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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묵 스님의 풍경소리]

기자명 법보신문

그리움 없는 이는 존재의미 상실한 사람
깨어있는 사람에겐 늘 그리움이 한 가득

하늘은 높아 가고
마음은 깊어 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여 오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고
죄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 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 없이
강이 흐르네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 때마다
한 웅큼의
시(詩)들을 쏟아 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 가고
기도는 깊어 가네

이해인 수녀님의 ‘가을 노래’라는 시다. 시처럼 가을은 그리움을 담아낸다. 그래서인지 새벽 예불을 마치고 나오며 올려다 본 하늘의 투명한 보석처럼 빛나는 별에, 나뭇잎의 빛깔이 엷어짐에, 가벼워진 바람결에, 낮아진 계곡의 물소리 등에 그리움이 담겨진다.
젊어서는 젊음에서 오는 그리움이 있고 세월이 흐르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오는 그리움이 있는 것 같다.

출가해서 한 동안 젊어서의 그리움은 채 삭히지 못한 그리움이었다. 부끄럽지만 가슴 절절히 삶의 고해를 느끼고 들어선 길이라기보다는 의식적으로 택한 데에서 온 것일 수도 있었다. 이따금씩 스물스물 피어나거나 엉겁결에 삐죽 튀어나오는 그 마음을 경전의 말씀과 참회 등을 통해 다스려보겠다고 했지만 기실 그 마음을 없애기 보다는 억지로 구겨 넣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구겨 집어넣었던 그런 그리움의 마음이 간혹 펴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제법 힘을 잃은 듯 하다. 하지만 대신 또 다른 그리움이 자리한다. 세월이 이리 흘렀으니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어 내 서있는 자리를 되돌아보면 아직도 멀기만 한 본향(本鄕)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를 김달진 거사님은 ‘임의 모습’이란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다가 문득 문득/ 가슴 하나 월컥 안기는 그리움/ 해바라기 숨길처럼 확확달아/ 가을 석양 들길에 멀리선다/ 애달픈 이 사모(思慕)를/ 혼자 고이 지닌 채 이 생(生)을 마치오리까?/ 임아. 진정 아닌 척 그대로 가야 하리까?/ 살아 한번 그 가슴에 하소할 길 없어.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이 세월이 흐르고 한 곳에 오래 머물다보면 이런 그리움마저도 잃어버리고 수행은 기계적으로 일상화 되거나 체념어린 투정만을 담고 일상에서의 윤회를 거듭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아니라고 부정했던 것들과 이미 친숙해져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리움이 없는 이는 존재 더 이상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사람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류시화 시인의 싯귀처럼 깨어있는 사람에겐 늘 그리움 한 가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을 기운이 무르익은 요즘, 새벽 찬 기운에 자신을 일으켜 깨우고 그리움을 별 삼아 온 하늘에 수를 놓았음 한다.
 
정묵 스님 manib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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