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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묵 스님의 풍경소리]

기자명 법보신문

세월따라 분수에 넘치는 이름 얻고 물든 내 삶
한가위 보름달보며 그동안 등졌던 초심 찾길

한 동안 비 소식이 없어 청류동 계곡이 바짝 잦아드는 것을 보며 비를 고대했는데 모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려 반가운 날이다. 그리고 가뭄에 비 같은 스님을 만나고 온 날이라 더욱 기쁜 날이었다.

송광사 강원에 처음 입방한 날, 바로 윗반인 스님에게서 느껴지던 기운은 신선하고 차분하고 다듬어졌으면서도 생각도 몸도 틀져 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이었다. 어쩌다 일 년에 한 두번 기약 없이 만나보면 스님은 늘 그렇게 길을 가는 모습으로 안주하려는 내게 무언의 가르침을 보여 주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스님도 내년이면 쉰 고개에 들어서는데 여전한 모습을 보여준다다. 그런 스님을 만나고 온 날은 연꽃에 향을 맡은 듯 기분이 좋고 한 동안의 양식을 얻은 듯하다.

“初發心時便正覺(초발심시변정각)”이란 말을 늘 되새긴다 하여도 세월의 흐름 따라 처음 출가할 때 그 마음과 자세를 놓치지 않고 길을 간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참으로 힘든 일이다. 앞서 말한 그런 스님들을 만날 때나 정신이 번쩍 들었을 적 초심을 놓치고 사는 나 자신을 마주 하고 모골이 송연하곤 한다.

나 자신도 그러하면서 기대했던 스님의 변해버린 모습에 이쪽저쪽으로 맘을 상해하기도 한다. 일전 마산에서 있었던 행사장 입구에서 근 십오육년 만에 조우한 한 스님에게 그런 일을 경험했다.

그 스님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하였지만 강원에서 그 스님의 행자 시절 사는 모습을 보며 기대가 컸기에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풍문에 제주에서 큰절 주지소임을 산다기에 참 잘 살겠거니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 친분을 쌓지는 않았지만 선후배를 떠나 보자마자 반갑게 먼저 합장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 스님의 답례는 나를 참 무안스럽게 했다. 등치가 큰 절에 살다보니 자기도 그만큼 큰 줄로 착각하고 있음을 느끼며 한 동안 중생심에 씁쓸해 하였다. 그러면서 돌아보니 그 스님뿐만 아니고 분에 넘친 자리에 있으면서도 일단 이름을 걸게 되면 그 자리로 자신을 내세우려는 사람을 종종 본 경험이 있다.

세상 물정 모르고 때 묻지 않았다 싶은 수계도반이 있었다. 한직에 있을 때는 늘 그런 모습이었기에 성품도 그러려니 했고 간혹 만나면 반갑게 지냈다. 그런데 그 스님이 때 이르게 강원도에 큰 절 명자(名字)주지를 띠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받는 자리에서 마주하게 되어 여러 도반들이 축하 한다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응대하는 것이 황당할 정도로 이미 우리와는 레벨이 다른 큰스님이었다. 그 모습에 도반들이 많이 안타까워했는데 이제는 절 집안 어디에 사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 도반 뿐 아니라 중생심이 있는 한 누구도 크건 작건 이름이나 재물들에 물들게 마련이긴 하지만 거기에 금시 푹 빠진 이들을 보면 우습기도 하고 마음이 다치기도 하면서 나 자신을 꼼꼼히 훑어보면 오십보백보구나 싶어 밖을 향하던 마음을 내려놓곤 한다.

이 밤 내리는 비에 맘을 씻어 그저 세월에 따라 분수에 넘치는 이름과 위치를 얻고서는 거기에 물들어 착각에 빠져 등졌던 초심을 되살리고 한가위 보름달 바라보기를 발원하며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해 본다.

온갖 보배 장신구를 몸에 두르고/ 아름다운 꽃과 향으로 꾸몄다해도/ 똥·오줌·침·콧물 등/ 깨끗지 않은 것을 그 몸 안에 품었음이라./ 중생들은 그것을 지키고 아끼면서/ 어리석어 그러함을 깨닫지 못하니/ 마치 어리석은 이가 재로 불을 덮고는/ 그 위를 걸어감과 같음이로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땅히 이를 멀리해/ 물들어 집착함을 내지 말지라.
 
정묵 스님 manib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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