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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형효 명예교수

기자명 법보신문

새벽별 빛나는 것은 어둠 있기 때문

오늘의 강연 주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입니다.
불교는 세계의 어느 학문, 철학과도 달리 개념적인 지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흔히 ‘알음알이’라고 하는 개념적 지식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개념적인 지식보다는 직관적으로 아는 것을 중요시여깁니다. 개념이라는 것은 내가 생각해서 아는 것입니다. 대학에 배우는 것들이 주로 개념적인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세존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불교는 직관지라고 해서 눈을 뜨자마자 아는 것, 세상이 알게 해 주는 것들을 중시여깁니다. 예를 들어 높다 낮다, 있다 없다, 길다 짧다, 이런 것들입니다. 높다 낮다, 있다 없다, 길다 짧다는 것은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의지할 만한 대상을 찾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세존의 가르침은 여기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개념이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의 생각의 표현이고 나의 생각의 논리입니다. 그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지식, 이론, 감정을 다 동원해서 자기의 생각, 논리, 이론을 정당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다 없다’와 같은 것들은 ‘없다’는 것이 없으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힘들고 ‘있다’는 ‘없는 것이 아닌 것’, ‘없다’는 ‘있는 것이 아닌 것’ 정도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데에는 다른 어떤 개념적 지식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장단(長短), 생사(生死)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독자적 의미 갖는 ‘개념’은 소유론적 가치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명상에 들었을 때 문득 새벽하늘에서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 ‘반짝반짝’을 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신호입니다. 즉 세상만사가 모두 ‘반짝반짝’이는 불빛처럼 기호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홀연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리셨다고 합니다. 그 눈은 바로 별빛이 반짝반짝이는 것, 물이 똑딱 떨어지는 것과 같이 세상이 곧 기호라는 것입니다.

개념과 기호는 다릅니다. 불교의 철학은 세상을 개념이 아닌 기호적으로 보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철학적으로 해석해보면 불교는 결코 개념론이 아닙니다.
개념이란 하나의 개념이 독자적인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말’이라고 하면 ‘말’이라는 하나의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동서양의 모든 철학이 각각 나름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동물이다’ 같은 식의 정의이지요. 이처럼 하나의 개념이 그 자체로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개념론입니다. 이렇게 개념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이 오랜 세월 동서양의 철학을 지배해 왔습니다. 부처님의 사유방법인 기호론은 역사 속에서 늘 비주류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호론이 미래철학의 주류가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반짝반짝, 똑딱과 같은 기호에서는 ‘반’이 없으면 ‘짝’은 의미가 없고 ‘똑’이 없으면 ‘딱’이 의미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기호는 홀로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쉽게 교통신호를 예로 들어볼까요. 정지를 나타내는 적신호는 진행하라는 초록불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반짝이는 샛별을 보고 세상을 보는 이치가 열렸듯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의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대대법적인 기호로 돼 있다’입니다. 기호라는 것은 나 홀로 존재하지 않고 그것이 가능케 해주는 다른 것, 대립되는 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세상은 그렇게 이뤄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여여한 법칙이고 부처님께서는 이 법칙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절대로 세상 만물을 개념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개념이라면 자기가 홀로 독자적으로 의미를 갖고 성립하고 그 의미를 탐구하고 연구하고 자기 의미의 성체를 내세우게 됩니다. 그것을 공격당하면 자존심이 상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방어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투쟁하고 싸워 왔습니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만물을 홀로 성립하는 개념, 자기 존재의 이유를 자기 스스로 갖고 있는 그런 실체로 보지 않습니다. ‘똑’은 ‘딱’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고 ‘남자’는 ‘여자’가 없으면 성립하지 않듯이 불교는 모든 만물은 상호 의존적인 존재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개념적으로 문제를 보지 않기 때문에 인간 역시 개념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을 함께 해석합니다. 동물이나 식물, 광물 같이 인간 아닌 중생이 없다면 인간 역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중생이 독자적으로 우주의 주인인양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주요 요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불교는 모든 존재를 상호 의존적으로 봅니다. 동물이 없고 식물이 없으면 인간도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고, 생각하고, 알고 있는 것을 보석처럼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문제가 사실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모두 차이의 기호입니다. 차이를 말하는 것은 차이가 없으면 기호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똑딱 할 때 똑과 딱의 차이, 반짝할 때 반과 짝의 차이, 그런 차이에 바탕해서 세상을 기호로 연결시켜 보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도 차이에 대한 기호에 불과합니다. 개념론에는 차이의 기호가 필요 없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인간론은 이야기 하지만 동물론, 식물론, 광물론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인간론을 이야길 할 때 중생론을 이야기합니다. 중생 속의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인간만 떼어서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기호는 자기와 다른 타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간 역시 동·식물과 광물 등이 필요합니다. 개념은 독자적으로 자기의 의미를 구축하고 자기 개념의 영역을 쌓아 다른 개념과 관계 맺지 않고 자신의 의미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기호는 다른 것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늘 다른 것과의 관계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차이와 차별은 다릅니다. 남녀차별과 남녀차이는 다르지요. 차별은 부당합니다. 남녀를 차별하는 것은 무시하는 것이고 부당한 것입니다. 차별은 인연의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는 서로 의존하는 관계입니다. 상호 연기되고 있다는 관점입니다. 너와 나는 서로 상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남편이고 아내는 남편의 아내입니다. 어디에서나 그 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저의 성격과 생각과 감정이 전부 아내에게 연기되는 것입니다. 연기라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내가 저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호라는 것은 이 차이와 연기라는 두 가지 개념이 합쳐진 것입니다.

