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라싸를 가다] 15. 그들의 영혼을 가둘 수 없는 이유

기자명 법보신문

척박한 자연마저 영혼 맑히는 양약삼아 탐욕 치유하다

 
척박한 자연마저도 양약으로 삼아 탐욕과 곤란함, 근심을 치유하는 티베트 사람들. 라싸의 외곽에 있는 너럭바위에 조성한 석가모니 마애불은 자연을 부처님으로 받들려는 그들의 표현이다. 오색으로 색칠한 부처님의 모습이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하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왜 그리 티베트와 달라이라마에 빠져들게 되었느냐”고.
그것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 언제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티베트 사람들과의 인연 혹은 ‘필연에 의한 이끌림’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달라이라마를 처음으로 뵌 것은 2002년 1월, 성도성지인 인도의 보드가야 대탑에서의 일이다. 정토회 지도법사인 법륜 스님과 함께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던 중 나는 보드가야 대탑에서 아주 낯익은 두 분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두 분이 보드가야 대탑으로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장면을 촬영한 적이 있다. 한 분은 내가 ‘그토록’ 친견하고 싶었던 달라이라마였으며 다른 한분은 당시 KBS 텔레비전에서 ‘도올의 논어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방송을 중단한 뒤 갑자기 사라진 도올 선생이었다. 세계적인 뉴스메이커인 달라이라마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뉴스메이커인 김용옥 선생이 나란히 불교 성지를 순례하는 장면이었으니, 더군다나 도올의 논어 이야기는 세간의 높은 관심에도 진행자가 일방적으로 사라져 중단된 터라 그 사진 한 장은 대부분의 일간지와 방송에서 인용해 보도할 만큼 반향이 컸었다.

그렇게 시작된 달라이라마와의 인연은 2005년까지 필연처럼 이어졌다. 달라이라마와의 첫 만남 이후 나는 해마다 인도 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인도 순례는 달라이라마를 직접 인터뷰하거나 친견하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인연으로 내게는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가 처해 있는 현실, 티베트의 슬픈 역사를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러한 티베트 불교와의 인연들을 ‘필연에 의한 이끌림’이라고 표현한 것은 2000년부터 2001년까지 범국민적으로 일어났던 달라이라마의 방한 운동 때문이다.

당시 나는 달라이라마의 방한 운동을 전담해서 취재했으며 그 누구보다도 달라이라마가 이 땅에 오시기를 간절히 기원했었다. 기사를 쓸 때도, 취재 현장에 있을 때도, 꿈에서조차 ‘달라이라마’란 명호를 쉼 없이 부르고 있었으니 그 때의 정성스러움이란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트의 순례자가 지극하게 ‘옴 마니 반메훔’을 염송하는 것에 견줄 수 있었으리라. 수십 만 번 이상 ‘달라이라마’를 부르고 쓰고 사진 속에서나마 달라이라마를 친견하고 또 친견했으니 그러한 인연의 에너지는 분명 달라이라마와의 만남으로 이어졌을 것이라 확신한다.

부처님께서는 고통과 어려움을 양약으로 삼아 탐욕을 치유하는 데 쓸 것이며 근심과 곤란함으로써 사치한 마음, 이웃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경계하라 이르셨다. 라싸의 자연은 마음을 맑게 정화하고 남에 대한 배려를 몸과 마음으로 깨닫게 한다. 인간은 부족함에서 넉넉함에 대한 간절함과 이웃에 위한 나눔과 배려를 배운다.

부족하기 때문에 작은 풀 한 포기에도, 작은 돌 하나에도 감사하게 된다. 그들은 자연에 대한 끝없는 고마움과 감사함을 자연을 불보살님으로 변화시키는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한다. 너럭바위엔 불보살님을 조각하고 경전을 적고, 나무와 돌엔 카타(꽃을 대신한 흰 색 천)와 오색 룽다(경전을 적은 천)를 걸어 법당으로 장엄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불성(佛性)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너럭바위와 들녘, 나무는 부처와 도량과 도반

티베트는 순전히 자연만을 놓고 보면 구름과 해와 호수의 나라이며, 종교적으로는 영혼의 나라이며 불교의 나라이다. 세계 최고의 고봉들이 즐비한 히말라야와 쿤룬산맥, 4000m의 고지대인데도 광활한 들녘을 간직한 창베이고원은 아시아인 40억명에게 끊임없이 생명의 물을 보시한다. 고원들은 메마른 바위산과 구름, 강렬한 햇볕만을 간직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에너지와 자연의 힘이 응집돼 있는 호수들을 1만 5000여개나 간직하고 있다. 이들 호수들은 아시아의 수많은 생명들에게 삶의 에너지를 제공해 온 원천이다.

신비스러운 자연을 간직한 티베트는 신화의 나라이기도 하다.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잘 알고 있는 티베트인들은 자연을 이루고 있는 일체의 생명들을 ‘부처님’이나 ‘신’으로 받드는 정성스런 신앙생활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8만 4000개의 고봉만큼이나 많은 신화들을 간직한 티베트의 이야기에는 자연에 감사하며 자연을 부처님으로 받들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정성스럽게 간직하려는 티베트인들의 간절함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

티베트의 기원 신화에 따르면 관세음보살께서 달라이라마가 긍정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인연의 끈을 수컷 원숭이에게 보내도록 해 최초의 티베트 사람으로 진화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인연의 끈은 오색 무지개로 표현되어 있다. 이 신화에서 달라이라마는 7세기경 티베트를 최초로 통일한 송첸 깜포 대왕은 관세음보살과 인연이 깊었으며 송첸 깜포 황제도 세연을 다하면서 무지개로 변해 나무로 된 관세음보살상 속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증명하고 있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오색 무지개는 오색 룽다의 가르침과 같을 것이다. 오색 중 백(白)색은 허공을 상징하며 황(黃)색은 생명의 대지, 녹(綠)색은 생명의 강, 청(靑)색은 푸른 하늘, 적(赤)색은 달라이라마를 의미한다.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한 티베트의 시조는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에 따라 오색 에너지로 그들만의 샹그릴라(꿈의 낙원)인 티베트 고원을 만들었다.

