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묵 스님의 풍경소리]

기자명 법보신문

지금은 속이는 것조차 남다른 능력이 된 세상
이것은 우리를 파멸하고 업을 견고히 하는 일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면서 짙은 빛깔과 풍성한 잎새를 자랑하던 낙엽목(落葉木)들이 서서히 본지풍광을 드러내고 있다.

한 여름 자신의 위용을 한껏 드러내주고 햇빛을 받아들여 자신을 성장시키며 가려주었던 한 몸이었건만 본래 자리로 돌려보냄은 하나 둘 모든 것을 떨어내고 적나라한 맨 몸이 되어야만 다가오는 혹한을 극복해 낼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혹한을 견뎌내기 위해 이런 아픔을 감내하듯이 우리도 이제 그런 이별을 해야 한다. 겨울을 앞 둔 나무에게 삶의 지혜를 배워야 점점 다가오는 어려움을 버텨낼 수 있다. 실속은 없이 허풍스럽고 그럴듯한 폼새와 말로 자신을 내세우는 것, 유명상표로 휘감는 것, 학력이나 이력만으로 자신을 커버하려는 것 등의 허울은 찬바람을 칼날 삼아 베어내고 스스로 속임을 없애야 한다.

전에 이런 나무처럼 살아가는 분을 뵌 적이 있다. 학창 시절, 국어과 교수이며 시인(詩人)으로 누구도 맡기를 꺼려하던 불교 동아리의 지도교수를 맡아 주셨던 분이셨다. 80년대 중반이라지만 연세가 정년에 가까우셨던 분이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셨고 옷은 사철 변화가 거의 없으셨다.

그리고 군사정권하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후한이 두려웠기에 가진 자일 수록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만 삭히며 말 내기를 꺼리던 그 시절, 자신의 소신으로 해야만 될 말은 거칠고 선동적인 언어가 아닌 깊숙한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감성적이면서 꼿꼿한 음성으로 토해내시곤 하셨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자기의 앎이 삶과 일체 될 수 없는데 대해 부끄러워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셨던 그런 분이었다. 세월 따라 이제는 그 분의 말씀도 거의 잊혀졌지만 여름으로 접어들던 어느 수업 시간에 하신 말씀만은 남아있다.

“어제 모처럼 공원에 올라가보니 못 보던 나무 의자들이 보이더군요. 좀 쉬어갈까 해서 가보았더니 진짜 나무가 아니라 시멘트로 나무 모양이 나게 만든 거였습니다. 이건 큰 거짓입니다. 사소한 일 같지만 우리는 이런 일을 통해 거짓에 물들어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점차 그 거짓이 아주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게 되고 오히려 진실은 외면당하게 됩니다. 진실이 설 자리를 잃어갈수록 우리는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사회가 불안해지고 모두의 삶이 불행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길거리를 다니면서 시멘트로 만들었지만 겉 무늬를 나무 모양이 나도록 꾸며 만든 벤치며 휴지통 등을 보며 무심결에 ‘괜찮은데. 누가 이런 것을 다 개발했을까?’하며 받아들이던 나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이젠 정말 교수님 말씀처럼 속이는 것조차도 남다른 능력인 세상이 되어버렸고 속는 자는 착한 것이 아니라 무능력자로 인식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겉으로 맨얼굴이라 내세우지만 그 맨얼굴 자체마저도 가공되어 참으로 믿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 모두가 우리를 속이는 일이고 서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길이며 업을 더욱더 견고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기에 우리 모두 겨울을 나는 나무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웠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증도가』 중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모두에게 맡겨본다.
直截根源佛所印
(직절근원불소인)
摘葉尋枝我不能
(적엽심지아부능)

근원을 곧바로 끊어버림이 부처님 인가하신 바요, 잎 따고 가지 찾음은 내 할 일 아니로다.
정묵 스님 manibo@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