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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싸를 가다] 17.혜국 스님의 티베트 불교 이야기 [下]

기자명 법보신문

그들의 언어와 영성 사라지는 건 인류사적 손실

 
티베트 전통의 익살스러운 가면극, 티베트인들의 순수하면서도 걸림이 없는 품성이 엿보인다.

티베트인들의 영적인 삶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느끼셨나요, 아마도 우리와는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그들의 삶은 편하게 먹고 부자가 되겠다는 우리의 뇌구조와는 근본부터가 다릅니다. 그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가’란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온 몸에, 온 마음에 담고 살아갑니다. 그들의 멈추지 않는 수행은 ‘어떻게 하면 더 맑고 청정하게 죄 안 지으며 살아갈 수 있는가’에 집중돼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삶은 1300여년 동안 대대손손 이어져 오면서 몸과 마음의 구조마저 바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티베트 사람들은 지난 50년 동안 남(중국)이 뭐라고 하건 마니차를 돌리고 포탈라궁을 순례하고 라싸의 돌과 나무에 룽다를 걸고 커다란 바위산에는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을 새겨 장엄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그런 행동을 못하도록 하고 있음에도 그것마저도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기도에 몰입할 수 있는 건 수백, 수천 년 동안 기도하고 순례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라싸에 오면서 티베트인들의 맑은 영혼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잠시 의심했었습니다. 이제는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중국 때문이었지요. 그럼에도 라싸에서 티베트인들의 맑은 영혼을, 묵묵히 오체투지를 하면서 순례를 하고 있는 티베트인들을 볼 수 있었다니 참으로 감동스러웠습니다. ‘아! 저런 순수한 영혼들을 내 평생 한번 내 눈으로 직접 봤구나’하는 영혼의 울림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글펐습니다. ‘그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곳 라싸에 다시 왔을 때 티베트의 맑은 영혼을 다시 볼 수는 없겠구나’하는 어두운 미래가 눈에 보이더군요. 그래도 이번 순례에서 티베트인들의 지극하고도 정성스런 기도를 내 마음에 담아갈 수 있다니 정말 큰 선물을 얻어가는 느낌이 들어 뿌듯했습니다.

무소유는 욕망을 치유하는 유일한 백신

여러 불자들이 얼마나 믿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경전을 적어 놓은 룽다를 진실 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경전이란 입으로 읽는 경전이 있고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혹은 온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찬탄하고 염송할 수 있는 경전도 있습니다. 라싸를 순례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4000m, 5000m 고산지대에선 공기가 희박해 말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곳 라싸 사람들은 오체투지로서 경전을 읽고 입으로 계속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천 조각에 경전을 써서 나무와 공터, 도량 주위를 장엄합니다. 그것이 바로 룽다(타르쵸)입니다. 걸림 없이 그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 바람이기에 그 기운을 빌어 부처님의 자비가 천지사방에 널리 홍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룽다를 내겁니다.

나무와 풀 한 포기에도 부처님의 자비가 깃들기를 서원하면서 룽다를 걸어 이곳이 바로 불국토임을 알리는 것이지요. 그들은 룽다를 걸어 놓음으로써 일체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연을 이루고 있는 나무와 돌과 물과 흙에도 생명과 불성(佛性)을 불어 넣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이 눈만 뜨면 순례를 하고 오체투지를 하는 것은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부처님의 자비심을 단 1분 1초라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상(相)을 내지 않는 자비의 마음을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일상에서 모기와 같은 해충에게도 자비의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온 몸과 온 마음에 밴 기도와 순례의 에너지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바로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명체들이 숨을 쉬고 있다는 건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남에 대한 자비와 배려, 사랑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누군가의 삶이라 할지라도, 혹은 작은 생명체의 삶이라 할지라도 생명은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일체의 생명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하늘과 땅 사이의 허공에 빚을 지고 있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다른 생명에게 불편함을 줍니다.

티베트의 불자들은 이러한 이치를 부처님과 달라이라마를 향한 지극한 신앙과 적어도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과연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만큼 척박한 티베트의 자연에서 배웁니다. 수천 km를 오체투지를 하면서 순례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부처님과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에 대한 한 점의 의심도 없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이 가장 낮은 자세로 낮출 수 있는 오체투지의 회향은 늘 수미산이나 달라이라마가 주석하셨던 포탈라에서 마무리 됩니다.

수십 만 번의 오체투지로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정화한 후에야 자신들이 관세음보살로 추앙하고 있는 달라이라마를, 수미산을 친견합니다. 최소한의 음식과 도구만을 지닌 무소유의 맑은 마음으로 나서는 오체투지는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고 낮고 높음의 경계를 허물며, 순간순간 순례자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미세한 분별심과 망상, 삼독(三毒) 마저도 제거할 수 있는 최상의 수행법 중 하나입니다.
이 얼마나 지극하고 아름다운 불심입니까.