의지하고 있는 기호로 세상을 보여준 붓다

그런데 기호적인 사고방식에서 보면 반과 짝 사이에 약간의 휴식기가 있습니다. 약간의 정지, 휴식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없을 무(無)입니다. 이 기호와 저 기호 사이에는 약간의 공간, 허(虛)가 있는데 이것이 두 기호의 공존을 가능케 해 줍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모든 기호 사이에는 차이의 경계를 알려주는 기호, 그것이 무(無)이고 동시에 공(空)입니다. 법당의 두 기둥인 색 사이엔 빈 공간, 공백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반짝과 똑딱 등 모든 삼라만상의 존재 방식은 전부 차이의 상관관계입니다. 그 차연 관계 사이에 공백, 쉼, 휴식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차이의 기호가 성립되질 않습니다. 세상이 얽혀서 뒤죽박죽이 되어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색의 상관관계는 자기 내부에 이미 공백을 안고 있습니다. 생사도 마찬가지로 생사의 사이가 있고 그 사이에 불교가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 방식은 차이의 그물망입니다. 남자와 여자, 동물과 식물, 하늘과 땅, 모두가 차이의 그물망입니다.

개념은 소유론 적이지만 기호는 존재론적입니다.
개념은 내가 가지려고 합니다. 개념은 명사 위주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개념의 철학이 아니고 기호의 철학입니다. 기호는 상관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동사적인 행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존재와 존재자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존재는 모든 것에 다 적용됩니다.

그런데 존재가 무엇인지는 개념이 아니므로 설명할 수 없지만 모든 존재는 상관적인 관계입니다. 스님이 있기에 절이 있고 절이 있어 신도가 존재하고 등등. 존재는 개념이 아니라 순간적인 행위들의 연속이지만 그것이 서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 공동존재입니다. 존재론적이라는 것을 보다 쉽게 풀어 이야기하면 공동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유론적인 것은 절대 공동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공동존재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소유론의 차원에서 존재론의 차원으로 마음의 축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소유론의 사회생활에서 이타와 자리적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론적 사회생활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강의는 8월 29일 동국대학교 정각원에서 열린 토요법회에서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불교의 철학적 사유’를 주제로 진행한 강연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김형효 교수는

1940년 경남 의령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문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학교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루뱅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 연구교수, 서강대철학과 부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7회 율곡대상 학술부문, 2007년 제19회 서우철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이며 「법보신문」에 ‘김형효 교수의 다시 읽는 신심명’을 연재하며 쉼 없는 수행과 연구의 열정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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