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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칼럼] 치열함과 쉼의 사이

기자명 법보신문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어느 새 가을은 우리 곁에 와 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지만 조락의 계절이기도 하다. 여름의 땡볕 더위와 폭우를 견딘 열매가 삶의 풍성함을 더해준다. 좀 있으면 화려한 가을 단풍도 우리 눈에 들어 와 색다른 세계를 경험케 할 것이다.

하지만 이내 잎은 떨어져 나가고 낙엽이 거리를 가득 채울 것이다. 피고 지는 생사의 순환을 한 눈에 보여주는 계절이 가을일 것이다. 그러기에 사계의 변화 중에서도 가을에 느끼는 ‘무상’은 실로 더하기만 하다. 가을 여행이 다른 계절의 여행보다 철학의 길로, 깨달음의 길로 안내하는 게 이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광화문에도 가을을 알리는 표식이 있는데 바로 ‘교보 글판’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교보생명 건물에 내 걸리는 짧은 글은 항상 화제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이 글이 시민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단 몇 마디이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에서 발췌한 것이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린 몇 밤, 저 안에 땡볕 한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나무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한 알의 대추도 고통스러운 역경을 이겨내고서야 익어 간다.

베트남을 통일한 호치민의 어록에는 쌀의 치열함이 담겨 있다. ‘절굿공이 아래서 짓이겨지는 쌀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러나 수없이 두들김을 당한 다음에는 목화처럼 하얗게 쏟아진다.’ 대추 한 알과 쌀 한 톨의 치열함이 이러한데 사람의 일이야 오죽할까!

하지만 이러한 치열함의 연속은 숨을 턱 막히게 한다. 그러니 잠깐의 ‘쉼’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가을, 선사들의 선시를 만난다면 치열함을 떠나 잠시나마 평정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봄에는 갖가지 꽃, 가을엔 달. 여름엔 맑은 바람, 겨울엔 눈. 마음에 걸림 없이 한가롭다면 이야말로 인간세상 좋은 시절이라.’ 운문 스님의 시로 알려진 이 선시를 범어사 무비 스님은 이렇게 번역했다. ‘봄에는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달빛이 좋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눈이 아름답다, 만약 쓸데없는 일이 마음에 남아있지 않으면 그것이 곧 인간의 좋은 시절이다.’

둘 다 멋진 해석이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할 것 없이 사계의 변화를 잘 살펴 자연의 변화를 잘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그 속으로 들어가 동화될 수 있다면, 마음 한 자락 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있다. 쓸데없는 일이 마음에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 세상에 부질없는 일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 다 부질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이치를 알기 위해 잠깐 동안이라도 쉬어보는 것이다. 마음을 내려놓아 보는 것이다.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소멸하면 갖가지 법이 소멸한다’하지 않는가. 도인의 경지는 아니지만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밖으로 물러나 볼 수는 있다. 그래야 새 힘이 생겨 이 순간을 더욱 치열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치열함과 쉼도 둘은 아니리라.

가을이 전하는 ‘무상’ 속으로 여행을 떠나 치열함과 쉼을 배워봄은 어떠할지! 시집 한 권이나. 선어록 한 권, 또는 인문서적 한 권이라도 들고 길을 떠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세상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 자락 쉴 수 있다면 보람된 일이겠지만 책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사유하며 걷는 산책 또한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건물에 걸린 글 한 줄도, 길가에 핀 코스모스 한 송이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가을이 아닌가!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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