부처님께서 이 땅에 나투셨을 때 다섯 가지 계율을 설하셨습니다. 그 당시야 지금과 같이 산업과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는데도 오계의 첫째 계행으로 생명을 귀히 여겨 살생하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왜일까요, 지금처럼 자연을 대규모로 개발하거나 인간의 편리를 위한 기계나 자동차를 이용함으로써 수 없이 많은 생명을 해칠 일도 없을 터인데 불살생(不殺生)을 특히 강조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인간이 삶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간에 순간순간 수많은 살생이나 욕망과 연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름 궁전인 노블링카에선 달라이라마를 향한 불멸의 존경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을 위해 건물을 화려하고 거창하게 지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달라이라마가 항상 머물렀던 궁전의 1층에서 밤 9시를 가리킨 채 멈추어 버린 낡은 시계를 보았을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그 시계를 보고 어떠했을지 모르겠으나 그 느낌이 남달랐습니다. 그 시계를 보고 있자니 어버이를 잃은 자식들의 슬픔이 그대로 밀려왔습니다.

누구의 아이디어로 그 시계를 그 자리에 걸어놓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국의 서슬 퍼런 계엄령 상황인데도 달라이라마께서 떠난 그 시각을 알리는 시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니, 참으로 대단한 백성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만큼 법을 소중하게 여겼으면, 얼마만큼 달라이라마를 흠모했으면 저 시계가 노블링카를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했는가 하고 감탄했습니다. 중국이야 9시에서 멈춘 이 시계를 ‘달라이라마의 역사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도구로 여기겠지만 티베트 사람들은 달라이라마가 다시 포탈라로 귀향할 수 있기를 기다리는, 달라이라마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기를 기원하는 서원의 시계이자 약속인 셈입니다.

티베트 지혜의 등불 다시 타 오르기를

라싸에서 이역만리 떨어져 있지만 고향의 백성들로부터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는 달라이라마의 지금 심경은 어떨까요. 몇해 전 북인도 다람살라에서 뵈었던 달라이라마의 자비로운 얼굴이 떠오릅니다. 달라이라마께선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려운 상황을 얼굴에 드러내지도 못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계실 겁니다. 그 고통의 무게는 세상에서 가장 높고 큰 티베트의 고원에나 비유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티베트의 영혼은 그 누구도 힘이나 강요에 의해 가둘 수 없다. 자유를 갈망하는 티베트인들의 간절한 기도를 아는 듯 두 마리의 새가 수미산 근처에 있는 ‘마팡융쵸’(불패의 호수, 4560m) 호수 위를 유유자적하게 나르고 있다. 갠지스, 인더스 강의 원류인 이 호수는 인간의 욕망을 씻어주는 성스러운 호수이다. 사진제공=일광여행사

달라이라마는 영원을 믿는 분이기에 100년, 200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건 별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달라이라마의 지금을 평면으로만 보지 않고 원으로 볼 것 같으면 티베트의 현실은 결코 아픔과 절망 속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원이라는 게 본디 점이 모여진 것이다 보니 한 점에서 보면 주인을 잃은 집(노블링카와 포탈라), 주인이 없는 집, 주인을 기다리는 집, 주인이 떠난 집의 허전함이 이렇게 쓸쓸하기만 하구나 하며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티베트 사람들의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슬픔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결코 달라이라마를 향한 믿음을 놓지 않습니다. 그들의 꾸밈없는 영혼들을 친견하셨다면 이번 순례는 정말 의미 있는 순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티베트 불교는 외부의 힘에 의해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티베트 고원의 어느 계곡인가에는 강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비구니, 오른쪽에는 비구 스님들이 평생을 수행하면서 정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수행의 계곡은 한번 자원해서 들어가면 숨이 끊어져야만 나올 수 있는 곳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러한 수행 공동체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티베트 고원 곳곳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류는 안타깝게도 어떻게 해야 영원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미 더 큰 욕망을 향한 삼독의 대로로 접어들었습니다. 그 속도는 점점 빨라져 이제는 좀처럼 멈출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과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을 구심점으로 살아 온 티베트 공동체가 삼독의 덫에 빠진 인류에 던진 가장 큰 메시지는 영원의 행복과 지속 가능한 삶입니다.

한정되어 있는 지구상에서 인류가 어떻게 하면 영원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무소유의 삶으로서, 일체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비의 마음으로서 보여준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는 생명과 평화, 자비와 사랑이란 대단히 보편적인 가치들이 담겨 있습니다. 라싸에서 보고 듣고 마음으로 느꼈던 티베트의 맑은 영혼을 되새기며 함께 기도합시다.

북천축의 달라이라마와 티베트인들이
지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더라도
태양 광명이 구름에 가려 잠시 어둡지만
결코 빛의 에너지를 잃지 않는 것처럼
용기와 희망의 인연을 놓지 않으시기를
카타와 룽다 공양을 올리며 서원합니다

삼독의 바다에 빠져있는 지구촌 곳곳에
티베트의 순수한 영성 구름 몰려들어
일체의 생명들이 그러한 인연공덕 본받아
시방삼세에 지혜의 燈으로 타 오르기를
인류가 앓고 있는 곤란함과 병고, 장애를
치유할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라싸=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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