끊임없이 괴롭히는 중국 위해 자비의 기도

티베트 기원 신화는 여느 국가들의 건국 설화와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 있다. 여느 국가들의 설화가 나라를 세운 시조를 신격화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티베트 신화의 줄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적인 자연관으로 구성돼 있다.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기원 신화를 완성했을 것이기에 관세음보살과의 인연 이야기가 주요 내용인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무지개와 같은 자연 현상마저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풀어낸 내용은 ‘역시 티베트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한다.

기원 신화 이외에도 티베트의 고승에 관한 설화에서도 ‘무지개’는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다. 티베트인들은 최상의 깨달음을 이룬 고승이나 구루 린포체(위대한 성취자)는 일체의 고통과 집착에서 자유롭기에 열반에 드실 때는 무지개로 화해 천상의 세계로 가신다고 믿는다. 티베트 사람들은 무지개가 뜨는 현상을 길조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무지개를 보면 오체투지의 예를 갖추기도 한다.

4000m 고원의 들녘에도 거대한 기중기를 설치해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국의 욕심은 티베트의 소박함과 대조를 이룬다.

북인도의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계신 달라이라마 역시 무지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몇 해 전 8월, 나는 위(UP) 다람살라에 있는 남걀 사원에서 달라이라마의 대중 법문을 경청하게 되었다. 습도가 많아 푹푹 찌는 인도의 여름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어느 날 아침, 법회가 시작되기 30분 전부터 장대비가 쏟아졌다. 비 때문에 법문을 경청하려는 사람들이 오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매우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쓸데없는 걱정(杞憂 기우)이었다. 다람살라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이 장대비를 뿌려대더니 비는 20여분도 안되어 그쳤고 맑게 갠 하늘엔 금세 오색 무지개가 그려졌다. 아름다웠다. 날이 맑게 개자 40여 개국의 수많은 불자들이 남걀 사원의 법당에 물밀듯이 들어섰고 이내 법좌에 오른 달라이라마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무지개 이야기로 법문을 시작했다.

“그래도 제가 완전히 가짜는 아닌가 봅니다. (대중들 웃음) 밖을 보세요, 아름다운 무지개가 떴습니다. 신통력도 없고 법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하늘님이 어찌 그리 시간을 잘 맞추어 주시는지 감사할 뿐입니다. 불자님들께서 법당에 오시는 시간에 맞추어 비를 멈추어 주셨고 오색 무지개 카타까지 선사해 주셨습니다. 알다시피 무지개는 법이 높으신 고승들을 상징합니다. 삼법인(三法印)을 깨달으시고 일체의 욕망과 번뇌로부터 자유자재하신 큰스님들은 육신의 틀을 일순간에 무지개로 변화시켜 열반에 드신다고 합니다. 제가 법이 아주 낮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하늘님(날씨)이 입증한 것 같아 체면이 좀 섰습니다.”

티베트인들이 자연을 이루고 있는 일체의 생명들을 불보살님으로 받들고, 하물며 바위와 나뭇가지마저 부처님과 경전으로 장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얼까. 비가 온 뒤 일상적으로 뜰 수 있는 무지개에도 불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1000여년 이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면서 고통과 병고, 부족함 등 부정적인 요인들에서 ‘그래 괜찮아’라며 긍정의 에너지를 체득하기 위한 수행을 일상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다.

평지에 비해서 넉넉하지 않은, 오히려 척박하고도 메마른 자연은 늘 부족함을 선사했을 것이며 티베트인들은 자신들의 귀의처인 자연의 부족함에서 감사함과 고마움, 배려를 체득했을 터이다. 처음 라싸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나를 당황스럽게 한 것 중 하나는 라싸 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고봉 어디에도 녹색 기운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하늘을 찌를 듯 날카로운 바위와 녹색 기운이 없는 고봉들은 암울한 잿빛이었다.

티베트인들은 척박한 자연을 부처님으로 받들면서 그곳에서 긍정의 에너지와 탐욕을 물리치는 양약을 찾아내는 비법을 끊임없이 전승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한 티베트인들의 정직함과 자비로움, 달라이라마를 향한 열정은 중국이 티베트의 영혼을 영원히 가둘 수 없게 하는 에너지들이다. 척박한 자연, 그것은 분명 티베트가 끊임없이 힘을 앞세워 자신들을 탄압하는 중국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에너지의 근원이다.

中에 맞선 유일한 무기는 진실과 용서

달라이라마는 1989년 12월 10일 제69회 노벨평화상 수상 소감에서 비록 중국에 고향과 수 없이 많은 형제들을 잃었지만 티베트의 영혼이 자유로울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저는 우리 민족에게 지대한 고통을 주고 우리 땅과 가정과 문화를 파괴한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분노와 증오심을 품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행복을 추구하고 자비심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이 자리에 서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제 조국의 슬픈 상황과 제 동포의 열망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자유를 향한 싸움에서 우리가 가진 무기라고는 진실 밖에 없으니까요.”
『달라이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 중에서

 
라싸=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