕사 대불사를 진행 중이다. 현재 조계종 계단위원이며 약천사와 광덕사 회주로 주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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